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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
· ISBN : 9788954674799
· 쪽수 : 280쪽
책 소개
목차
중앙역
작가의 말
저자소개
리뷰
책속에서
그는 여자와 나 사이를 함부로 판단한다. 여자와 내가 가진 것이 없으므로 서로에게 줄 수 있는 게 없다고 단언한다. 가진 것이 없으면 나눌 수 있는 것이 없나. 서로에게 줄 수 있는 것이 없나. 그렇다면 그건 차라리 공평한 관계가 아닌가. 그는 왜 이 광장에서 우리를 내쫓으려고만 하나. 여자와 내가 광장에서 삶을 허비하는 것이 왜 잘못인가. 여자와 내가 원하는 건 이 광장의 한 귀퉁이에서 다만 더디게 흐르는 시간을 지켜보는 것이 전부다.
모르는 사람 앞에 빈 손바닥을 내밀어본 사람은 안다. 그 손이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는지 절감하게 된다. 그러니까 나는 수치심과 모멸감을 치르고 얼마간의 돈을 쥐는 것이다. 그러다보면 나중엔 그것이 무엇이었는지조차 잊어버리고 만다. 거리에서 한번 잃은 것은 되찾을 수 없다. 그런 것들을 영원히 잃는 대가라면 우리가 받는 돈은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잃을 게 없을 때까지 잃고 또 잃고 마침내 다 잃은 내 모습을 상상하는 건 끔찍한 일이다.
나는 아무에게나 손을 내밀고 돈을 구걸하기 시작한다. 아무 망설임 없이 손바닥이 펼쳐지는 게 놀랍다. 언젠가 빈 상자 앞에 엎드려 있던 사람이 생각난다.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공중을 향해 환하게 펼쳐진 손바닥. 아무도 모르게 상자 안의 동전을 재빨리 수거하는 손놀림 같은 것들. 보이지 않는 경멸과 멸시 따위가 지하도 계단을 바쁘게 오르내렸다. 이제 나는 그런 게 뭐 대수인가 생각한다. 손바닥을 내미는 게 뭐가 힘든 일인가. 혼자가 되는 것에 비하면 모르는 사람에게 손을 펼치는 것은 너무나 쉬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