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이미지
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
· ISBN : 9788957075173
· 쪽수 : 284쪽
책 소개
저자소개
리뷰
책속에서
몇 시쯤 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수없이 자고 깨었기 때문에 며칠이 흘러갔는지도 알 수 없었다. 다락방 안은 묘한 정적에 휩싸여 있었다. 인기척이라고는 나지 않았다. 고요함 속에서 누군가 조용히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그때마다 공기의 흐름이 달라졌다. 누군가가 무거운 부대 자루 같은 것을 질질 끌고 있었다. 둔탁한 것 위에 또 다른 둔탁한 무언가가 포개지는 소리가 났다. 누군가가 쉭쉭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나는 허공에 대고 물었다. “누, 누구세요?”
엄마와 이모들은 저항하지 않았다. 경찰은 모든 시신들에서 저항의 흔적을 발견할 수 없었다고 발표했다. 이모들답지 않았다. 이모들은 공장을 드나드는 거친 사내들을 상대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을 땐 상대가 누구든 두 눈을 똑바로 뜨고 올려다보았다. 죽음이 코앞에 있었더라도 이모들이라면 대들고 보았을 것이다. 엄마 성깔이라면 죽을 때 죽더라도 순순히 물러서지 않았을 것이다. …(중략)… 이모들은 그날, 그곳을 자신들이 죽을 시간, 장소라고 믿었던 것 같다. 엄마는 죽으면서도 내게 안녕,이라는 짧은 인사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나는 그날 그 아수라 속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사람이었다. 나는 눈뜬장님이었지만 대신 두 귀로 피부로 냄새로 내 앞에서 벌어지는 참혹한 광경을 다 보았다. 나는 죽음의 아우라를 보았다. 죽음이 커다란 외투처럼 이모들 몸에 드리우는 것을 보았다. 이모들의 코와 입으로 가느다랗게 생명이 빠져나오는 것도 보았다. 우리의 몸에 깃들어 우리를 움직였던 생명은 누군가 한 모금 깊이 빨고 천천히 뱉어내는 담배 연기처럼 가느다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