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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역사 > 세계사 일반
· ISBN : 9788958285076
· 쪽수 : 288쪽
· 출판일 : 2010-08-31
책 소개
목차
개정판에 부쳐
글을 시작하며
고대: 인류문명의 여명
인간은 왜 두 발로 걷게 되었을까 - 직립보행의 진화혁명
함무라비는 왜 ”법대로” 왕이 되었을까 - 4000년 전의 함무라비 법전
처음에는 남자도 치마를 입었다 - 기마민족의 발명품, 바지
”논어”에서 공자가 말하고자 한 것은 - 공자의 현실정치가적 됨됨이
아테네 민주주의, 그 허와 실 - 상업과 노예를 기반으로 한 극단적 민주주의
주인을 물어뜯은 투견 - 스파르타쿠스의 반란
저항종교에서 권력종교로의 화려한 변신 - 기독교의 국교화
중세: 외형적 확대와 정신적 빈곤의 양면성
아더 왕과 원탁의 기사들 - 중세봉건제의 형성 과정
마호메트는 성인이자 정치가였다 - 이슬람교의 창시와 그 부흥의 배경
8세기 인도에서 불교가 사라진 이유 - 불교는 지배층과 상인들의 종교였다
800년, 크리스마스에 있었던 일 - 기독교의 분열과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의 탄생
송나라의 과거제도와 입시지옥 - 평민에게도 개방된 출세의 관문
러시아는 어떻게 건국되었나 - 해상무역의 강자 바이킹족이 세운 팽창주의 국가
십자군 전쟁은 성전이었나 - 성지수복 명분 아래 자행된 추악한 약탈 전쟁
공포의 살육자들이 역사에 기여한 것 - 세계 최대의 제국, 몽고
근대I: 넓어지는 세계
동서양을 왕래한 두 항해가 - 다스코 다 가마와 정화
인쇄술이 열어 준 유럽 대륙의 르네상스 - 쿠텐베르크 『성서』와 고려의 『상정고금예문』
루터의 종교개혁과 독일의 농민 전쟁 - 종교 영역을 넘어 사회개혁으로 비화
일본에 상륙한 기독교 - 일본인들의 비상한 문화적응 능력
돈 키호테가 보여 주는 스페인의 이중성-16세기 스페인의 영광과 몰락
그래도 지구는 돈다? -지동설과 갈릴레이
명예혁명은 민중들에게도 명예로웠나-걸리버 여행기』와 영국의 의회정치
근대2: 민족의 각성과 투쟁
바스티유 감옥과 프랑스 대혁명 - 부르주아지와 파리 민중의 인권운동연합 등
럿다이트 운동 - 우매한 민중의 감정적 폭동이 아니었다
영국 산업혁명을 어떻게 볼 것인가 - 『올리버 트위스트』와 『인구론』
아편 밀수를 강요한 영국 - 아편전쟁과 홍콩
기구한 운명의 폴란드와 쇼팽 - 음악을 통해서 본 서구민족주의
'빈곤의 철학'이냐, '철학의 빈곤'이냐 - 1884년 혁명의 파도와 과학적 사회주의
체조운동의 탄생 - 근대 민족국가의 애국 이데올로기와 그 변질
미적 표현의 개인주의화를 시도하다 - 인상파 화가 모네와 세잔느
8시간 일하고, 8시간 잠자고, 8시간 쉬자 - 남북 전쟁과 8시간 노동제
피로 얼룩진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역사 - 보어 전쟁
현대: 민족국가의 마지막 전성시대
사라예보에서 총성이 울렸다 - 제1차 세계 대전 발발의 원인 등
탱크 대 화학무기 - 제1차 세계 대전에서 개발된 신무기들
러시아 10월혁명의 그날 - 볼셰비키와 레닌의 역할
제2차 세계 대전과 원자폭탄의 비극 - 모험적 정치논리에 희생된 과학자의 양심
20세기에 부활한 마녀사냥 - 매카시 선풍
상류층 클래식에 도전한 대중음악 - 로큰롤의 탄생
사회주의, 역사의 뒤안으로 사라지다-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
저자소개
책속에서
로마의 지배층은 낮에는 검투사 경기를 관람하고, 저녁이면 호화찬란한 연회를 즐겼다.……로마의 지배층들은 이런 생활에 아주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에 기원전 73년의 스파르타쿠스 반란은 전혀 뜻밖의 일이었다. 로마인들의 관심은 단지 외적의 침입으로 노예무역이 방해를 받지 않을까 하는 데만 있었다. 스파르타쿠스가 2년 동안이나 전국을 누비며 위세를 떨칠 수 있었던 것은 로마인들의 이러한 안이한 인식 덕분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러나 반란을 일으킨 노예들의 소망은 로마 체제를 전복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원래 평화롭게 살던 고향으로 되돌아가는 것이었다. 당시 평민들이 채무를 감당하지 못해 노예로 전락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노예의 수요가 늘어나면서 알프스 이북 지방으로부터 노예를 수입해 오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국 노예 반란군은 알프스 산맥을 넘지 못하고 토벌되고 말았다.
이러한 때 예수는 ‘평등’과 ‘구원’의 교리를 내걸며 계급에 따른 신분 질서를 무시하고 모든 사람이 똑같이 하느님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주장했다. 이는 기존의 유대교 교단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이었다. 당시 유대교는 『모세 5경』만을 믿는 사두가이파와 『모세 5경』 이외에 전래의 관습 법규까지 포함해서 율법을 지킬 것을 주장하는 바리사이파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둘 다 전통과 관습을 중시한다는 점에서는 똑같았으며 이는 예수가 주장하는 탈계급적, 보편적 사랑과는 정면으로 대립될 수밖에 없었다. 율법학자들의 눈에 예수는 유대민족의 선민 의식을 반대하는 이교도로 비쳤다. 예수 역시 『성서』에서 보듯이 이들 율법학자들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키예프-루시 공국은 비잔틴의 콘스탄티노플과 이슬람의 바그다드를 왕래하면서 주로 비단과 은화를 수입했다. 특히 중국 비단을 모방해 만든 비잔틴의 비단은 키예프의 여성들에게 인기가 높았다고 한다. 반면에 그들이 수출하는 상품은 모피가 고작이었다. 그런데 모피는 남쪽 더운 지방에서는 수요가 많지 않아 좀 더 경쟁력 있는 상품을 개발해야 했다. 그들이 개발한 최대의 상품은 인간, 즉 노예였다. 그래서 키예프의 루스인들은 쉬지 않고 주변 슬라브인들을 사냥해 콘스탄티노플과 바그다드의 노예시장에 내다 팔았다. 이들은 한때 오늘날의 체코와 오스트리아 부근까지 가서 노예사냥을 했다고 한다. 오늘날 사회주의 체제가 붕괴하면서 연방을 지탱하던 힘이 사라져 버리자 러시아 주변의 각 공화국들이 앞다투어 이탈을 선언하고 나선 배경에는 이러한 뿌리 깊은 피해의식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