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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영미소설
· ISBN : 9788959137596
· 쪽수 : 607쪽
· 출판일 : 2013-11-25
책 소개
목차
1부
2부
3부
작가의 말
옮긴이의 말
리뷰
책속에서
리(Lee)는 헨들리가 폭탄을 받고 나서야 비로소 그를 얼마나 싫어했는지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날것의, 한 번도 파헤쳐보지 않은 생각의 광맥이 폭발로, 순간 훤히 드러나버렸다. 물론 학계에서 점점 위축되어가는 노교수들이 젊은 동료들을 싫어하는 것은 흔한 일이다. 하지만 20년 넘게 정년 교수로 근무해온 리는 자기만은 동년배 교수들이 걸린 쇠퇴 과정을 겪지 않고 있다고 믿었다. 육십 대 후반, 백발이 성성한 나이에도 젊은 시절부터 간직해온 냉정한 왕자의 품위를 여전히 보일 수 있었다. 오래전에 지녔던 귀족적이고 오만한 태도가 갑자기 돌아왔고 언제나 높이 끌어올려 있는 헐렁하고 볼품없는 바지는 더 젊은 남자의 허리에도 맞을 법했다. 얼굴에 돋아난 검버섯은 쏟아지는 눈빛에 표백된 듯 눈에 띄지 않았다. 그 얼굴은 배우자나 자식, 친구들이 반할 만한 성격의 것이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학생들에게는 깊은 인상을 남기는 힘이 있었다. 그 또래들이 흔히 그러듯이 학생들은 정신적 스승이라는 개념을 고루하다 여겼다. 학생 시절의 리와는 달리, 학생들은 명예교수의 후광을 꺼렸다. 친구처럼 행동하는 선생들을 제일 좋아했다. 그래서 헨들리가 인기 있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학생들은 그 나이의 다른 교수들을 경멸하듯 리를 경멸하지는 않았다. 리에겐 그런 자신감이 있었다. 팔꿈치에 천을 덧댄 트위드 재킷을 입고 다니고, 아직도 학업 상담을 받으러 찾아오는 몇 안 되는 학생들을 위해 전업 주부 아내가 만들어주는 쿠키와 차를 가지고 오는 그런 늙은 교수들과는 달랐다.
하지만 가끔은 정반대로 느낄 때도 있었다. 학생들이 그에게 존경이나 애정 따위는 품고 있지 않다고. 그는 일주일에 두 번 있는 상담 시간 동안에는 나이 든 교수들이 그러하듯이 퍼니 앉아 있었다. 앞에는 빳빳한 황색 괘선지철을 펴놓고 손에는 검은 잉크가 든 몽블랑 만년필을 들었다. 언제나 검은 잉크로 작업하는 습관은 젊은 시절부터 그를 괴롭혔던 허세의 잔재였다. 오만의 상징이야, 첫 아내라면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겸양의 상징이지, 그는 이렇게 핑계를 댔을 것이고. 잉크 펜으로 쓰면 실수가 기록에 남았으니까. 하지만 몽블랑 만년필이 무엇을 상징하든, 의견을 적을 기회는 점점 적어졌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고 비생산적이기만 학생 상담 시간은 아닌 척하려 해도 공허한 벌칙이나 다름없었다. 매 오후마다 그는 조심스럽게 연구실 문을 30센티미터가량 열어두었다. 누구든 부담 없이 와서 인사하고 들어올 수 있을 만한 너비였다. 너무 열렬히 기다리는 티가 날 만큼 활짝 열어두지도 않았지만, 학생들을 위한 이 시간이 불만스럽다는 듯 너무 살짝만 열어두지도 않은 정도의 너비. 실제로 불만도 없었다. 그는 황색 괘선지철을 앞에 두고 몽블랑 만년필을 쥔 채 침착하게 앉아 겉보기에는 교수들이 할 만한 생각에 빠져 있는 듯 보였다. 복도에서 발소리가 들릴 때마다 그는 연극하듯 펜으로 종이 위에 끼적거리기 시작했다. 자의식으로 얼굴이 굳어지는 느낌이 들었지만, 문 쪽으로 눈길을 두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러나 그 발소리가 그를 찾아오는 일은 거의 없었다. 드물게 그의 방문 앞에 머문다 싶을 때 그는 언제나 똑같이 깊은 사색에서 마지못해 깨어나는 양 행동했다. “아,” 그는 이렇게 말하며 눈썹을 치켜 남이 감히 범접하기 어려운 전념 상태에서 살며시 빠져나왔다. 하지만 그가 불확실한 기대로 꿈지럭거릴 때, 발소리는 그의 연구실 앞을 지나쳐서─문은 너무 조금 열려 있어서 누군지는 알아볼 수 없다─옆방 헨들리의 연구실 앞에 멈추기 마련이었다. 벌써 활기차게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가방을 멘 학생들은 복도 바닥에 앉아 자기 순서를 기다렸다. 벽을 통해, 똑똑히 알아들을 순 없지만 명확히 들리는 헨들리의 장광설과 학생의 자신 없는 웃음소리가 전해졌고 그 위로 헨들리의 사무실에 있는 거대한 컴퓨터 두 대에서 삑삑 울리는 기계 알림 음과 원시적인 경적 소리가 문장부호처럼 찍혔다.
“전 이 일을 아주 오랫동안 해왔습니다.” 모리슨이 말을 다시 시작했다. “그러면서 항상 믿었어요. 또 그 믿음을 재확인할 수 있도록 했죠. 주지 않으면 얻는 게 없다는 걸요. 그래서 리에게 전 주었어요. 존경을 드렸죠. 전 리가 무척 지적인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인내심도 드렸어요. 리가 전적으로 솔직하게 말하지 않는 티가 역력했을 때도 유리하게 해석해드렸습니다. 대가로 받기도 받았죠. 버렸다고 말씀하신 후에야 그 편지를 받았으니까요. 하지만 대차대조가 맞지가 않아요. 제가 드린 만큼 받질 못한 겁니다. 리는 수학자시죠. 그러니까 제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아실 거예요. 그럼에도 전 다시 한 번 드리려고 합니다.”
여기서 모리슨은 자신의 관대함을 강조라도 하듯 약간 뜸을 들였다.
“리, 정말 소수의 사람만 특권으로서 알고 있는 사실을 말씀드리죠. 제 분야에서는, 연방정부 수준에서 법을 집행하는 분야에서는 일반적인 믿음이 있어요. 이 말뜻은 일반적으로 여러 사람이 이런 생각을 같이 나누지, 반대하는 사람은 몇 없다는 뜻입니다. 어떤 사람들, 어떤 인종적 특질이나 문화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은 폴리그래프 검사에 면역이 있다고 합니다. 폴리그래프 검사는 다른 경우에는 감탄스러울 정도로 정확해요. 하지만 이 집단의 사람들에게는 하등 쓸모가 없다 이겁니다. 결과가 음성으로 잘못 나온다는 거죠, 항상. 그 검사로도 기만의 증거를 탐지하지 못합니다. 아무도 정말로는 이유를 몰라요. 어쩌면 이 사람들이 우리의 주류인 유대기독교주의와 관련된 기본 윤리적 방향성을 가지고 있지 않아서인지도 모르죠. 어쩌면 이들이 진실에 대해서 상대적인 개념을 가져서일지도 모르죠. 아니면 그저 죄책감이 없는 사람들인지도 모릅니다. 그들이 누구냐? 말씀드린 대로 법 집행 관련자들 아니고서는 이 문제를 모릅니다. 우리가 떠들고 돌아다닐 만한 이야기는 아니거든요. 아시아인들은 폴리그래프 검사를 못합니다. 중국인, 일본인, 말레이시아 인, 인도네시아 인이죠. 대만 사람들도 아마 안 되겠죠. 한국인도 할 수 없습니다. 남쪽이든 북쪽이든. 파키스탄 사람, 인도인, 방글라데시 인도 안 되고, 어떤 사람은 서아시아라고 하고 대부분 사람들이 중동이라고 부르는 지역 사람들도 안 됩니다. 아랍 사람들은 다 안 된다고 합니다. 이건 큰 문제죠. 웃긴 이유로 하시드 유대인들도 안 된다고 합니다. 하지만 다시 한 번 말씀드리는데 아무도 이유는 모르는 거죠.”
“그거 참 허황한 얘기로군.” 리가 말을 끊었다. “게다가 비열하기까지 해. 그 생각 자체가.”
“이건 단순한 사실이 아니라 항상 경험적으로 확증된 사실입니다. 하지만 제가 이 말을 하는 이유는 리가 아시아인이라서 폴리그래프 검사에 면역이 있을 것이라 생각해서가 아닙니다. 그렇게 생각했다면 굳이 검사를 해서 제 시간과 리의 귀중한 시간을 낭비했겠습니까. 리는 이 나라에 40년 동안이나 살아왔고 완전히 동화되었죠. 그 외에도 죄책감에 낯설지 않은 양심을 가진 사람처럼 보입니다. 제가 이 얘기를 하는 이유는 분위기를 감지하실 수 있게 하기 위해서죠. 본부에서 리에 대해 생각하는 양식을 알려드리려고.”
“하지만 왜 그 사람들이 나에 대해서 생각을 한단 거요? 난 아무 나쁜 짓도 하지 않았는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