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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세계의 소설 > 동유럽소설
· ISBN : 9791159923746
· 쪽수 : 480쪽
· 출판일 : 2023-01-31
책 소개
목차
1부 말하다
서 있는 헤맴
속도에 관하여
잊고 싶다
얼마나 아름다운지
아무리 늦어도, 토리노에서는
세계는 계속된다
보편적 테세우스
모두 다 해서 100명의 사람
헤라클레이토스의 길 위가 아니라
2부 이야기하다
구룡주 교차로
언젠가 381고속도로에서
죄르지 페허의 헨리크 몰나르
은행가들
한 방울의 물
숲의 내리막길
청구서
저 가가린
장애물 이론
축복 없는 장소를 걸으며
이스탄불의 백조
3부 작별을 고하다
나는 여기에서 아무것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옮긴이의 말
리뷰
책속에서
아니, 역사는 끝나지 않았고, 그 무엇도 끝나지 않았다. 우리는 더 이상 무엇이 끝나버렸는지를 생각하면서 스스로 속일 수는 없게 되었다. 그저 어떻게든 유지해나가면서 계속할 뿐이다. 무언가는 계속되고, 무언가는 살아남는다. 우리는 여전히 예술 작품을 생산하지만, 이젠 그 방법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도 않고, 희망을 주는 작품이라고 할 수도 없다. 지금까지는 ‘인간의 조건’의 본질을 뜻했던 것들을 모두 전제로 삼아 아무 영문도 모르는 채로 엄격한 훈육에 성실하게 복종했지만, 사실상 낙담의 구렁텅이에서 침몰하며, 다시 한번 인간 존재의 상상 가능한 전체성이라는 흙탕물 속으로 가라앉는다. 우리는 이제 우리의 심판이 최후의 심판이거나 여기가 막다른 길이라고 선언함으로써, 거친 젊은이들 같은 실수도 저지르지 않는다. 이젠 그 무엇도 합리적이지 않으므로, 우리의 예술 작품이 서사나 시간을 포함한다고 주장할 수도 없고, 다른 사람들이 무언가 합리적이 되는 길을 찾아낼 수 있을 거라고 주장할 수도 없다. 우리는 우리의 환멸을 무시해봤자 쓸모없다는 것이 증명되었다고 선언하고, 좀 더 고상한 목표를 향해, 더 높은 힘을 향해 나아가지만, 우리의 시도는 수치스럽게도 계속 실패하고 만다. 헛되이 우리는 자연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자연은 이를 원치 않는다. 신성에 대해 이야기해도 소용없고, 신도 이를 원치 않는다. 어쨌든 아무리 원한다 해도, 우리는 우리 자신 외에는 아무것도 이야기하지 못한다. 오직 역사에 대해서만, 인간 조건에 대해서만, 본질상 오로지 기분 좋게 자극하는 적절한 불변의 특성에 대해서만 이야기할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게 아니라면, ‘다른 면으로는 신성했을’ 관점으로 보았을 때 우리의 본질은 실제로는 영원히, 그 무엇이 되었든 전혀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이제 우리는 항구를 표시한 부표들 사이로 미끄러져 들어오며 어쨌든 눈먼 채로 항해한다, 등대지기들이 잠이 들어 우리의 조종을 안내할 수가 없기에, 그리하여 우리는 이 더 위대한 전체가 법의 더 고귀한 의미를 반영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즉각 삼켜버리는 흙탕물 속에 닻을 내린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는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기다린다, 수천 가지 방향에서 동료 인간들이 우리에게로 천천히 다가오는 동안 우리는 그저 지켜보기만 한다. 아무런 메시지도 보내지 않고, 그저 지켜만 보며 공감으로 가득한 침묵을 유지한다.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이런 공감이 그 자체로 적절하다고, 그리고 또 다가오는이들에게도 적절할 것이라고 믿는다. 오늘은 그렇지 않다고 해도, 내일은 그러할 것이다…… 아니면 10년 후에라도…… 30년 후에라도.
아무리 늦어도, 토리노에서는.
바로 그때 갑작스레 끔찍한 공포가 서서히 내게로 기어들기 시작하니, 어디서 왔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것이 점점 커져간다는 것만은 느낄 수 있었고, 잠시 동안 이런 공포는 그 정체를 드러내지 않고 그저 존재하면서 커져가기만 했으며, 나는 완전히 무력하게 그저 앉아서 내 안에서 커져가는 공포만을 바라보며 기다렸으니, 아마도 잠시 후에는 이 공포의 본질을 이해할 수도 있겠지,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으니, 전혀 일어나지 않았으니, 이런 공포는 계속 커져가기만 하면서도 그 속내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드러내지 않았고, 드러내기를 거부했고, 그리하여 당연하게도 나는 다음에 무엇을 해야 할지 그로 인해 초조해지는데, 내가 자기 속내를 감춘 이런 공포를 안고 영원히 여기 계속 앉아 있을 수 있을지, 그런데도 나는 감각을 잃은 채로 창가 옆에 그저 앉아 있기만 했는데, 바깥에서는 이 쌍둥이 빌딩이 무너지고, 무너지고, 또 무너지는데도, 그때 갑작스럽게 내 귀는 삐걱대는 소음을 인식하는데, 저 멀리에서 둔중한 사슬이 철컥거리듯이, 또, 내 귀는 약간 득득 긁는 소리도 인식하는데, 단단히 묶어놓은 밧줄이 서서히 풀려나가듯이, 내가 들을 수 있는 것이라고는 이 삐걱대는 소리와 이 무섭게 긁어대는 소리뿐, 다시 한번 나는 내 낡은 언어를, 그리고 내가 굴러떨어진 완전한 침묵을 떠올리고, 거기 앉아서 바깥을 응시할 뿐, 완전한 어둠이 방 안을 채울 때, 오직 한 가지만이 완전히 확실해졌으니, 그것이 풀려나버렸다는 것, 그것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 그것이 벌써 여기에 있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