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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시 > 한국시
· ISBN : 9788960216051
· 쪽수 : 188쪽
· 출판일 : 2021-12-24
책 소개
목차
시인의 말
제4부 ‘그’ 언덕
문득 13
개마고원 14
개마고원의 꿈 18
보라색 찔레꽃 19
개마고원으로 날아가는 흰 뼈들 20
쿠쿠 뻐꾸기 까악까악 까마귀 뽀로롱 방울새 구구 비둘기 따륵따륵 딱따구리 22
당나귀가 경사지에서 23
‘그’ 언덕 아래 24
언덕 위에서 굴러 내리는 말들 26
고요 28
적막한 세계의 변방에 29
가을 햇살, 먼지들 사이로 30
갈라 터진 열망의 대지 위에 내리는 비 32
구르는 낙엽 하나 34
겨울 햇살 35
‘그’ 나무 36
내 새끼 랭보 38
블러드문 40
구름이 쑥 내려왔다 41
말들이 온다 42
어느 날 만났던 시 44
별을 가진 사람들 46
빛의 얼굴 48
세한도 49
제3부 싸우는 눈물, 들
잘 싸우는 눈물 53
바빌론을 떠나며 54
눈물 위에 촛불을 켰다 55
이리 떼가 물어뜯은 맑은 눈 56
박해당한 자의 시간 58
가을비 바람 속 60
숲, 길 62
쓸쓸함의 나비들 64
눈물 한 방울 66
나는 눈물 한 방울로 67
눈물이 걸어가다가 뒤돌아서서 68
사막을 걷는다 69
네 눈을 보았던 기억이 난다 70
바스락대는 눈물 72
다시 ‘다시 시작하는 나비들’ 74
랭보를 읽는다 76
아카시아 냄새 78
빛의 벌레들 80
해 뜰 무렵에 쇄빙선이 도착했다 82
후투티, 안녕, 하고 인사하다 88
살에 완벽하게 상감象嵌된 칼 90
티티새가 돌아왔다 92
해가海歌, 2021 94
쓸쓸함이 시래기라면 좋겠다 96
제2부 썩은 말들
나는 어린 왕들을 따라갔다 99
썩은 말들 100
안팎으로 부는 바람 102
통곡은 포효가 될 것이다 104
썩은 말들 108
대홍수를 기다리며 110
똥파리들의 착각 112
기도 113
그의 피가 하는 말 114
둥근 꽃들 116
나는 나무들 뒤에 있다 118
버드나무 천녀天女 유화柳花의 물길 120
안개가 내린 신탁 122
살아 내라! 123
진실은 가물가물 연약한 싹을 언 땅 위로 밀어 올린다 124
제1부 죽어 간 어린 왕들
큰 귀 속에 사는 아름다운 것들 127
꽃, 바다 128
죽은 어린 왕들 130
눈물이 창공과 함께 갔다 132
죽은 아이들 134
기억의 눈물방울 하나 136
어린 왕들에게 갔다 138
날개 139
마을은 아직 어둡지만 140
기억의 칩을 심어 둔 손 142
봄, 천사들 144
빛의 베일이 너울거렸다 145
물 밑의 길 146
물방울 한 개에 대하여 148
어린 왕들의 흰 뼈 150
오후, 긴 그림자, 문득 153
오월 햇살 아래 핏방울 154
진공 공간 156
하늘은 이미 답을 보냈다 157
챙챙 울린다, 햇빛! 158
푸른 나뭇잎을 기억하는 가시 돋친 눈물 160
어린 왕의 뒷모습 162
진실이 스스로 힘이 되는 시간 163
햇빛이 된 아이 164
해설
박성현 ‘시인’, 창조하는 자로서의 고귀한 이름 166
저자소개
책속에서
개마고원
원래 이 고원의 이름은 ‘고마고원’이다. 그것은 이 땅의 어미인 나, 고마였다가 사람이 된 나 고마부인(웅녀)의 이름을 따서 지어진 이름이다. 처음에는 고마높은평원이라고 불리다가, 한반도에 살고 있는 나의 후손들이 나의 존재를 까마득하게 잊어버리면서 이 이름의 기원도 잊힌 것이다. 이곳이 워낙 높아서 하늘 덮개 같으므로 사람들은 ‘고’와 발음이 비슷한 ‘개蓋’를 한자에서 가져오고 거기에 마馬 자를 붙여 부르게 되었다. 넓고 평평한 고원의 등이 하느님이 타시는 말의 등처럼 느껴졌기 때문인지 어떤지 잘 모르겠다. ‘고마’는 나중에 ‘엄마’라는 말로 변했다.
신단수 아래에서 환을 만나 깊은 동굴로 들어가 쑥과 마늘만 먹으면서 삼칠일을 버텼다. 함께 동굴에 들어갔던 호랑이는 열흘 만에 몸을 뒤틀면서 동굴을 뛰쳐나갔다. 나는 꾹꾹 참았다. 그 일은 어렵기만 하지는 않았다. 열이틀째까지는 정말 죽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 고비를 넘기자, 내 안에 있는 어떤 큰 창고의 문이 열렸다. 그 창고는 점점 커졌고, 그곳으로부터 강렬한 에너지가 쏟아져 나왔다. 나는 그 힘 위에 부드럽게 실리는 방법을 익혔다. 내 몸이 점차 변하는 것이 느껴졌다.
사람이 된 내 몸은 매끈하고 아름다웠다. 환은 잠깐 사람으로 변해서 나를 안아 주었다. 환은 곧 떠났다. 신들은 신들의 집에 살아야 하므로. 그리고 내 아들 단군이 태어났다. 빛나는 얼굴을 가진 아이였다. 이마에 아비인 환의 빛이 늘 머물러 있었다. 누가 보아도 신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뛰어난 아이였다.
단군은 잘 자랐다. 아이가 열다섯 살 난 해 어느 이른 봄날 새벽, 나는 단군을 데리고 내가 환을 만난 신단수가 서 있는 백두산 꼭대기로 올라갔다. 이야기가 시작된 곳을 아이에게 보여 주고 싶었다. 아버지 없이 자란 신의 아들에게 그의 본래의 힘과 위엄을 알게 해 주고 싶었다. 새벽바람은 아직 차가웠다. 산정으로부터 뻗어 내려간 산줄기들이 그림처럼 펼쳐져 있었다. 단군의 눈에 환희가 차올랐다. 아이는 신단수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 아래 서서 아버지를 불렀다. 그리고 마치 아이의 부름에 답하기라도 하듯이 환의 태양이 떠올랐다. 태양은 산줄기의 등성이를 찬란하게 비추었다. 단군의 눈에 감동의 눈물이 차올랐다. 그가 나를 향해 몸을 돌리고 나지막한 소리로 말했다. “어머니, 조선朝鮮이군요. 신선한 아침입니다.” 그가 그렇게 말하던 순간, 차고 맑게 울리던 공기를, 그 공기를 전하던 말의 힘을 나는 잊지 못했다.
단군은 나라를 세우고 “신선한 아침의 나라, 조선”이라고 이름 지었다. 단군은 조선을 잘 다스렸다. 단군은 1500년 동안 나라를 다스린 뒤, 아사달에 들어가 그곳의 신이 되었다. 그것을 보고 난 뒤, 나는 죽을 날이 다가온 것을 알게 되었다. 환은 나에게 긴 생명을 주었지만, 단군처럼 불멸의 생은 아니었다. 나는 죽기 전에 다시 백두산의 신단수로 올라갔다. 환을 만난 그곳에서 환에게 돌아가고 싶었다.
내 몸에서 생명이 빠져나가자, 바람줄기들이 내려와 내 몸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지금 개마고원이 있는 자리에 나를 데려다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내 몸은 그곳에서 점점 자라나기 시작했다. 등성이에 등성이가 쌓이고, 계곡에 계곡이 덧붙여졌다. 땅속 깊은 곳으로부터 용암이 터져 나와 기묘하고 아름다운 장관을 이루었다. 오랜 세월이 흘러 지나간 뒤, 그곳을 지나가던 어느 지혜로운 여행자 한 사람이 높은 고원으로 변한 나의 몸을 바라보며 낮은 소리로 말했다. “고마 엄마의 몸이군.” 그리고 그 이래로 사람들은 이 높은 평원을 ‘고마고원’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평원은 늘 고요하다. 나는 내 아이의 후손들의 아픔과 기쁨과 열망과 투쟁과 갈등과 화해를 지켜보았다. 나는 그 일에 끼어들지 못한다. 다만 고요히 지켜볼 뿐이다. 아침은 늘 신선하다. 수천 년 전부터 부는 바람은 늘 새로 부는 바람이다. 나는 내 아이들이 그 신선한 아침의 새로운 평화의 역사를 일구어 갈 것을 믿는다. 내 품 안에서 늘 지고 새로 피어나는 신비한 노란색 장미처럼. 고요한 꽃잎으로 우주 전체의 말을 할 줄 아는 그 놀라운 신의 혀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