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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시 > 한국시
· ISBN : 9788961043168
· 쪽수 : 240쪽
· 출판일 : 2022-07-08
책 소개
목차
1 [ 현대시작품상 추천 우수작 ]
최문자
수선화 감정 16
시계의 아침 19
호모 노마드 22
호모 노마드 25
재 28
크로노스에서 카이로스로, 이분합일의 메시아적 시간 의식 / 오형엽 30
황인숙
나도 모르는 사람 36
누수 타임 38
장터의 사랑 40
동자동, 2020 겨울 41
행복한 노인 44
즐거운 삶 쓰기 / 안지영 45
이현승
지상에서 영원으로 50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51
배음背音 52
청소하는 사람의 세 질문 54
전주 56
내가 모르는 내 얼굴이 짓는 표정 / 김언 58
김중일
가장 큰 직업으로서의 시인 64
좋은 날을 훔치다 66
만약 우리의 시 속에 아침이 오지 않는다면 68
햇살 71
자꾸 생각나는 괄호 73
주객 관계의 무화, 공백의 시간 구조, 현실과의 재접속 / 오형엽 76
기혁
눈사람 신파극 82
첫인상 85
물의 정물靜物 88
호명呼名 91
층계참에 선 유다 92
수위와 체위 / 안지영 94
유계영
정수 찾기 100
천 번 웃는 기쁨 102
경험으로서의 동물원 104
한밤의 창문 연주 106
만나요 109
아이러니스트의 송곳니 / 조강석 112
임승유
그의 태도와 눈빛 118
단추를 목까지 채우고서 120
종묘 122
마음 속 깊은 곳에서 123
한 사람이 두 사람을 끌어들여 이틀에 걸쳐 해낸 작업에 대한 보고서 124
질문하는 장소들의 시차視差 / 조강석 126
안태운
생물 종 다양성 낭독용 시 132
인간의 어떤 감정과 장면 137
경주 140
자전거를 타고 가는 사람을 타고 가는 144
눈석임물 146
끝없는 흐름과 멈춤의 양가감정 / 김언 147
2 [ 현대시작품상 수상자 특집 _ 김중일 ]
2022 제23회 현대시작품상 심사경위 152
2022 제23회 현대시작품상 심사평
유령의 고백, 공백의 시간, 주객 관계의 무화 / 오형엽 154
괄호 하나를 새로 열듯이, 다시 파고들듯이 / 김언 156
시 하나하나를 가누는 슬픔 / 조강석 160
시에 대한 시의 애도 / 안지영 162
수상작
가장 큰 직업으로서의 시인 166
좋은 날을 훔치다 168
만약 우리의 시 속에 아침이 오지 않는다면 170
자꾸 생각나는 괄호 173
햇살 176
눈물의 형태 178
금연에 대한 우리의 약속 180
너와 환절기와 나 183
내일 지구에 비가 오고 멸망하여도 한 그루의 186
오늘은 없는 색 188
수상소감
‘운’이 좋을 때까지 오래도록 / 김중일 191
자전 에세이
잠, 책, 체온 / 김중일 194
대담
시 속 ‘너’와 ‘나’라는 빈자리 / 김중일 신철규 203
시인론
이야기의 자연 / 신용목 220
작품론
몸 없는 살갗의 노동 / 이철주 229
저자소개
책속에서
가장 큰 직업으로서의 시인
― 아무도 접속하지 않은 채널의 접속을 기다리며 하는 상념
지금 만나러 가는 너의 직업은 시인이라고 한다.
시인도 직업일까, 한 번쯤은 물어보고 싶은 마음을 알고 있는 듯 너는 묻지도 않았는데 만날 때마다 대답한다.
시인은 가장 큰 직업이다.
마치 스스로 드는 미심쩍음에게 하는 대답인 것처럼.
나는 그것을 다짐이라고 생각해도 좋을까.
‘가장 큰 직업’이란 말이 좀 걸린다.
그 말은 어쩌면 직업 따위가 아니라는 뜻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이른 건 최근의 일이다.
‘가장 큰 직업’이란 당최……
무엇일까, 식상하게 삶이나 죽음 같은 것만 아니면 나는 상관없다.
열심히 노동하여 집을 지으면 폭풍이 와도 튼튼한 집이 남지만
열심히 밤새 지은 ‘시’라는 채널의 관건은
지극히 개인적으로, 얼마나 큰 슬픔을 나누고 허무는가에 달렸다.
아침 해와 함께 흔적 없이 증발하는
실체가 남지 않는 일을 직업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아무래도 ‘가장 큰 직업’은 직업이 아니라는 뜻이 분명하다.
무작위로 배정되는 한 편의 채널에 접속을 기다리며 들었던 상념들을 서로 나누며
빨래 개기를 마친 너는 노동의 대가로 배달 음식을 시킨다.
휴대폰을 집어 들면서 함께 있는 공간을 둘러보며 한마디 덧붙인다.
이런 수십 개의 채널을 모아놓은 한 권의 시집은 말이야
다림질까지 한 듯 기막히게 반듯이 개어놓은 시인의 속옷 같단 말이야.
세상에 존재하는 표백제로는 아무리 빨아도 결코 다 빠지지 않는 슬픔의 때가 미량이나마 껴 있어서, 결국 죽을 때까지 제대로 입어보지도 못하고 계속 다시 빨아야 하는.
빨다가 갑자기 눈물이 툭 터질 정도로 허무하기가 그 어떤 시적 수사로도 비유할 수 없는.
만약 우리의 시 속에 아침이 오지 않는다면
― ‘시’라는 침실
내 손가락을 만지작거린다. 팔베개를 한 팔이 저려온다. 감각이 사라진다. 네가 눈 감고 내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는 걸 하릴없이 바라본다. 마치 전생처럼 썰물처럼 내 손가락의 감각이 사라진다. 그리고 깜박깜박 잠이 밀려온다, 미래처럼 밀물처럼. 우리는 함께 잠긴다.
책장을 넘기듯 등이 찰나 꺼졌다 켜진다.
가수면 상태에서 너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온다. 어느새 깼는지 아니면 잠들지 않았는지, 내게 하는 말인지 혼잣말인지. 홑이불 같은 너의 목소리를 끌어 덮는다.
전 세계 해변의 면적은 어느 정도일까?
최소한 그 면적의 합은 서울보다 클 거야.
서울이 다 뭐야, 최소한 우리나라보다는 클 거야.
우리나라가 뭐야, 웬만큼 큰 나라보다는 클 거야.
적어도 우리가 만나고 있는 이 ‘시 세계’에서만큼은 그 모든 나라를 다 합한 것보다 클 거야.
드넓은 해변의 모래.
지난여름 내가 한쪽 발로 절뚝이며 모래 위에 쓴 너의 이름.
해변의 모래는 죽은 이들이 미처 못 한 말들이 해와 달빛에 그을려 부스러진 잔해들이야.
귓가에 속삭이던 네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 라텍스 침대 위를 눈을 감고 걷는다.
한껏 달아오른 해변의 모래에 네 발목까지 다리가 푹푹 빠진다.
죽은 이들의 화장된 말들 속에 발이 푹푹 빠진다.
네 콧등에 금세 땀이 송골송골 맺힌다.
무슨 소리가 좀 들려?
내가 걱정스레 묻는다.
한없이 밤이 이어지고 아침이 오지 않는다면,
세상 약속의 절반 이상은 사라질 텐데.
지키지 않아도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을 텐데.
내일 또 보자,라는 말을
못 지킬 약속으로 남기는 일은 다시 없을 텐데.
밤의 벌어진 검은 입
밤이 창문들을 벌리고 도시가 떠나가라 울기 시작하는 시간.
갓난아기처럼 밤이 울면서 기어 오고, 창문마다 둥근달이 우유병처럼 꽂힌다.
되레 밤을 꿀꺽꿀꺽 삼키며 세상에 흘러넘치는 흰 구름들.
책장을 덮듯 밤이 하얗게 잠든다.
밤에 링거액처럼 눈물들이 듣기 시작한다.
귓가에 속삭이던 네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 창문을 연다.
커튼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썰물처럼 빠져나간다.
너는 내일 아침에 또 보자는 약속도 없이 창문을 통해 시 밖으로 빠져나간다.
너는
시 속으로 들어올 때와 나갈 때가 다른 사람 같다.
시 밖에서 우리는 생면부지다.
자꾸 생각나는 괄호
*
거울을 봐, 눈, 눈동자, 눈썹, 코, 콧구멍, 콧방울, 입, 입술, 혀, 귀, 귓구멍, 귓바퀴
얼굴이라는 괄호 속의 괄호들.
그 괄호들 속의 괄호들이 겹겹이 가득해.
울고 웃어봐, 이목구비에 매달린 주름까지도 다 괄호투성이야.
괄호의 또 다른 표기는 물음표가 아닐까,
너는 달력 속의 숫자에 괄호를 치며 말한다.
너를 두고 떠난 그의 기일이다.
네가 친 괄호 속의 까만 숫자가 흡사 물음표같이 생겼다.
빈틈없는 동그라미로 날짜를 가두면 그가 제 기일로 못 찾아올 것 같아.
이렇게 괄호를 치면 위든 아래든
하늘에서든 땅 밑에서든
살아 있는 자들이 그어놓은 선을 넘지 않아도 쉽게 들어올 수 있잖아.
그리고 무사히 나갈 수도 있을 것 같아.
**
지구라는 괄호 속의 무수한 괄호.
지금 네가 들고 있는 시집을 포함해
지구 속의 모든 유기물과 무기물을 그려보면 예외 없이 [대{중(소)}]괄호로 조합된 것을 알 수 있다.
먼 산과 바다, 바람과 파도, 나뭇잎과 물고기, 돌멩이들과
어쩌다가 지구라는 괄호 속에 갇힌 해와 달까지.
하다못해 우리 집 창문까지도.
괄호들 속은 침묵과 밤이 가득하다.
의문과도 같은 온갖 생각이 뭉게구름처럼 생겼다가 이내 텅 빈다.
내 옆에 채워 넣어야 할 괄호처럼 생겼다가
괄호만 벗어두고 사라진 사람에 대해.
사람의 몸은 괄호들의 총합이다,로 시작하는 길고 긴 시험 문항을 받아 들고
소괄호 같은 너의 두 눈은 금세 당혹감으로 차오른다.
그 괄호 속은 못 전한 무언의 말들로 들끓다가
거짓말처럼 지워지길 반복한다.
거스러미가 잔뜩 돋아난 너의 거친 손톱은 네 몸 가장 끝의 괄호다.
온몸의 마디마다 괄호로 막힌 너로부터
가장 멀리까지 용케 흘러나온 생각들을 배수진 치며 틀어막고 있다.
손톱은 평생 매 순간 끊임없이 밀려 나오는 온갖 생각을 가두는 작은 댐이다.
생각들이 자란다, 너는 습관처럼 손톱을 바짝 깎는다.
결국 잉크처럼 한 방울씩 새어 나오는 생각들로, 너는 날짜에 괄호를 친다.
‘죽음이란, 죽은 사람들에 대한 생각이 혈액처럼 다 빠져나온 것이 아닐까?’
죽은 사람을 생각하며 날짜에 표시를 할 때마다
지구라는 괄호는 늘 텅텅 비어 보이는데
(이미 잊힌 슬픈 기억 한 토막), 그 괄호 밖으로 하나 빠져나간 것 없이 고여 있다.
너는 왼쪽으로 한 번, 오른쪽으로 한 번 괄호 두 개를 바짝 붙여
달력에 동그라미를 친다.
동그라미 속에 내 생일이, 어디로 도망도 못 가게 꽁꽁 갇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