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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종교/역학 > 기독교(개신교) > 기독교(개신교) 목회/신학 > 신학일반
· ISBN : 9788964475126
· 쪽수 : 472쪽
· 출판일 : 2019-07-09
책 소개
목차
머리말
1부 _ 평화의 다리를 놓으며 감폭력(減暴力)의 정치와 평화의 신학 ╻ 이찬수
안중근의 동양평화론 재평가 ╻ 박종현
심리적 평화의 기제에 관하여 ― 바울, 아우구스티누스, 루터, 파스칼, 프로이트, 라깡을 중심으로 ╻ 강응섭
이타주의에 대한 신학적 연구 : 포스트휴먼 이타성 담론과 평화 담론의 대화 ╻ 전철
평화, 그 불확실성을 향한 용기 : 화이트헤드와 헨리 나우웬의 평화 개념에 대한 신학적 고찰 ╻ 박일준
2부 _ 종교문화와 평화 성서의 평화, 그런 평화는 없다 ╻ 박태식
개신교 배타주의와 종교적 평화담론 ― ‘상호존재신론’을 중심으로 ╻ 김종만
가톨릭은 ‘정당한 전쟁’ 교리를 폐기할 수 있을까? ╻ 박문수
가톨릭교회 평화의 이름 ―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기점으로 한 용어와 의미의 발전 ╻ 김혜경
한국적 다문화주의와 종교평화교육 ╻ 손원영
로마 콘스탄티누스 황제 전 ․ 후 시대에 기독교의 유대교 박해 ― 평화로 가기 위한 또 하나의 걸림돌 ╻ 김은규
3부 _ 대중문화와 평화 평화운동의 재현: 영화 <1987>의 기독교 이미지 ╻ 이민형
“Love and Peace or Else” : 록밴드 U2의 음악과 활동 속의 평화 이야기 ╻ 윤영훈
예수의 광야 생활과 피조물의 평화 ― 알레산드로 본비치노의 마가복음서 해석과 관련하여 ╻ 이상목
사진, 비폭력 그리고 시민저항 ╻ 김상덕
4부 _ 시민운동과 평화 마틴 루터 킹 사상에 나타난 정의와 평화의 관계 ╻ 이병성
세월호 안전담론 투쟁과 주체의 평화를 향한 연대 욕망 ╻ 고성휘
함석헌의 평화론과 촛불혁명 ╻전철후
지은이 알림
책속에서
평화의 범주는 넓다. 개인의 심리적 편안함에서 우주적 조화까지 이어질 뿐만 아니라, 특히 분단으로 인한 심각한 갈등을 넘어 통일과 그 이후 사회적 통합까지 이루어내야 하는 한반도의 경우 평화는 복잡하게 꼬인 정치 및 사회적 현실까지 반영해내야 하는 복잡하고 어려운 과제이다. 그러면서 필연적인 과제이기도 하다. 이 모든 차원을 관통하는 한 문장으로 평화를 규정하라면, “평화는 폭력을 줄이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신학자라면 한반도는 물론 전 세계에서 여러 가지 모습으로 형성 및 전개되고 있는 폭력을 지속적으로 줄여 궁극적으로는 일체의 폭력 없는 세상을 만들어가는 과정에 기여해야 할 책무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이번 『평화의 신학』의 필자들은 글을 쓰며 그런 책무의 일부라도 감당할 수 있어서 기뻤다. 아울러 ‘신학으로서의 평화학’ 혹은 ‘평화학으로서의 신학’의 가능성도 상상할 수 있었다. _ <머리말> 중에서
‘평화’라는 단수형 이상은 자기 완결적이지 않다. 진행형이다. 상호 이해를 통한 갈등의 지양이고, 그를 통한 다양성의 조화이며, 너와 나 사이의 차이가 상생적 조화로 승화되는 과정이다. 평화에 한 이해와 인식, 실천 방법 등이 달라서 서로 부딪히더라도, 공감의 지점을 향해 다시 화하고 합의하고 수용해 나가야 할 도리밖에 없다. 때로는 ‘횃불’이 필요하더라도 가능한 ‘촛불’을 들고서 ‘덜’ 무력적으로 폭력을 비판하고 화의 자리를 만들어야 한다. 화는 때로 논쟁으로 비화되기도 하지만, 한 가지 평화론 혹은 방법론만 고집하는 데서 오는 폭력을 예방하고 이상적 평화를 향한 공공역을 활성화시키는 데 기여할 가능성이 훨씬 크다. “평화를 이루는 이가 하느님의 자녀로 불리리라”(마 5:9)는 예수의 선언은 오늘날 이런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이렇게 보면 평화 연구와 실천은 지상에서 하느님 나라를 이루려는 신학 및 신학자의 사명과도 통한다. 이 글의 주제로 말하면, 그것이 감폭력적 평화구축의 근간인 것이다.
_이찬수(서울학교 통일평화연구원)<감폭력(減暴力)의 정치와 평화의 신학> 중에서
예수가 사용했던 ‘평화’는 인사말로 우리 인사말의 ‘안녕하세요’ 쯤 될 것이다. 사실 인사말이란 그저 인사말에 머무르며 유대세계나 헬라세계나 차이가 있을 리 없다. 그래서 누군가 단어 자체에 깊은 의미가 있다고 떠벌리면 떠벌릴수록 싱겁게 들릴 뿐이다. 요즘 들어 내로라하는 평화 분석가들이 많아져서 하는 말이다. 오늘날에 평화라 할 때는 항구적 전쟁중지 상태를 넘어 전쟁의 위협마저 완전히 사라진 상태로서의 평화를 뜻한다. 글자 그로 요원한 이야기인 게 인류 역사상 언제 그랬던 적이 있었는가 싶어서이다. 그리고 앞서 보았듯 교회 역시 평화와 관련해 엉뚱한 야심을 품어왔다. 수도자들이 외적 평화가 아니라 내적 평화를 찾는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정치적 평화와 종교적 평화가 바라보는 곳은 확실히 다르다. 예수가 알려준 평화는 ‘이정도면 되겠지!’라는 식의 자기 합리화를 거부한다. 간단히 말해 하느님이 허락하기 전까지 진정한 평화란 없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는 예수의 말씀은 마치 두고두고 되씹어 마땅한 선불교의 화두(話頭)처럼 다가온다.
_박태식 (성공회학교)<성서의 평화, 그런 평화는 없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