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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성곽 육백년

서울성곽 육백년

(역사와 전설이 살아 숨쉬는 한양도성 이야기)

유근표 (지은이)
  |  
기파랑(기파랑에크리)
2017-11-10
  |  
26,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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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성곽 육백년

책 정보

· 제목 : 서울성곽 육백년 (역사와 전설이 살아 숨쉬는 한양도성 이야기)
· 분류 : 국내도서 > 역사 > 문화/역사기행 > 한국 문화/역사기행
· ISBN : 9788965236641
· 쪽수 : 448쪽

책 소개

역사와 전설이 살아 숨 쉬는 한양도성 이야기. 성곽의 종류나 축조 기술을 알리기보다는 성곽이 지키고자 했던 인물과 역사에 집중했다. 정사와 야사, 그에 얽힌 각종 전설까지 총망라하고 알기 쉽게 정리했다.

목차

조선의 창업과 한양천도
98일 만에 완성한 도성의 창축
왕자의 난과 개성 환도
한번 도망치면 곤장 백대, 두 번 도망치면 사형
38일 공사 기간에 사망자만 872명
6년에 걸쳐 이루어진 숙종의 개축공사
순성의 첫걸음은 숭례문에서부터
숭례문의 현판은 누가 썼을까
인정에 닫고 파루에 열었던 숭례문
서울성곽을 최초로 파괴한 자는 일본의 황태자였다
숭례문 화재는 이미 예고돼 있었다
총체적으로 부실했던 숭례문 복원
칠패길과 남대문소학교
서소문 앞 네거리는 사형장이었다.
배재학당과 아펜젤러
서울성곽터를 깔고 앉은 러시아 대사관
성곽유구와 치외법권
국내 최초의 감리교회당 정동제일교회
을사늑약의 현장 중명전
어전회의까지 주재한 이등박문
매국노 이완용은 얼마를 받고 나라를 팔았나
손탁호텔은 서울 최초의 서구식 호텔
이화학당 최초의 여학생은 단 한 명이었다
유관순 우물
유관순은 타살 당했다
기적처럼 살아남은 ‘서대문 성벽의 옛터’
사연 많은 돈의문
계유정난과 을미사변은 돈의문을 통해 일어났다
나는 새도 떨구었던 서대문 경무대
권불십년이요, 화무십일홍이라
경교장은 김구 피살의 현장
금광의 대명사 최창학의 일생
명치대학을 중퇴한 안두희
역사의 심판에는 시효가 없다
서전문터와 서울기상관측소
달 없는 밤에도 밝은 빛을 발했던 월암
비운의 음악가 홍난파
베델의 옛 집
나는 비록 죽더라도 신보는 영생케 하여 한국민족을 구하라
행촌동의 유래가 된 은행나무
큰 그릇은 늦게 이루어지는가
10대 1의 싸움 행주대첩
딜쿠샤
개목장터에 숨어있던 봉산 각자
선바위와 국사당
곡장과 이괄의 난
단경왕후의 한이 서린 치마바위
일제에 의해 더럽혀지는 치마바위
내사산 중 으뜸의 경치를 지닌 인왕산
시멘트보다 단단한 강회
윤동주 시인의 언덕
생체실험으로 희생당한 윤동주
고갯마루에 세워진 창의문
1.21사태의 현장 자하문고개
“내레 청와대를 까부수고, 박정희 모가지를 따러 왔수다”
‘천계단길’의 종착지 백악마루
1.21사태 소나무와 청운대
곡장은 북악 3대 전망대
지은지 겨우 17년 만에 폐쇄되는 북문
북악산이 개방된 사연
말바위
와룡공원과 단풍터널
과학고교는 송시열의 집터였다
경신고교 운동장을 가로 지른 서울성곽
여진족 사신들이 드나들던 혜화문
협문 안에 가둬 둔 소화기
가톨릭 대학교 교정에도 각자가 있다
장면 총리가 피신했던 갈멜수녀원
충청도 백성들이 쌓은 낙산 성곽
낙산 최고의 전망을 자랑하는 낙산정
홍덕이 밭의 유래
동대문 성곽공원의 변천사
좌룡정은 낙산의 활터
쫓겨난 각자 성석
8대문 중 유일하게 옹성을 갖춘 흥인지문
흥인지문의 옹성은 언제 개축했나
흥인문은 왜 흥인지문으로 바뀌었나
왜장 고니시 조차 감탄했던 동대문
도성 철거에는 전차 개설도 한 몫 했다
청계천과 오간수문(五間水門)
오간수문으로 달아난 임꺽정
주인은 문간방, 나그네는 안방
이간수문과 치성
임오군란의 현장 동대문운동장 터
경성운동장 최고의 스타였던 이영민
경평축구
서울운동장은 운동장의 대명사였다.
등대 성벽
인조는 광희문을 통해서 피난했다
숲속에 자리 잡은 신라호텔
신라호텔 바깥벽은 서울성곽의 표본
장충단의 의미는 국립현충원
이등박문의 이름을 딴 박문사
내 손으로 헐어낸 자유센터의 성곽
문화유적 파괴는 전 국민이 공범이다
4대문 5소문
도로변의 담장으로 쌓여진 성곽 돌
육영수 피살의 현장 국립극장
성곽을 보려면 가시밭길도 걸어야
서울성곽을 깔고 앉은 미군송신소
팔각정의 원 주인은 국사당이다
남산은 봉수의 최종 집합지였다
조선신궁 터
안중근 의사 기념관
안의사는 일인들이 더 숭배했다
세계 최고의 높이를 자랑했던 이승만 동상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표상 이회영 일가
독립군 사관학교
이회영의 최후
6형제 중 혼자 살아남은 이시영
황국신민 서사탑
일제의 충견이 된 이각종과 김대우
중국과 프랑스는 부역자를 이렇게 응징했다
강희 각자 성돌을 지나면 숭례문
탕춘대성
연산군의 놀이터였던 탕춘대
탕춘대성 가는 길
탕춘대성 길목에 자리한 이광수 가옥
변절의 대가(代價), 그리고 납북
향로봉 아래서 꼬리를 감추는 탕춘대 성곽

부록

저자소개

유근표 (지은이)    정보 더보기
서울성곽이 일제강점기에 훼철되어 수풀 속에 방치되어있는 현실에 충격을 받고 2000년 초부터 6년에 걸쳐 답사한 끝에 ‘서울성곽 탐방안내도’를 완성, 2006년 2월 언론에 발표하여 국민들에게 서울성곽을 알리는 데 앞장섰다. 그 후 문화재 관련 단체를 비롯하여 곳곳에서 서울성곽 안내와 독립운동사를 중심으로 역사를 강의했다. 현재는 독립운동사 연구와 역사 저술가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는 『인조 1636』, 『서울성곽 육백년』, 『성곽답사와 국토기행』, 『이야기 수동사』, 『이강산 이조국』 등이 있다. 이 밖에 논저로는 「독립군 최고의 무장 홍범도」, 「의사 강우규」, 「임시정부와 김구」, 「대한광복회 총사령 박상진」,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 「김원봉과 의열단」, 「석주 이상룡」, 「백범일지의 허와 실」, 「항일의 성지 안동」, 「조선왕조의 왕위에 오르지 못한 세자들」, 「조선의 3대 혼군」, 「고려와 조선왕들의 수명」, 「소현세자의 비극」, 「남한산성과 병자호란」, 「북한산성」, 「서울성곽의 어제와 오늘」, 「고개 이야기」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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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조선시대에는 도성의 모든 문을 이경(二更 : 밤 10시)이 되면 28번의 종을 쳐서 성문을 닫고 통행금지를 알렸다. 이경에 치는 종을 인정(人定)이라 했으며, 이때에는 하늘의 이십팔수(二十八宿)를 상징하여 28번의 종을 울렸다. 또한 오경(五更 : 새벽 4시)이 되면 파루를 쳐서 열었는데, 이때에는 불가에서 말하는 삼십삼천(三十三天)을 나타내고자 서른 세 번의 종을 울렸다. 그리고 만약 긴급한 상황이 발생했을 경우에는 밤중이라도 열게 하였다.
이에 대비하여 세종 6년(1424)부터 숭례문과 흥인문을 지키는 수문장에게는 부절(符節) 두쪽을 만들어 오른쪽 것을 수문장에게 주고, 왼쪽 것은 입직승지가 보관했다가 왕명에 의하여 급히 문을 열어야 할 일이 발생하면 승지가 보관하고 있던 부절을 받아 든 병조의 비변랑이 수문장의 부절과 대조한 후에 문을 열도록 했다.
부절이란 돌이나 대나무 또는 옥 등을 두 개로 쪼개어 만든 일종의 신표(信標)를 말하는 것으로서, 양쪽의 부절을 맞춰보면 마치 주몽 부자의 부러진 칼 도막 들어맞듯 완벽하게 맞았으므로 무엇이 잘 맞으면 ‘부절 맞춘 듯 하다’라는 속담까지 생겨났다.
이와 같이 열고 닫음이 엄격했던 도성문을 폭군의 대명사로 불리는 연산군 시절에는 자그마치 보름이 넘게 열지 않고 닫아 둔 적이 있었다. 이유는 누군가 연산군의 폭정을 비난하는 투서가 발견되었기 때문인데, 이로 인해 연산군 10년(1504) 7월 19일부터 다음 달인 8월 6일까지 도성의 모든 문이 닫혀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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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위풍이 당당했던 숭례문은 임진왜란 7년의 참화 속에서도 털끝 하나 다치지 않았고, 그 후에 벌어진 병자호란 때에도 끄떡없이 살아남았다. 그렇던 이 문이 처음으로 상처를 입은 것은 고종이 헤이그 밀사 사건의 책임을 지고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나던 1907년의 일이다.
그 해 10월 일본의 황태자 요시히토 친왕(嘉仁親王 : 후에 대정 천왕)이 서울을 방문하게 되었는데, 그들은 당시 우리 조정에다 ‘대일본 제국의 황태자가 조선처럼 작은 나라의 홍예밑으로 지나가는 것은 치욕이므로 성곽을 허물고 가겠다’는 황당한 요구를 해온다. 이에 뜻있는 인사들이 강하게 반발했으나, 일제는 친일파 이완용 등을 앞세워 기어코 숭례문 북쪽 성벽을 헐고서 지나갔으며, 이후로는 홍수에 둑 무너지듯 도성의 성벽은 걷잡을 새 없이 무너져 나갔다. 그러나 당시의 상황으로 볼 때 이곳 숭례문이 헐리지 않고 보존 되었다는 것 자체가 기적중의 기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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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고교 후문에서 길을 건너서면 왼쪽으로는 돈가스 음식점이 늘어서 있고, 오른쪽에는 경신고교 담장이 버티고 섰으니, 바로 이 담장이 서울성곽이다. 세종대에 축조 된 성곽 돌은 의외로 커서 하품이 나올 만한데, 앞에서 말한 대로 맹꽁이배를 하고 있어서 보는 이의 마음이 그다지 편치가 않다.
승용차 한 대만 만나도 비켜설 자리가 없을 만치 비좁은 골목길을 따라가면 세종대의 성곽은 숙종 대의 성곽으로 바뀐다. 이 구간의 성곽 축조는 강원도 담당이었던지라 성벽에는 ‘江陵(강릉)’이라 새겨진 각자가 존재하고 있으나, 막상 발견하기는 쉽지 않다. 초입에서는 제법 웅장하게까지 느껴지던 성곽은 차차 낮아져서 나중에는 아래쪽으로 한 두 개 층만 남겨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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