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천 (옮긴이)
정보 더보기
동국대학교 대학원 사학과에서 석사 및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대진대학교 역사문화콘텐츠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한대의 종묘제·상복례를 중심으로 예학을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전한후기 예제담론』, 『중국 고대 상복의 제도와 이념』(공저) 등이 있으며, 역서로 『중국 전근대 사상의 굴절과 전개』, 『중국의 공과 사』, 『후한 유교 국가의 성립』, 『중국 사상문화 사전』, 『역주 주례주소 (1, 2, 3, 4)』(공역), 『의례 역주(1-8)』(공역), 『구당서 예악지(3)』, 『신당서 예의지(3)』 등이 있다. 「전한 원제기 위현성의 종묘제론」, 「『석거예론』의 분석과 전한시대 예치이념」, 「『순자』· 『예기』 「왕제」의 예치구상」, 「북위 효문제 ‘삼년상’의 실체와 그 성격」, 「양진시대 ‘위인후자’의 복제 담론」, 「기장 ‘수복’의 규정과 예학적 논쟁」 등의 논문이 있다.
펼치기
정현 (지은이)
정보 더보기
127년(후한 순제順帝 2)에 태어나 200년(후한 헌제獻帝 12)에 별세하였다. 자는 강성康成이고 북해 고밀현高密縣(현재 산동성 고밀高密시) 출신이다. 『후한서』 「정현전」에 따르면, 젊어서 향색부鄕嗇夫의 일을 하다가 태학에 들어가 제오원선第五元先에게 『경씨역京氏易』, 『공양춘추公羊春秋』, 『삼통력三統歷』, 『구장산술九章算術』을 공부하였고, 장공조張恭祖에게 『고문상서古文尙書』, 『주례周禮』,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을 배웠다.
정현이 산동 집으로 돌아갈 때 마융은 “나의 도가 동쪽으로 가는구나!”라고 탄식하였다고 한다. 귀향한 뒤에 소작을 하면서 제자들을 가르쳤는데 천 명이 넘었다. 당고黨錮의 화禍가 발생하자, 정현도 금고禁錮를 당하여 두문불출하고 저술에 몰두하였다.
정현은 고문경학을 위주로 금문경학의 설을 함께 채택하여 『주역』, 『모시毛詩』, 『의례』, 『주례』, 『예기』, 『논어』, 『효경』 등을 주석하였고, 「건상력乾象歷」, 「천문칠정론天文七政論」, 「상서대전尙書大傳」, 「상서중후尙書中侯」, 「노례체협의魯禮禘袷義」, 「육예론六藝論」, 「모시보毛詩譜」, 「박허신오경이의駁許慎五經異義」, 「답임효존주례난答臨孝存周禮難」 등을 지었다. 정현의 주석은 제도와 명물의 훈고가 간명하면서도 상세하고, 고문경학과 금문경학을 종합하여 한대 경학을 집대성하였다. 당 태종은 정현을 22명의 “선사先師”의 반열에 올리고 공자묘孔子廟에 배향하였다. 송대에 이르러 고밀백高密伯에 추봉追封되었다.
정현이 『주례』, 『의례』와 『예기』에 대하여 주석을 가하면서 “삼례三禮”라는 명칭이 생겼다. 오늘날 전하는 『의례』는 정현이 정한 본이다. 『예기』는 대성이 찬집한 이후 유향劉向(기원전77~기원전6)의 『별록別祿』본을 비롯하여 여러 본이 존재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정현은 노식盧植과 마융馬融의 본을 활용하여 여러 이본을 참고하면서 정본을 편성하였고, 정현본이 오늘날까지 기준본이 되었다.
정현의 저작은 『모시전毛詩箋』, 『주례주周禮注』, 『의례주儀禮注』, 『예기주禮記注』 등만 전하고 나머지는 산일되었다. 마국한馬國翰(1794~1857)의 『옥함산방집일서玉函山房輯逸書』에 일부가 전하고, 돈황燉煌에서 『논어주』 사본 일부가 발굴되어 복원되었다.
펼치기
진호 (엮은이)
정보 더보기
자는 가대可大이고 호는 운주雲住, 북산수北山叟이다. 귀경歸經선생이라고도 불리었다. 진호가 활동한 시기는 남송 말기와 원 초기의 변동기였다. 진호는 평생 은거하여 강학에 종사하였다. 도창都昌(현 강서성 도창현)에 운주雲住서원을 세워 가르쳤고, 만년에는 2년 동안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에서 강학을 주관하였다. 『강서통지江西通志』의 기록과 진호의 「예기집설서禮記集說序」(1322)에 따르면, 진호의 부친 진대유陳大猷는 황간黃榦의 제자인 요로饒魯에게 14년을 배웠고, 『예기』로 향시에 3번이나 합격한 뒤 1259년 진사에 급제하였다. 그리고 종정랑從政郎, 황주군판관黃州軍判官을 지내고 『상서집전尙書集傳』을 저술하였다. 진호는 서문에서 진기유가 스승에게 『예기』에 대해 배운 것을 정리해 놓고 있었지만, 화재로 소실하여, 자신이 다시 『예기집설禮記集說』을 지었다고 밝혔다. 진호의 『예기집설』은 가학을 전승한 것임을 알 수 있다.
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