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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역사 > 한국근현대사 > 한국전쟁 이후~현재
· ISBN : 9791194442288
· 쪽수 : 512쪽
· 출판일 : 2025-06-27
책 소개
목차
이 책을 읽는 이들에게
프롤로그 혁명운동가에서 시민으로
1부 나의 대학
1977년 봄, 적막 | 학회, 또 다른 대학 | 농활이라는 이름의 통과제의 | 그해 가을 | 인식의 전환 | 문학도가 된다는 것
2부 안개의 숲, 무림
그 숲에 들어서기 전에 | 지상의 삶과 지하의 삶 | 박정희가 죽었다! | 서울의 봄 | 회군 | 그날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 ‘광주사태’ | 조용한 가을 | 반파쇼학우투쟁선언 | 남영동에서, 이근안이 있는 풍경 | 2년 7개월, 감옥에서 | 스무 통의 옥중서신
3부 짧은 미몽, 긴 후일담
1장 출세간, 문학이라는 외피
입사식의 절차 | 펀집자 되기 | 문학평론가 되기
2장 길이 시작되자 여행은 끝났다
그 어느 허탈했던 겨울날 아침 | ‘민중적 민족문학’이라는 미망 | 1991년
3장 1990년대, 내부망명자의 삶
자기 분열의 시작 | 대학원 시절 | 강 건너편의 세계
4장 환멸과 희망 사이
공론장으로의 복귀? | 『황해문화』와의 동행 | 대학교수라는 직업 | 디스토피아 스펙터클 앞에서 | 말년의 양식
에필로그 희극으로 반복되는 역사: 2024년 겨울의 계엄령
미주
저자소개
리뷰
책속에서
1980년 ‘무림사건’이 일어나고 세기를 건너 2020년 이 사건에 씌워진 모든 혐의가 무죄로 판명되었다. 그와 동시에 혁명가를 꿈꾸고 혁명적 실천을 했다고 생각했던 나도 결국은 내란을 일으킨 일부 정치군인들의 폭거를 고발하고 저항한 한 사람의 젊은 시민에 불과했음이 판명되었다. 달리 말하면, 나는 인생의 황혼녘이 되어서야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의 성원권을 얻은 늙은 시민인 것이다. 마지막 무죄 판결을 받아들였을 때, 나의 젊은 날의 생사를 건 저항이 사실은 민주시민의 당연한 권리와 의무를 이행한 것이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묘한 이중감정에 휩싸였었다.
1970년대 말의 대학은 죽어 있었다. (…) 자유가 없는데 대학이 살아 있을 수는 없었다. 정말로 하고 싶은 말은 전부 가슴 깊이 감추고 있는데, 하고 싶지 않은 말만으로 어떻게 대화가 구성되며 어떻게 진실이 교환될 수 있을까. 내가 그렇게 찾았던 ‘진리의 문’은 등록금을 내고 수강신청을 하고 시간표대로 드나들던 강의실에는 없었다. 그것은 오히려 학교 바깥 ‘옥호불상’(屋號不祥)의 중국집 골방과 대여섯 명만 들어차도 발 제대로 벋을 곳이 없었던 누군가의 퀴퀴한 자취방에서 더 가까이 있었다. 줄담배의 매연과 땀 냄새와 밖으로 새어나갈세라 언제나 반쯤 볼륨을 줄인 낮은 목소리들의 웅얼거림이 뒤섞인 학회 세미나는 그 척박했던 시절 그나마 진리라는 것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다.
이처럼 대학교 1~2학년 시절에 수행했던 사회과학과 철학 공부는 그 이후 내 평생의 세계 인식의 기초가 되었다. 구성주의적 입장에서 본다면 나는 이 공부들에서 얻은 인식으로 나를 둘러싼 세계를 ‘좌파적 관점’ 혹은 ‘진보적 관점’에서 구성했던 것이고, 그렇게 구성된 세계와 평생을 씨름해온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러한 인식과 그 인식을 토대로 살아온 삶은 일종의 허구였을까. ‘세계 그 자체’를 인식하는 것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불가지성이 곧 무의미와 무기력으로 환원될 수는 없다. 나는 이러한 공부들을 통해서 변화와 진보가 곧 지고선은 아닐지라도 끝없이 자기 존재의 위상과 의미를 탐색하고 ‘지금 이 상태’를 넘어서고자 하는 낭만적 충동이 없는 삶을 견디지 못하는 존재가 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