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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에세이 > 독서에세이
· ISBN : 9788965701323
· 쪽수 : 324쪽
· 출판일 : 2013-02-25
책 소개
목차
들어가는 말
PART 1 비주얼이 아닌 스토리
뭐라도 되겠죠 _ J.D. 샐린저, 《호밀밭의 파수꾼》
내 마음을 채운 것들 _ 김연수, 《청춘의 문장들》
나를 지키는 집, 나를 바꾸는 주문 _ 이만교, 《나를 바꾸는 글쓰기 공작소》
이야기는 힘이 세다 _ 일연, 《삼국유사》
러브스토리의 모든 것 _ 샬럿 브론테, 《제인 에어》
모든 것을 결정짓는 한 순간 _ 신경숙, 《외딴방》
조각난 삶을 이어 붙이는 유일한 접착제 _ 빅터 프랭클, 《죽음의 수용소에서》
바닥을 딛고 일어서기 _ 박완서, 《한 말씀만 하소서》
주인공 따윈 필요 없어! _ 한비야,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
PART 2 자존심이 아닌 자존감
사랑을 위한 첫 번째 미션 _ 라이너 마리아 릴케,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쓸모’로부터의 탈출 _ 김보일, 《나를 만나는 스무 살 철학》
알면 좀 덜 무섭다 _ 알랭 드 보통, 《불안》
친화력보다 고독력! _ 기타노 다케시, 《기타노 다케시의 생각노트》
고통 앞에 선 인간의 존엄 _ 소포클레스, 《오이디푸스 왕》
자기 객관화의 힘 _ 박찬욱, 《박찬욱의 몽타주》
내 마음의 주인으로 _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명상록》
그녀가 대단한 진짜 이유 _ 요네하라 마리, 《대단한 책》
가난한 백성에서 성찰하는 시민으로 _ 얼 쇼리스, 《희망의 인문학》
PART 3 야심이 아닌 진심
소우주 탐사하기 _ 김혜리, 《진심의 탐닉》
예찬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 _ 미셸 투르니에, 《예찬》
나를 완전하게 하는 사람 _ 다니엘 글라타우어, 《새벽 세시, 바람이 부나요?》
내가〈해품달〉에 공감하지 못했던 이유 _ 에리히 프롬, 《사랑의 기술》
마을의 좋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사람 _ 신영복, 《강의》
삶이란 누군가에게 정성을 쏟는 일 _ 공선옥, 《행복한 만찬》
나의 목소리에 응답해줄 사람 _ 안토니오 스카르메타, 《네루다의 우편배달부》
모국어에서 길어 올린 사랑의 지혜 _ 고종석, 《어루만지다》
잊을 수 없는 인격 _ 장 지오노, 《나무를 심은 사람》
PART 4 스펙이 아닌 통찰
더 깊게, 더 낮게, 더 천천히 _ 김훈, 《자전거 여행》
가짜가 가짜인 이유 _ 정민, 《비슷한 것은 가짜다》
중립을 중용이라 여기는 착각 _ 장정일, 《장정일의 공부》
편견의 울타리를 부숴버리고 _ 다니엘 에버렛, 《잠들면 안 돼, 거기 뱀이 있어》
잔혹한 진실 _ 최규석, 《지금은 없는 이야기》
남자 보는 눈 _ 시오노 나나미, 《남자들에게》
자유가 없는 행복 VS 불행할 수 있는 자유 _ 올더스 헉슬리, 《멋진 신세계》
잔인한 리얼리스트의 눈 _ 조지 오웰, 《1984년》
99개의 절망과 한 개의 희망 _ 주제 사라마구, 《눈먼 자들의 도시》
나오는 말
저자소개
리뷰
책속에서
중학교 2학년 때 교무실에서 무슨 심부름인가를 하고 있는데, 옆에 있던 수학 선생님이 나에게 별안간 이런 질문을 던졌다.
“넌 나중에 뭐가 되고 싶으냐?”
겉보기에는 그럴듯한 모범생이었을지 몰라도 사실 내면은 원대한 비전을 지닌 청소년과는 한참 거리가 멀었던 나에게 이런 질문은 정말이지 당혹스러운 것이었다. 당장 코앞으로 다가온 중간고사를 ‘방어’할 생각에 귀찮고 심란한 기분이었던 열다섯 살에게 ‘장래 희망’은 다음 생의 일처럼 아득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글쎄요, 잘 모르겠는데요……”라며 얼버무리자 선생님은 왜 그걸 모르냐며 다그쳤다. 무슨 대답이라도 해야 이 어색한 상황을 모면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고, 그때 내 입에서 얼떨결에 튀어나온 말은 바로 이거였다.
“뭐라도 되겠죠.”
나는 선생님한테 (혼났다기보다는) 와장창 깨졌다. 당시 교무실에 있던 모든 선생님들과 학생들이 쳐다볼 정도로 소리소리 질러가며 선생님은 ‘그따위 건방진 대답이 어디 있느냐’, ‘어디서 배워먹은 말버릇이냐’며 나를 쥐 잡듯 잡았다(얻어맞지 않은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중략) 나에게《호밀밭의 파수꾼》은 말하자면 ‘뭐라도 되겠죠’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난 이 작품을 열다섯 살에 처음 읽었고, 교사가 된 직후인 스물다섯 살에 두 번째로 읽었으며, 이 글을 쓰기 위해 서른일곱 살인 지금 세 번째로 읽었다. 10년 간격을 두고 띄엄띄엄 읽은 셈인데, 그럼에도 이 작품은 읽을 때마다 나를 ‘뭐라도 되겠죠’의 시기로 데려다준다.
홀든에게 서른다섯 살은 기성세대의 기점 같은 것이었나 보다. 사실상 지금 우리 사회에서도 서른다섯 살은 당연히 ‘어른의 삶’을 살아야 하는 나이로 간주된다. 하지만 나는 하필 서른다섯 살에 ‘뭐가 되고 싶다’는, 열 살 이후로 들지 않던 생각이 25년 만에 들어버렸다. 그건 바로 ‘글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열망이었다. 물론 그 전에도 글을 안 쓴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 전까지 내가 쓴 것은 ‘숙제로 제출’해야 하는 글이거나, 골방에서 나 혼자 보려고 쓰는 글이거나, 기껏해야 나와 친한 몇몇 사람들이 읽을 수 있는 글이었다.
내가 알지도 못하는 불특정 다수에게 내 이야기를 늘어놓는 건 내게 무척이나 남세스럽고 엄청난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제부터 용기를 내기로 했다. 비록 지질한 후회나 반성이 글의 대부분을 차지하더라도, 난 그것들이나마 다른 이들과 나누기로 결심했다.
- 1장 비주얼이 아닌 스토리
〈뭐라도 되겠죠 _ J.D. 샐린저, 《호밀밭의 파수꾼》〉 중에서
대학 시절, ‘국문과’에 다닌다고 하면 어떤 사람들은 ‘굶는 과’에 다녀서 어떡하냐면서 걱정을 해주거나 비아냥댔다. 그럴수록 나는 ‘굶지 않는 과’를 복수 전공이라도 해야 하나, 뭐 이런 기특한 생각을 하는 대신 국문과보다 한층 더 심란해(?) 보이는 철학과 강좌를 신청해서 들었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으나 그땐 철학이 그렇게 재밌을 수가 없었다. 특히 3학년 때 만난 실존주의 철학에 깊이 빠져서 전공 공부보다 더 열을 올렸던 기억이 난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한 줄의 명제가 당시 나에겐 카프카의 표현을 빌리자면 ‘내 안의 얼어붙은 바다를 부수는 도끼’같았던 것이다.
(중략) 사르트르의 말대로 인간은 어떤 정해진 쓸모의 존재가 아니라 가능성의 존재다. 반드시 ‘뭐가 되기 위해’ 태어난 존재가 아니라 수많은 선택 앞에서 충분히 번민하고 방황할 수 있는 존재다. 20대는 이 가능성으로 가득한, 어쩌면 이 가능성이 전부인 시기이기에 혼란스럽고 불안하다. 앞서 말한 대로 이 가능성은 선물이면서 형벌이다. 그렇지만 이는 청춘이 감내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가능성이 주는 불안과 혼란은 타인의 위로로 없어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성공’을 향해 전력으로 질주한다고 해결되지도 않는다. 자칫하면 나중에 더 큰 공허함과 무기력으로 힘들어질 수 있다.
그렇다면 어찌할 것인가. 이 책의 저자는 자신에 대한 진지한 응시와 성찰이 그 해답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철학은 거기에 이르는 하나의 아름다운 오솔길임을 보여준다.
지난해 책을 한 권 내면서 새삼 느낀 것은 책을 쓰는 일이 연애와 비슷하다는 점이었다. 책을 읽게 될 사람들을 조금이라도 사랑하지 않으면 글을 쓰기 힘들다는 점, 그리고 마지막 장까지 그들을 붙잡아두고 싶은 열망에 어쩔 수 없이 사로잡힌다는 점에서 말이다. 읽다 보면 특히나 그 사랑과 열망이 강하게 느껴지는 책들이 있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저자가 한때 자신의 제자들이기도 했을 20대를 얼마나 절절이 사랑하는지가 보였다.
이 책은 안타깝게도 내가 교사를 그만둔 뒤에 출간되었다. 교사였던 시절 나는 졸업을 앞둔 고등학교 3학년생들에게 이런저런 어쭙잖은 말을 들려주곤 했다. 그때 만약 이 책이 있었다면 난 그들에게 긴말하지 않고 이 책을 꼭 읽어보라고 권했을 것이다.
- 2장 자존심이 아닌 자존감
〈‘쓸모’로부터의 탈출 _ 김보일, 《나를 만나는 스무 살 철학》〉 중에서
이 땅의 많은 엄마들처럼 나의 엄마 역시 오랜 시간을 식구들 가운데 맨 먼저 일어나 아침밥을 하고 자식들 도시락을 쌌다. 지금이야 모든 학교에서 급식을 하지만 그때만 해도 학생들에게 도시락은 교과서보다도 중요한 것이었다. 내가 고등학교 3학년일 때 엄마는 동생들 것까지 합쳐서 다섯 개의 도시락을 매일 쌌다. 그것도 그 다섯 개를 모두 다른 버전으로! 자식 셋의 식성을 고려하고 점심과 저녁 반찬을 다르게 하는, 그런 엄청난 섬세함을 필요로 하는 중노동을 매일 했던 것이다. 비록 값비싼 재료로 만든 화려한 반찬은 아니었지만 도시락을 보면서 그것이 엄마에게 주어진 여건에서 나올 수 있는 최선의 결과물이라는 건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엄마는 매일 그렇게 최선을 다했다. 난 그것이 알량한 공부보다 훨씬 더 많은 극기와 인내를 필요로 하는 일임을 그땐 몰랐지만 지금은 안다.
엄마는 홈드라마에 나오는 엄마처럼 수시로 스킨십을 하거나 사랑한다는 말을 자주 하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지금껏 살면서 엄마가 날 깊이 사랑한다는 사실을 단 한 번도 의심해본 적이 없었던 이유는 엄마가 해준 음식 때문이었다. 전우익 선생이 그랬던가. 결국 삶이란 누군가에게 정성을 쏟는 일이라고. 그렇다면 누군가를 먹이기 위해 음식을 만드는 것이야말로 그 자체로 거룩한 삶이리라. 누군가에게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정성을 충분히 받은 사람은 그 정성의 힘으로 살 수 있는 것이다.
언젠가 누군가에게 모욕적인 말을 듣고 밤에 잠이 안 와 뒤척이고 있는데 밑도 끝도 없이 엄마의 도시락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러더니 신기하게도 분하고 미운 마음이 조금은 가라앉는 것 같았다. ‘내가 한 여인으로부터 어떤 정성과 사랑을 받은 몸인데 네까짓 게 나에 대해 함부로 떠든다고 하늘이 무너질 것 같으냐!’ 뭐 그런 심정이 되었던 것이다. 그 순간 그 사람이 나한테 쏟아낸 온갖 같잖은 말이 하찮게 느껴지면서 급기야는 그 사람이 불쌍해지기까지 했다(아마도 너는 네 엄마에 대해 나와 같은 감정을 못 느끼겠지). 비록 요즘 유행하는 말을 빌리자면 ‘정신 승리’ 수준의 자기 위안에 불과하더라도 그 순간엔 엄마의 도시락이 분명 구원이었던 셈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섬이 있을지라도 서로에게 정성을 쏟는 사람들 사이엔 밥이 있다. 이 밥이 있어 우리는 오늘도 살아간다.
- 3장 야심이 아닌 진심
〈삶이란 누군가에게 정성을 쏟는 일 _ 공선옥, 《행복한 만찬》〉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