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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
· ISBN : 9788965746171
· 쪽수 : 296쪽
· 출판일 : 2017-06-15
책 소개
목차
서(序) 그날
매운 사랑│어디에도 없는 아이│아프고 슬픈 민족│하늘 아래 가장 무거운 것│불령선인│어두운 밤의 들개처럼│나는 개새끼로소이다│서투른 고백│불온한 둥지│허무가 허무에게│다만 반역이라는 것│발밑의 균열│손끝이 스칠만한 거리│마지막 입맞춤│재판│은사, 그리고 음모│풀의 선택
결(結) 열아홉 번의 여름이 가고
후기
작가의 말
저자소개
리뷰
책속에서
1923년 9월 1일 오전 11시 58분.
도쿄와 요코하마를 중심으로 한 간토[關東] 지방에 최대 진도 7의 대지진이 일어났다.
… 살이 타는 냄새, 뼈가 녹는 냄새가 천지간에 진동했다. 삽시간에 새카맣게 그을어 바짝 오그라든 일상 앞에서 사람들은 공황 상태에 빠졌다. 모른 척 외면하던 죽음이 눈앞에 다가들자 그것이 애당초 삶과 다붙어 있었다는 사실 따윈 기억해낼 수 없었다.
… “조선인이다!”
단 한마디 외침에 이리 떼처럼 수백 명이 동서남북에서 몰려들었다. 수십 명이 조선인 한 명에게 달려들어 칼로 찌르고 곤봉으로 때리고 발로 차서 쓰러뜨렸다. 잔혹은 더욱 극심한 잔혹을 광기는 더욱 기괴한 광기를 부추겼다. 몸을 전신주에 묶고 눈알을 도려내고 코를 자른 후 심장 한복판에 칼을 박아 넣었다. 머리에 못을 박아 죽이기도 했다.
-「서(序) 그날」 중에서
“어머니, 형님, 걱정 마시여. 어찌 됐든 인간으로서 생존해가는 이상은 어떤 방법을 찾아서라도 생활하게 되지 않겠나여? 금전이나, 재보의 적재나, 어떠한 이익을 좇기보다는 전심으로 공부한 후에 제자의 교육을 업으로 할래요. 저를 믿어주시요.”
지난봄의 기억이 아련한 10월의 볕 좋은 날, 박열은 일본으로 떠나기 위해 경성 역에서 부산을 향해 출발했다. 시모노세키 행 관부연락선은 일본과 조선 사이를 잇는 유일한 교통수단이었다. 어느새 그 바다에는 현해탄(玄海灘)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었다. 검푸르고 거친 바다라는 뜻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건넜고 또 건너갈 원한의 뱃길, 피눈물의 바다.
뱃전에 서서 일렁이는 물결을 바라보는 박열의 표정은 담담하고 평온했다. 알 수 없는 열정과 충동으로 들썩이던 불안한 소년기는 지나갔다. 청년은 그 불안까지도 지르밟고 전진할 것이다. 험난한 길이겠지만 두려움은 없다. 그는 더 이상 아이가 아니었다.
-「아프고 슬픈 민족」 중에서
‘아, 속았다!’
후미코는 정체 모를 약에 취한 채 거듭거듭 허우적거렸다.
‘악마 같은 놈……!’
치명상을 입은 짐승처럼 휘늘어진 채 어둡고 좁은 수렁 속으로 빠져들었다. 남자는 후미코가 생각했던 사람이 아니었다. 막내 이모의 시동생이 아니라 동네 목욕탕에 가면서 잠시 마주쳤던 이웃집 남자였다. 어수룩한 시골처녀의 착각이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낳았다. 아무에게도 보호받지 못하는 순진한 어린양은 굶주린 맹수의 먹잇감이었다.
모토에이 역시 그 낯선 악마의 모습으로 몸을 짓누르며 덤벼들었다. 양팔을 하나로 잡쥐어 머리 위로 치켜 올리고 하카마 사이로 무릎을 밀어 넣으며 무작스레 파고들었다. 팔을 묶여 제대로 저항할 수 없기도 했지만 그 와중에 우두둑 솔기가 타지는 소리가 신경 쓰였다.
-「하늘 아래 가장 무거운 것」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