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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로 본 조선

일기로 본 조선

조계영,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엮은이)
글항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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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로 본 조선
eBook 미리보기

책 정보

· 제목 : 일기로 본 조선 
· 분류 : 국내도서 > 역사 > 조선사 > 조선시대 일반
· ISBN : 9788967350390
· 쪽수 : 412쪽
· 출판일 : 2013-01-31

책 소개

'규장각 교양총서' 8권. 12명 조선인의 삶의 궤적을 좇는다. 이 책에서 다룬 열두 편의 일기는 세 편을 제외하고는 개인의 일상생활 전반을 기록한 생활일기다. 열두 편의 일기가 지닌 독특한 맛과 향을 풀어내어 옛사람들과 소통하고자 한다.

목차

규장각 교양총서를 발간하며
머리글|인생의 궤적軌跡, 일상의 기록-조선시대 일기와 소통하다

1장 생의 끝자락에 선 이들의 모습을 담다
_조선의 치병治病일기들 김호·경인교대 사회교육과 교수

2장 17세기 사림정치의 굴곡을 기록하다
_김영의『계암일록』박현순·규장각한국학연구원 HK교수

3장 왕세자의 일거수일투족을 좇다
_소현세자의 삶과 서연활동 김남기·안동대 한문학과 교수

4장 피란 중 써내려간 사대부 여성의 삶
_남평 조씨의『병자일기』이숙인·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책임연구원

5장 “흠영이 없으면 나도 없다”
_서화애호가 유만주의『흠영』황정연·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사

6장 16세기 초, 경상도 도사로 보낸 1년의 시간
_황사우의『재영남일기』정호훈·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HK교수

7장 서학을 좇는 한 지식인의 기록
_황윤석의『이재난고』구만옥·경희대 사학과 교수

8장 글씨 잘 쓴 경상감영 영리들, 규장각 출장길에 오르다
_권계만의의 기록『내각선사일록』조계영·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HK연구교수

9장 무관이 남긴 68년의 생애사
_노상추 일기 문숙자·한국학중앙연구원 연구교수

10장 미천한 보통 사람이 남긴 일기와 경제생활
_『하재일기』를 통해 본 공인貢人의 일상 조영준·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HK연구교수

11장 이국땅의 사건과 유배지의 민란을 기록하다
_김윤식의『음청사』황재문·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HK교수

12장 일제강점기 한 지식인의 내면일기
_윤치호의 일기 김상태·서울대학교병원 교수

참고문헌 및 더 읽어볼 책들
지은이

저자소개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지은이)    정보 더보기
규장각은 조선의 22대 왕 정조가 즉위한 해(1776)에 처음으로 도서관이자 왕립학술기관으로 세워져 135년간 기록문화와 지식의 보고寶庫로서 그 역할을 다해왔다. 그러나 1910년 왕조의 멸망으로 폐지된 뒤 그저 고문헌 도서관으로서만 수십 년을 지탱해왔다. 이후 1990년대부터 서울대학교 부속기관인 규장각으로서 자료 정리와 연구사업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졌고, 창설 230년이 되는 2006년에 규장각은 한국문화 연구소와 통합함으로써 학술 연구기관으로서의 기능을 되살려 규장각한국학연구원으로 다시 태어났다. 규장각은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국보 지정 고서적, 의궤와 같은 유네스코 지정 세계기록문화 유산, 그 외에도 고문서·고지도 등 다양한 기록물을 보유하고 있어 아카이브 전체가 하나의 국가문화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문헌에 담긴 방대한 지식과 정보를 토대로 그동안 한국학 전문가들이 모여 최고 수준의 학술 연구에 매진해왔다. 최근에는 지역학의 한계를 넘어 한국학의 세계화, 그리고 전문 연구자에 국한되지 않는 시민과 함께하는 한국학으로 변신을 꾀하고 있다. 학술지 『한국문화』 『규장각』, Seoul Journal of Korean Studies 등을 펴내고 있으며 〈규장각 자료총서〉 〈한국문화연구총서〉 〈한국학 공동연구총서〉 〈한국학 모노그래프〉 〈한국학 연구총서〉〈한국학 자료총서〉 등 900여 책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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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계영 (지은이)    정보 더보기
덕성여대에서 국어국문학을 전공해 석사학위를 받았고 한국학중앙연구원 고문헌관리학과에서 「조선왕실 봉안 서책의 장황과 보존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HK연구교수·책임연구원을 역임하고, 현재 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이다. 의궤에 대한 심층적 이해를 바탕으로, 물질문화와 의례를 접목한 책의 문화사를 규명하고 있다. 주요 연구로 「건릉 봉안 서책과 규장각의 역할」, 『적상산사고의 운영과 봉안 자료 연구』(공저), 「영조 연간의 『改修日記』와 일기청 운영의 실상」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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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노수신의 치병일기 속에 보이는 당대 최고 실력 내의들의 갈등
『정청일기』를 읽다보면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을 발견하게 된다. 일기 후반부로 갈수록 허준의 방문은 줄어들고 안덕수와 의약을 의논하는 빈도가 잦아진다는 사실이다. 8월 14일에 노수신의 눈 부위가 붓고 건강 상태가 나빠지자 정탁鄭琢의 요청으로 양지수, 남응명 등 두 명의 내의가 노수신을 방문한 후 ‘폐열肺熱이 심하고 기운이 울체氣滯하다’는 진단을 내리고 안덕수에게 처방을 묻는 기사가 보인다(1589년 8월 14일) 그 뒤 8월 27일 안덕수는 직접 노수신을 방문하여 문진했다. 안덕수는 이른바 양예수-허준으로 이어지는 강하고 효과 빠른 약물을 선호하는 준한峻寒 의학에 반대하여 온보溫補의 의학을 강조하던 인물이었다.
유몽인의 『어우야담』에는 이러한 두 학파 사이의 갈등이 잘 묘사되어 있다. “양예수의 투약 방법은 패도覇道와 같아서 집중적인 투약으로 효과를 빨리 보는 반면 사람을 상하게 하는 일이 많지만, 안덕수의 방법은 왕도王道와 같아서 효력이 느리지만 사람을 상하게 하는 일이 없다. 이에 세론世論은 모두 안덕수를 두둔하였다”는 것이다( 『어우야담於于野談』 「의약醫藥」). 허준의 방법은 매우 신속하면서 효과적이지만 몸을 상하게 하는 반면 안덕수의 처방은 비록 효과는 느리지만 몸을 보하는 방법이었던 것이다.애초에 노쇠한 노수신에게는 비교적 강하고 효과 빠른 허준의 처방 대신, 효과가 느리지만 몸을 상하게 하지 않는 안덕수의 약물이 적합했던 것으로 보인다. 일기의 짧은 구절 속에서 당시 쌍벽을 이루던 허준과 안덕수 두 사람의 보이지 않는 대결을 간취할 수 있다.


모친 병환 고치기 위해 손가락을 두 번이나 자른 효자
21일 오후에 병세가 한층 더 위독해졌다. 두 뺨과 손발이 모두 차갑고 코와 입에서 나오는 숨이 차츰 차가워졌다. 또 거의 운명하실 정도로 위급한 지경에 이르자, 아버지께서는 곁에서 시중드는 계집종을 나가게 하고 당숙 어른께서 눈치채고 저지할까 걱정하여 몰래 오른손네 번째 손가락을 잘랐는데 첫 번째 자를 때는 피가 나오지 않았고 두 번째 자를 때는 피가 조금밖에 나오지 않았다. 세 번째 자른 뒤에야 선혈이 나왔는데 세 곳에서 모두 피가 철철 흘러나왔다. 또 미음에 타서그릇에 가득 채워 할머니 입안으로 남김없이 부어 드시게 하였다. 얼마 후에 몸에 온기溫氣가 차츰 돌아왔다. 이때 형님이 아랫방에서 쉬고 있다가 아버지가 할머니 입안으로 부어넣을 때에 병상 곁에 들어와서 처음에는 주사朱砂를 미음에 탄 것인 줄 생각하였다가 두 번째 이렇게 단지를 한 것임을 알고서 마음과 간담이 서늘해졌다. 어제 이러한 일이 있었기 때문에 다시 있으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몇 해 동안 병을 앓았고 허약한 체력이었는데, 연일 계속하여 차마 할 수 없는 일을 하셨다. 그날의 정경을 보는 사람마다 모두 눈물을 흘렸다. 아버님은 대변의 맛을 보니 마치 냄새가 전혀 나지 않는 썩은 기름 찌꺼기 같다고 하셨다. 인삼 3돈을 넣은 속미음을 드시게 하였다. 양동 숙부님은 흐느껴 울면서 문밖에 나와 장례를 치를 채비를 하였으니, 그 경황이 없음을 예상할 수 있다.


사림의 이름으로 처벌하다: 일기에 나타난 유벌儒罰의 사회상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정국은 완전히 달라졌다. 북인 정권의 독주에 반대하다 귀양갔던 사람들이 풀려나고 폐모론에 반대하며 조정을 떠났던 이들도 속속 돌아왔다. 반면 북인 정권에 동참했던 인물들은 처형되거나 유배길을 떠났다. 지방에서도 북인 세력으로 활동하거나 북인 세력을 등에 업고 전횡을 부린 인사들에 대한 단죄가 시작되었다. 각지의 유생들은 유회를 열어 사림의 이름으로 북인 세력을 처벌했다. 예안과 이웃한 안동과 영천에서도 유회를 열어 유벌을 시행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김영이 사는 예안에서는 1623년 4월 3일 향교 근처 백사장에서 유회를 열었다.
“밥을 먹은 후 여희·덕여 등과 함께 대사大寺 앞 백사장에 갔다. 봉사금경·영천수령을 지낸 이영도 등 모인 사람이 100여 명이나 되었다. 흉당凶黨을 처벌하여 오윤은 영영삭적하고 (…) 이홍익·윤동로는 삭적하였다. 모인 사람들이 모두 온계에 가서 서긍의 집을 부수게 하였다. (…) 온계의 동구에 이르러 개울가에 앉아 있는데 서긍의 집에서는 몇 리 떨어져 있었다. 사자士子와 품관品官들이 군사들을 시켜 집을 부수게 하였는데 군사들이 부수기가 쉽지 않자 불을 놓아버렸다. 멀리서 보고 있다가 놀라서 힘써 말렸으나 불이 이미 번져서 꺼지지 않았다. 아름답지 못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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