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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역사 > 조선사 > 조선전기(개국~임진왜란 이전)
· ISBN : 9788968171741
· 쪽수 : 308쪽
· 출판일 : 2014-10-30
책 소개
목차
서문
제1부 각종 저서에 실린 글
1. 시
(1) 용재집 : 이행(1478∼1534)
ㅁ관서 지방에 병마절도사로 나가는 조억지 윤손을 보내며 2수
ㅁ조 수사 윤손의 그림 족자에 있는 남 상공의 시에 차운하다.
(2) 관포시집 : 어득강(1470∼1550)
ㅁ명홍정 상량문
ㅁ감사 청라공을 모시고 조수사의 명홍정에서 놀다.청라공에게 드리다.
ㅁ명홍정 호수의 배에서 씀
2. 역사서·지리지·문집 등에 실린 기사문
(1) 국조보감
ㅁ중종 18년(1523) 12월
ㅁ중종 30년(1535) 2월
(2) 동사략 상 : 이원익
ㅁ계미년 중종 18년(1523)
(3) 임하필기 : 이유원(1814~1888)
ㅁ무신이 사신의 임무를 띠다
(4) 국조인물지 : 안종화(1860~1924)
ㅁ중종조 조윤손
ㅁ중종조 허굉
(5) 연려실기술 : 이긍익(1736∼1806)
ㅁ장언량
(6) 묵재일기 하 : 이문건(1494∼1567)
ㅁ가정 36년(1557) 정사
(7) 신증동국여지승람: 관찬지리지
ㅁ함경도, 갑산도호부 누정
(8) 여지도서: 저자 미상
ㅁ경상도 진주 인물
(9) 진양지 : 성여신(1546∼1632)
ㅁ월아산 [진양지 권1, 산천]
ㅁ명홍정 [진양지 권2, 정대·제언]
ㅁ조월대 [진양지 권2, 정대·제언]
ㅁ홍경포 방천 [진양지 제2권, 정대·제언]
ㅁ조윤손 [진양지 권3, 인물]
ㅁ정은부 [진양지 권3, 인물]
ㅁ조윤손 [진양지 권4, 무과·총묘]
ㅁ조윤손 묘 [진양지 권4, 무과·총묘]
(10) 교남지 : 정원호
ㅁ진주군 인물 [교남지 권53]
ㅁ진주군 누정 [교남지 권53]
ㅁ진주군 총묘 [교남지 권53]
3. 만사·제문
(1) 구암집 : 이정(1512~1571)
ㅁ판서 조윤손을 애도함 [구암집 권1, 원집]
ㅁ판서 조윤손을 애도함 [구암집 권1, 속집]
ㅁ판서 조윤손을 애도함 [구암집 권1, 속집]
ㅁ조 판서 제문 [구암집 권1, 속집]
4. 전기문·묘지명
(1) 유헌집 : 정황(1512∼1560)
ㅁ판서 조윤손 전기
ㅁ조 판서 부인 진산 강씨 묘지명, 경술년(1550년)
제2부 장호공 일대기
1. 연보
2. 비문
3. 조선왕조실록에 실린 장호공 관련 기사
제3부 장호공 연구 논문
진주지역의 역사 자원으로서 조윤손 연구[경남문화권연구 제21집]- 박용국
더 보태는 글: 창녕조씨 시랑공파 이야기
-창녕조씨 시랑공파
-대사헌공 조숙기
-명홍재기
발문
저자소개
책속에서
어떤 국가가 존속하려면, 문관(文官)과 무관(武官)이 아울러 존재하여 서로 맡은 바 임무를 다하며 힘을 합쳐야 한다. 마치 사람의 신체가 좌우대칭으로 이루어져 완전한 기능을 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역사상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나라를 세우는 과정에서는 무인들이 큰 역할을 하지만, 나라가 안정에 들어서면 문관들이 점점 세력을 넓혀가면서 무관들의 세력을 감축시켜 나간다. 나라를 보위하기 위해서 무관들의 존재가 필요한 것은 알지만, 무관들이 힘을 얻으면 왕권이 위태롭게 되고 문관들이 그 압제를 받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문관들은 글 솜씨가 뛰어나 시문을 많이 지으며, 또 자신과 관계된 기록을 많이 남기고, 제자들을 길러 학파를 형성하여 길이길이 그 영향력을 끼친다. 반면에 무관들은 생명을 걸고 국경 지방이나 전쟁터에서 자신의 임무를 다하지만, 글을 남기지 못하고 제자들을 기르지 못하여 일생을 마치고 난 뒤에는 그 자취가 생시의 업적보다 훨씬 미미하게 된다. 그래서 혁혁한 전공이나 업적에도 불구하고,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 장군 등 몇몇을 제외하고는 일반 사람들이 잘 모르는 인물로 위축되고 만다.
진주(晋州)가 낳은 걸출한 무관 장호공(莊胡公) 조윤손(曺潤孫) 장군은, 문한(文翰)의 전통이 있는 가문에서 태어나 무과를 통해서 관직에 진출하여 목민관(牧民官)으로서 자애로운 정적(政績)을 남겼고, 남쪽으로 왜구를 막고 북쪽으로는 여진족(女眞族)을 막아 국가를 안정의 기틀 위에 올려놓았다. 만년에 벼슬이 국방의 총책임자인 병조 판서에까지 이르렀으니, 당시에 능력과 경륜을 충분히 인정받았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가정의 전통을 계승하여 글에도 능했고, 만권의 장서를 쌓아두고 독서를 즐겼으며, 권세를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지위에 있으면서도 근검, 소박하게 생활했다고 한다. 그는 단순히 한 가문을 빛낸 선조에 그치지 않고, 모범적인 무관으로서 온 나라를 안정시킨 위대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무관이다 보니, 본인이 지은 글이 거의 없고, 친구나 제자들과 주고받은 글도 거의 없다. 다행히 당시 고향의 후배인 관포(灌圃) 어득강(魚得江)이 지은 비문이 남아 있어 그 행적은 상세히 알 수 있다. 관포는 직접 장호공을 가까이서 자주 본 인물이기 때문에 그가 지은 비문은 여타의 비문과는 가치가 매우 다르다. 그 밖에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등 관찬 기록만이 아니라, 사찬의 역사서와 개인의 문집 등에 그에 관한 자료가 흩어져 실려 있다.
대단히 비중 있는 인물인데도, 오늘날에 와서는 사람들이 그의 인물됨과 업적을 잘 모르고 있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본인이 지은 시문이 얼마 되지 않아 문집을 만들지 못할 형편일 때는 우리 조상들은 관계되는 자료들을 모두 모아 실기(實紀)라는 형태로 책을 편집 출판하여, 그 인물됨을 알리고 기리는 방식을 개발하였다.
족후손 조규태(曺圭泰) 박사는 국어학을 전공하는 교수로서 경상대학교(慶尙大學校)에 재직하면서 전공분야의 연구와 교육에 큰 업적을 남겼다. 연구의 여가에 30년 전부터 문중의 일에 뿌리를 찾는 성력(誠力)을 쏟아 집안 부로(父老)들과 뜻을 합쳐 선대 묘단의 건립과 정비, 파보 발행, 문중의 결집 등 가문을 위해 여러 가지 의미 있는 일을 많이 하였다.
이제 몇 년 전부터 장호공에 관계된 기록을 힘닿는 데까지 전부 찾아 모아 체계를 세워 분류하고 편집하여 다시 쉬운 우리말로 번역하였다. 문중 부로들의 감정(勘定)을 거쳐 출판하여 연원가(淵源家) 및 학인(學人)들에게 널리 반질(頒帙)하려고 한다.
책이 거의 다 되었을 때 불초에게 한번 검토해 줄 것을 요청하여, 살펴보니 자료를 정성을 다하여 수집하였고, 체재가 잘 짜여 있고, 번역이 쉽고, 주석이 상밀하여, 관심만 있으면 후손이나 일반 사람 누구라도 읽을 수 있도록 해 두었다. 서문을 요청하기에, 그 숭조목족(崇祖睦族)하는 아름다운 정신을 훌륭하게 여겨 크게 사양하지 않고, 책머리에 몇 글자를 적는다.
책이 출판 보급되었다고 해서 능사(能事)가 이미 다 끝났다고 생각하는 후손들이 있다면, 이는 크게 잘못된 생각이다. 이 실기를 읽고서, 자신의 생명을 걸고 국가를 보위하고, 목민관으로서 백성을 사랑하고, 무관이면서도 글 읽기를 좋아하고, 높은 자리에 있으면서도 검소하게 살다간 장호공의 정신을 배우고 본받아야 『장호공실기』를 편역(編譯)하여 출판한 일이 헛되지 않을 것이다.
오늘날 자기를 희생하는 진정한 지도자가 없는 우리 시대에, 조 박사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이 실기를 통해서 장호공 같은 구국(救國), 위민(爲民)의 지도자가 올바로 알려져 본받는 사람이 많아지기를 간절히 바라는 바이다.
- 서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