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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피지기하는 국민 백전백승하는 외교

지피지기하는 국민 백전백승하는 외교

(알기 쉽고 알고 싶은 외교 이야기)

양봉렬 (지은이)
  |  
전남대학교출판부
2016-08-30
  |  
17,000원

일반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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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피지기하는 국민 백전백승하는 외교

책 정보

· 제목 : 지피지기하는 국민 백전백승하는 외교 (알기 쉽고 알고 싶은 외교 이야기)
· 분류 : 국내도서 > 사회과학 > 정치학/외교학/행정학 > 외교정책/외교학
· ISBN : 9788968493430
· 쪽수 : 372쪽

책 소개

21세기는 국민외교의 시대이다. 직업 외교관 출신인 양봉렬 전남대 초빙교수가 준비된 외교 대통령으로 추앙받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외교 비전과 업적을 바탕으로 우리가 알고 싶은 외교 이야기를 외교 사례를 중심으로 알기 쉽게 풀어낸 외교 교양서적이다.

목차

들어가는 말 / 4
Part 01 분단된 한반도와 외교적 사고력 / 13
Part 02 우리에게 외교가 왜 중요한가? / 53
Part 03 한반도와 주변 4대 강대국 / 121
Part 04 동아시아 공동체는 우리의 미래 / 191
Part 05 지피지기하는 국민, 백전백승하는 외교 / 221
부록 외교관련 기고문, 강연 원고 모음 / 235
참고문헌 / 364

저자소개

양봉렬 (지은이)    정보 더보기
서울대학교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하버드대학교 케네디스쿨에서 행정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만학으로 2016년 2월 광주대학교에서 「동아시아 지역 경제통합에 관한 연구」로 경영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1978년 제12회 외무고시에 합격한 후 외교부에 입부하여 33년 동안 직업 외교관의 길을 걸었다. 2000년 6월에 개최된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을 준비하기 위한 선발대의 일원으로 약 2주 동안 평양에 파견되어 활동하였고, 2005년 1월부터 2007년 8월까지 김대중 전 대통령 비서실에 파견되어 비서관으로 일했다. 2007년 9월부터 3년간 주 말레이시아 대사를 역임하였다. 2010년 10월부터 외교부 본부에서 아세안 대사로 활동한 후 2011년 6월에 퇴임하고, 같은 해 7월부터 3년간 광주과학기술원 대외부총장을 역임하였다. 2014년 9월부터 현재까지 전남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초빙교수로 위촉되어 한국 외교에 대해 강의하고 있다. 공저로 『중국의 부상과 동남아의 대응』(2011년, 동북아역사재단), 『대사들, 아시아 전략을 말하다』(2013년, (주) 늘품플러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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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2006년 초 이 책을 구상하여 쓰기 시작한 이후 출판하기까지 약 10년의 세월이 지났다. 33년 동안 직업 외교관으로 외교 현장에 근무하면서 얻은 경험과 아울러 서강대학교 국제대학원과 전남대학교 정치외교학과의 초빙교수로 강의를 하면서 틈틈이 자료를 보완하는 작업을 거쳐 이 책을 완성하게 되었다.
이 책을 쓰게 된 동기는 두 가지이다. 첫째는 필자가 김대중 전 대통령과 맺은 2번의 인연 때문이다. 필자는 국민의 정부 시절에는 청와대 의전 비서실에 파견 근무하면서, 또한 김대중 대통령 퇴임 후에는 비서관으로 그분을 지근에서 보좌한 인연을 가지고 있다. 곁에서 지켜본 김대중 전 대통령은 우리 현대사에서 그 어느 지도자보다 준비된 외교 대통령이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외교에 대한 뛰어난 통찰력과 원대한 비전, 그리고 치밀한 실행력을 거울삼아 이 책의 기본 골격과 내용을 구상했다. 이 책의 곳곳에 김대중 대통령의 외교 철학과 업적이 인용되고 있다는 점을 미리 밝혀 둔다.
둘째는 우리 젊은이들에게 세계화 시대에 맞는 열린 외교적 사고 능력을 키워 주고 싶다는 필자의 소박한 소망 때문이다. 우리는 통상 민감한 외교 문제에 대하여 국익을 먼저 따져 보는 자세보다는 감정적인 대응을 앞세우는 경우를 종종 겪는다. 민주주의 국가에서의 이와 같은 외교의 취약성은 180년 전에 이미 프랑스의 사상가 알렉시스 드 토크빌(Alexis de Tocqueville)에 의하여 지적된 바 있다. 그는 민주주의에 관한 고전으로 꼽히는 명저 『미국의 민주주의』에서 “외교문제를 다루는 데 있어서 민주주의 국가들은 침착하기보다는 충동적이고, 순간적인 열정 때문에 오랫동안 숙고하여 마련한 계획을 포기하는 경향이 있다.”라고 썼다.
또한 우리는 외교가 대통령이나 외교관과 같은 특정인들이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자기와는 관계없다고 여기는 경향이 있다. 물론 이런 현상은 우리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므로 심각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 외교가 우리의 생존을 좌우할 만큼 중요하기 때문에 우리가 다른 나라 국민들보다 훨씬 더 외교를 잘 알 필요가 있다고 믿는다.
전문가들의 시각에서는 이 책의 주제와 내용이 단순화되고 저널리스틱하다는 비판이 제기될 수 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이 책은 외교 전문가들이 아닌 우리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쓴 것이고, 그들이 알고 싶어 할 것으로 예상되는 주제와 내용을 큰 맥락에서 다루고 있다는 점을 미리 밝혀 둔다. 특히 이 책은 독자들이 가급적 쉽게 읽을 수 있고, 외교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데 중점을 두었다. 필자의 조그마한 정성이 독자들로 하여금 외교를 좀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스스로 외교관이 되는 데 일조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이 책은 5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의 주제는 분단된 한반도와 외교적 사고이다. 1장에서는 필자가 2000년 6월 약 2주 동안 평양에서 역사상 최초로 개최되는 남북정상회담을 준비하면서 겪은 경험을 정리하여 보았다. 필자는 남북정상회담을 준비하면서 우리 한반도가 주변 강대국의 영향에 얼마나 민감한지를 생생하게 체험하였는데, 이를 독자들과 함께 나누고 싶었다. 2장에서는 외교의 다양한 특성과 역사적 사례 활용의 유용성, 그리고 세계화 시대에 바람직한 외교적 사고에 관한 필자의 생각을 정리하였다.
2부에서는 외교가 다른 나라보다 우리에게 왜 더 중요한가에 대한 답을 구하고자 닉슨 쇼크가 몰고 온 한반도 정세 변화와 미국 등 다른 나라의 사례를 살펴보았다. 또한 우리 외교에 가장 중요한 과제인 통일과 북한 핵 문제의 외교적 측면도 함께 다루었다.
3부에서는 우리나라와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 등 주변 4대 강대국과의 관계를 살펴보았다. 이들 강대국들의 대외정책의 기본 특징과 이들과 우리와의 상호 관계의 중요성과 바람직한 미래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4부에서는 중장기적인 관점에서 우리 외교의 새 지평을 열어 줄 동아시아공동체 형성의 중요성과 현황, 그리고 그 중심 역할을 하고 있는 아세안에 대하여 다루었다.
마지막으로 5부에서는 ‘지피지기하는 국민이 백전백승하는 외교를 만든다’는 이 책의 주제를 종합적으로 살펴보았다. 이를 통해 ‘1동맹 3친선 체제’와 중용외교의 필요성, 그리고 남북 관계와 4강 외교의 상관관계를 비롯하여 개개인의 외교 역량의 중요성에 대하여 함께 생각해보는 기회를 갖고 싶었다.
부록에는 필자가 지난 몇 년 동안 주요 외교 이슈 등과 관련하여 언론, 잡지와 대학 등에 기고한 글과 강연문을 실었다.
끝으로 지병문 전남대학교 총장님의 도움이 없었다면 이 책의 출판이 어려웠을 것이라는 점을 밝히면서, 지 총장님께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아울러 책을 출판하는 과정에서 음양으로 도움을 준 고형일 교수님, 이두휴 교수님과 책을 감수하여 주신 김현정 박사님, 책의 내용에 젊은이들의 감각을 살려 준 김영은, 나혜원 전남대학교 학생 그리고 전남대학교출판부 직원 여러분께 고마움을 전한다.

2016년 7월
전남대학교 용지관 연구실에서
양 봉 렬


Part 01 분단된 한반도와 외교적 사고력

1. 평양에서 목격한 한반도의 지정학적 현실

제1차 남북정상회담을 준비하며
2000년 5월 31일 오전 10시, 나는 역사상 최초로 개최되는 남북정상회담을 준비하기 위해 구성된 사전 선발대 30명의 일원으로 판문점 군사 분계선을 넘었다. 남북정상회담이 개최되기 2주 전이었다. 난생 처음 북한을 방문하는 설렘과 두려움, 그리고 사명감이 교차되어 긴장되었다. 선발대 모두가 나와 같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당시 나는 외교부에서 청와대 의전비서실로 파견되어 대통령의 국빈 행사 업무를 담당하고 있었다. 국빈 행사란 대통령이 외국을 방문하거나 또는 외국의 정상이 우리나라를 방문하는 경우 정상회담 등 제반 일정을 계획하여, 행사를 준비하고 실행하는 일을 말한다.
나의 업무 중 하나는 대통령의 해외 방문 일정이 확정되면 대상 국가에 미리 가서 대통령 방문에 필요한 여러 가지 의전 관련 사항을 사전에 조율하고 협의하는 것이었다. 내가 당시 남북정상회담에 앞서 선발대로 평양을 방문하게 된 것은 이러한 업무를 수행하기 위해서였다.
우리 일행은 긴장된 가운데 판문점 지역 내 북한 측 통일각에서 30분 정도 머무른 다음, 북한 측이 제공한 차를 타고 평양으로 향하였다. 북한은 우리 일행을 위해 구형 벤츠 4대와 15인승 마이크로버스 2대를 준비해 주었다. 주홍색, 연두색 등 특이한 색깔의 벤츠가 인상적이었다.
우리는 168km에 이르는 개성~평양 간 고속도로를 타고 약 3시간 후인 오후 1시 30분경에 숙소인 평양 백화원 초대소에 도착하였다. 가는 도중 휴게소에서 30분 정도 쉬었으니 2시간 30분쯤 차를 탄 셈이었다. 평양이 이렇게 우리 가까이 있었다.
우리가 달린 고속도로 상태는 말끔하였다.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미리 손질을 해놓은 듯 보였다. 그러나 평양에 도착할 때까지 우리가 본 차량은 겨우 두세 대에 불과했다.
가는 길에 산악지대가 많아 자주 터널을 통과해야 했다. 내가 세어 본 바로는 일행이 통과한 터널이 18개였다. 군데군데 남쪽을 향해 위장된 군 포병기지가 싸늘한 기운을 풍겼다. 출발 후 꽤 지나서야 모내기가 한창인 논을 볼 수 있었다.
우리 일행은 중간 지점인 서흥 휴게소에서 잠시 쉬었다. 서흥 휴게소는 개성~평양 간 고속도로에 세워진 유일한 휴게소이다. 이 휴게소는 도로 양 방향에서 이용할 수 있도록 고속도로 위를 가로질러 건축되어 있었다. 서흥 휴게소 안에는 실내 기념품 판매점도 보였지만 이날은 간이 판매대가 야외에 설치되어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북한 여성들이 술, 인삼, 차, 건조식품 등을 팔고 있었다. 아마 우리가 지나갈 것을 알고 임시 판매대를 준비한 듯했다. 북한 여성 판매원들은 우리를 친절히 맞아 주었으나 입담이 과한편이였다. 기회만 있으면 “위대한 장군님이…”로 시작하여 청산유수로 말하는 통에 나중에는 아예 피해 다녔던 기억이 난다.
업무 협의차 서울로 나왔다가 6월 8일 판문점을 통해 다시 평양으로 들어갔다. 오후 늦은 시간 어느 지역을 지나는데 멀리 한 마을이 보였다. 일렬로 사람들이 늘어서 있어서 호기심에 자세히 보니 마을 우물에서 양동이에 물을 담아 옆 사람에게 차례차례 건네주고 있었다. 가뭄으로 말라버린 논과 밭에 그런 식으로 물을 대고 있었다.
이 광경을 보고 문득 내 어린 시절 시골 고향 마을 풍경이 떠올랐다. 가뭄이 들어 논과 밭에 물이 부족할 때면 동네 어른들은 한 줄로 늘어서서 해가 저물 때까지 마을 우물에서 물을 채운 물동이를 차례로 옆 사람에게 옮겨 물을 대곤 했었다. 북한은 우리의 바로 그 60년대 초반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도로 주변에 보이는 개성의 주택들은 몹시 낡아 보이는 아파트였다. 시골에는 소위 ‘하모니카집’이라 불리는 2~3층의 다세대 주택이 대부분이었다. 이들 주택은 페인트칠도 안 돼 있어 몹시 초라해 보였다. 산에도 잡초만 무성할 뿐 나무를 보긴 어려웠다. 그나마 있는 나무들도 어린 묘목들뿐이어서 그간 땔감으로 베고 새로 심은 것임을 짐작케 했다.
평양에 들어가는 입구는 ‘통일대로’라 불렸다. 대로 주변에 거대한 아파트 단지가 마치 서울의 아파트 숲을 연상시켰다. 후에 들으니 전기가 부족하여 그 높은 층을 걸어서 올라 다니고 물도 아래에서 길러다 먹는다고 했다. 그야말로 이름만 아파트일 뿐 주민들의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니겠다 싶었다.
우리는 대동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건넜다. 낡은 군함 앞에 많은 학생들이 모여 있었다. 안내원에게 물으니 1968년 1월 동해에서 납치된 미국 군함 ‘푸에블로 호’라고 소개했다. 동해에서 납치된 군함이 평양의 대동강에 있는 것을 보고 자초지종을 물으니 2년 전 김정일 위원장의 지시로 원산에서 이곳으로 옮겨왔다고 했다. 북한이 상투적으로 주장하는 ‘미 제국주의’에 승리한 상징물로 학생, 주민 등의 교육을 위해 평양 한복판으로 옮겨다 놓은 것이었다.
평양 시내의 도로는 넓었으나 차량은 드문드문 지나갔다. 대동강 지류에 자리한 공원에는 한낮에도 딱히 할 일이 없어 뵈는 사람들이 많았다. 실업자가 없다는 북한도 실상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평양 시내 곳곳에는 수신호로 교통을 정리하는 여성 교통안내원이 있었는데, 그 모습이 신기했다. 동서남북으로 연신 신호를 보내는 모습이 마치 기계처럼 빠르고 정확했다. 저녁이 되자 평양 시내는 출퇴근하는 시민과 학생들로 북적거렸다. 전동차 등 차량 통행도 낮 시간대에 비해 많아졌다.

파격적인 정상회담
백화원 초대소는 평양 시내 북동쪽 교외에 있었다. 2개 동에 90여 개 객실을 갖춘 대형 영빈관이었다. 백화원으로 가는 길에 김일성 주석의 유해가 안치된 금수산 주석궁이 위용을 드러내고 있었다. 백화원 초대소는 북경의 영빈관인 조어대를 모델로 지었다고 한다. 숲속 큰 연못에는 잉어 등 큰 물고기가 많았고 주변 산책로는 조용하고 녹음이 짙었다. 우리들은 행사를 준비하면서 도청을 걱정하여 중요한 대화를 할 때면 연못 주위를 걷곤 했다. 도청도 방지하고 산책도 하고 일석이조였다.
평양에 체류한 2주 동안 행사가 개최되는 지역을 답사하는 일 외에 대부분의 시간을 백화원에서 보내야 했다. 북한 측은 매일 하루 세 번 메뉴를 바꾸어 가며 우리를 정성껏 대접했다. 식사 때마다 음식 메뉴판이 함께 나왔는데 대부분 낯선 북한말로 적혀 있어 무슨 종류의 음식인지 알 수 없는 경우가 많았다. 외국 명 음식으로는 ‘케피르’가 유일했는데 일종의 요구르트였다.
음식들은 대체로 담백했다. 요즘 유행하는 웰빙식이라 할 수 있었다. 보통 2~3가지 전채에 밥, 국, 된장찌개 등 주요리가 넉넉히 나왔다. 점심과 저녁에는 식사와 함께 술이 빠지지 않았다. 맥주, 들쭉술에다가 30도 이상의 독한 전통주인 감로주, 황구렁이술, 소주 등을 식탁 위에 준비해 놓아 북한의 다양한 술 문화를 엿볼 수 있었다.
외식도 여러 차례 하였다. 하루는 평양냉면으로 유명한 옥류관에서 물냉면을 먹었다. 졸깃한 면발과 담백한 국물 맛이 일품이었다. 보통 크기보다 작은 그릇에 나와 양은 적은 편이었다. 우리 일행 대부분이 한 번에 두세 그릇씩 비웠다. 일행 중 어떤 이는 다섯 그릇을 먹기도 했다. 그만큼 맛이 좋았다.
북측은 우리를 정성껏 대해 주었다. 그러나 그들과의 정상회담 준비는 애로사항이 많았다. 특히 김정일 위원장이 참석하는 행사는 경호 문제라며 세부 일정 일체를 비밀에 붙였다. 김정일 위원장이 공항에서 김대중 대통령을 영접하는지, 언제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이 회담을 갖는지, 김대중 대통령이 주최하는 답례 만찬에 김정일 위원장이 참석하는지 등 모든 일정은 행사 직전이 되어서야 겨우 알 수 있었다.
내가 근무했던 사우디아라비아에서도 비슷한 일을 경험한 적이 있지만 북측의 의전은 일반적인 국제관례를 한참 벗어나 있었다. 북측은 처음부터 “국제관례에 따르지 말고 우리 식으로 하자. 자주적인 입장에서 모든 문제를 풀어 나가자.”라고 말해 우리를 불안하게 하였다.
남북의 지도자들이 손을 잡고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합창하는 한 컷의 사진으로 유명한 6월 15일 김정일 위원장 주최 오찬. 이 행사는 하루 전날, 그것도 저녁 늦게 결정되었다.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이 6.15 공동선언문에 서명한 직후 김정일 위원장이 즉석에서 우리 대통령을 오찬에 초대한 것이다. 일반 정상회담에서는 볼 수 없는 파격이었다.
오찬 준비를 위해 북측 인사들과 밤을 새웠다. 평소 우리가 연락하기 전에는 아는 체도 하지 않던 북측 인사들이 부리나케 우리를 찾기 시작했다. 김정일 위원장의 위세를 실감할 수 있었다.
오찬에는 양측 인사 70여 명이 참석했다. 남북한 핵심 수뇌부가 모두 모인 그 자리는 잊지 못할 광경이었다. 특히 북측의 조명록 국방위 부위원장 등 군 최고 인사들과 대남 관계를 총괄하던 김용순 비서, 김정일 위원장의 매부 장성택, 1994년 북핵 문제 대미 협상 수석대표 강석주 외교부 부부장 등이 눈에 띄었다.
이날 오찬은 그야말로 산해진미의 경연장을 방불케 했다. 이름도 들어본 적 없는 곰발통찜, 야자상어날개탕, 산삼주, 프랑스산 고급 포도주 등 놀라운 요리와 술들이 이어졌다.
다른 연회처럼 각 테이블별로 북측 참석자들이 돌아가며 독주를 권했다. 정상들이 참석한 연회에서 드믄 광경이었다. 나도 40도가 넘는 산삼 주를 6잔이나 마셨다. 점심 때 건배주로 그 독한 산삼 주를 그만큼 마셨으니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랴.
문득 키신저 전 미 국무장관의 자서전 『나의 백악관 시절』의 한 대목이 생각났다. 닉슨 대통령이 1972년 2월 중국을 방문하며 겪은 중국인의 음주문화에 대한 내용이었는데, 김정일 위원장 주최 오찬에서 겪은 북한의 음주문화가 이와 거의 비슷했다. 키신저는 이렇게 적었다.

“끝없는 축배가 계속되었다. 우리는 마오타이주를 마셨다. 이 술은 너무 독해 비행기 연료로 사용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중략) 테이블에 둘러앉은 모든 중국 지도자들은 반드시 미국 측 인사들과 축배를 하고 나서야 술을 들었다. 그들은 유쾌하게 ‘건배!’를 외친 후 술을 마셨는데 ‘건배’는 문자 그대로 ‘잔을 비운다’는 뜻이었다. 건배를 제의한 이는 잔을 비운 후 실제로 이를 상대방에게 보여 일일이 확인시켜 주었다. 이는 상대방을 부끄럽게 만들어 같이 따라 잔을 비우게 하는 효과가 있었다. 연회에 참석한 중국 관리들은 우리보다 두 배나 많았고 자기 나라 술에 이미 익숙한 터라 축배는 만찬 때마다 더욱 늘어갔다.”

김정일 위원장에 대한 신변경호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철저했다. 6월 13일 김대중 대통령을 비롯한 우리 측 일행이 도착하던 날, 나는 공항에 가지 못했다. 백화원 초대소를 지켜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이 백화원 초대소에 도착할 즈음 갑자기 완전 무장한 북측 위병들이 나타나 나를 방에서 나오지 못하도록 했다. 대통령 일행을 맞이해야 한다고 항의했지만 소용없었다. 한 위병이 방에서 나오지 말라고 하더니 막무가내로 나를 방안에 밀어 넣었다. 그런 후 문을 닫고는 아예 문 앞을 지키고 서 있는 것이 아닌가. 주변의 모든 문 앞에서 똑같은 상황이 벌어졌다. 결국 나는 우리 대표단 일행이 도착한 후에야 방에서 나올 수 있었다.
6월 14일 오후 개최된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 간 단독 정상회담에 이르는 과정도 예외는 아니었다. 대통령 일행은 오전 북측 공연을 관람하고 옥류관에서 점심을 하고 있었는데 북측으로부터 점심을 마치는 대로 백화원 초대소로 돌아와 달라는 전갈이 왔다. 북한은 그때까지도 우리에게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 간 회담이 언제 시작되는지 알려주지 않고 있었다. 다만 비어있는 시간대로 대략 예상만 하고 있던 우리는 드디어 일전의 순간이 왔음을 감지하고 정신을 가다듬었다.
예상했던 대로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 간의 회담은 그날 오후 백화원 초대소에서 개최되었다. 우리 측 2명(임동원 국정원장, 이기호 경제수석), 북측 1명(김용순 노동당 비서)만이 배석자로 참석했다.
회담장 밖으로 가끔 김정일 위원장의 쩌렁쩌렁한 음성이 들려왔다. 나는 당시 김정일 위원장이 대범하고, 솔직하며, 대내외 정세에 밝다는 느낌을 받았다. 중간 휴식 시간에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은 서울에서 긴급 수송되어 회담장 밖 테이블위에 펼쳐 놓은 국내 신문들을 함께 보았는데 김정일 위원장이 ≪서울신문≫을 보고 “이 신문이 전엔 ≪대한매일신문≫이 아니었느냐.”라고 물었다. 그만큼 그는 우리 내부 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
회담 중 김정일 위원장은 자신들을 겨누지만 않는다면 중국과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주한 미군이 한반도에 주둔할 필요가 있다고 말해 김대중 대통령을 놀라게 했다. 또한 그는 “구 정치인들을 깜짝 놀라게 하자.”, “김 대통령을 통일 대통령으로 만들자.”라는 말도 했다고 한다.

남과 북의 자화상
길지 않은 평양 여행에서 나는 우리가 처한 한반도 현실에 대해 두 가지를 새삼스레 깨달았다. 첫째는 북한 경제가 생각보다 훨씬 낙후되어 우리가 많이 도와주어야겠다는 점이다. 주마간산 격이었지만 내가 본 북한의 생활상은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우리의 1960년대 초를 생각하면 그 궁핍함이 어느 정도인지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때 내가 다니던 시골 초등학교에서는 미국이 원조해준 옥수수 빵을 나눠 주곤 했다. 그때처럼 북한 주민들은 우리와 국제사회가 준 식량으로 근근이 살아가고 있었다.
북한 주민들은 여전히 사회주의 계획경제시대 의식 속에 살고 있었다. 한마디로 경쟁을 몰랐다. 함께 간 동료는 한 북한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고 전했다.

“왜 남조선 사람들은 출퇴근하느라고 몇 시간씩 고생을 합니까? 우리 공화국 사람들은 국가가 직장 가까운 곳에 거처를 마련해 주어 걸어 다닙니다.”

세계는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데 북한의 인식은 이처럼 뒤처져 있었다. 이는 우리가 지향하는 통일,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체제의 통일로 가는 데 넘어야할 높은 산으로 생각되었다. 북한 주민들이 바깥세상을 알게 하고 스스로 살아갈 수 있게 도와주는 것, 자본·기술 등 다양한 지원을 통해 북한 경제를 일정 수준으로 향상시키는 것. 이런 것들이 고통을 줄이면서 평화적으로 통일하기 위해서 시간이 걸리더라도 사전에 풀어야할 과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또 하나 느낀 점은 한반도는 우리나 북이나 모든 면에서 외세의 영향을 강하게 받을 수밖에 없는 운명을 가졌다는 점이다. 우리가 정치, 경제는 물론이고 생활 전반에 걸쳐 미국의 강력한 영향을 받고 있다는 점을 아무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이제까지 우리 안보는 한미동맹이 지탱해 주고 있고, 미국의 투자와 시장이 없었다면 유례없던 경제성장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또한 우리의 음악, 영화 등 대중문화도 많이 미국화 되어 있다. 일상 대화에 영어를 자연스럽게 쓰고 있고, 영어가 없는 잡지, 간판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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