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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인문학 > 문화/문화이론 > 문화사
· ISBN : 9788970595702
· 쪽수 : 272쪽
책 소개
목차
서문
기호의 제국
글씨의 제국
모순의 풍경
Faith and Finance
글씨와 산업의 풍경
역사와 미디어
냉전의 기호학
사라진 풍경 1
중국의 뒷모습
마오 주석이 가리키는 곳
에일리언의 징후
사물들의 기묘한 동거
근대의 마지막 교훈
합성현실로의 여행
지워지는 기호의 기호학
밀도와 고도
인공자연의 생명감
아파트는 획일적이지 않다
밀도와 고도
주름진 공간과 매끈한 공간
고딕의 욕망
우리 시대의 바벨탑
북한산의 변전: 자연경관-역사경관-도시경관
동대문이라는 랜드마크
마을을 지키는 당산나무
사라진 풍경 2
밀도의 사물들
삶의 밀도와 죽음의 밀도
교통의 밀도
도시의 삭막미
철탑이 지배하는 풍경
선원근법에서 탈락한 풍경
복잡계 1
복잡계 2
희박한 밀도 속에 감춰진 근원적 풍경
콘크리트의 격
현대의 신전
콘크리트에도 격이 있다
트라우마의 건축물
생성의 순간
콘크리트의 아름다움 1
괴물, 영화로 나타나고 콘크리트로 나타나다
포토제닉 콘크리트
진정한 노출콘크리트
세월이 쌓아놓은 아우라
콘크리트의 아름다움 2
식민의 건축
콘크리트의 존재론들
죽음의 건축
콘크리트의 자연화, 자연의 콘크리트화
에필로그
저자소개
리뷰
책속에서
서울이라는 도시에서 건물과 사람들이 사라지는 속도와 양상은 가히 재난급이다. 이 책 『초조한 도시』의 사진에 나오는 건물과 광경 중 상당수는 그 사진을 찍은 후 몇 달 후에 사라진 것들이 많다. 아마 한국전쟁 때 서울이 파괴되고 사라진 속도와 양상보다 1970년대에서 2000년대를 거쳐 오면서 변하고 사라진 정도가 훨씬 크고 많지 않을까 싶다. 한국에서의 도시 변화의 속도와 양상을 재난급이라고 하는 이유는 변화의 속도와 양상이 사람들이 오랜 세월 살면서 쌓아 온 삶의 직조와 기억과 습관을 한순간에 없애 버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요인도 하나가 아니라 아주 많고 다양하다. 예를 들어 을지로의 국도극장은 일제시대에 지어진 멋진 건물로서 내부가 대리석으로 장식되어 있고 나름 고졸한 분위기를 풍기는 것이었는데, 사적지로 정해지기 직전에
건물주가 헐어 버렸다. 사적지가 되면 재산권을 행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충무로의 스카라 극장도 같은 이유로 허물어져 버렸다. 이것을 재난이라고 부른다면 그것을 일으킨 주체는 사적지라는 공공재산과 사유재산권 사이의 갈등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런 재난은 아마도 기억의 재난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이 빨리 사라지는 한국의 도시에서는 기억의 재난에 대한 사후 대책이 필요하다. 건물과 사람과 기억 등 모든 것들을 폭력적으로 밀어낸 후 그 빈 자리의 공허를 메워 줄 어떤 의식(儀式)을 필요로 한다. 오늘날 그 의식은 '사진 찍기'이다. 설령 옛날에 사진기가 있었더라도 과거에는 거리의 건물들을 사진으로 찍을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세상이 바로바로 사진으로 찍어서 남겨 놔야 할 만큼 빨리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땅이 꺼지고 빌딩이 솟아나는 영화에서처럼 도시가 급격히 변화를 겪는 오늘날에는 사진 찍기라는 의식이 없다면 도시의 기억을 보존할 길도 없을 것이다.
한강에 있는 다리들 중에서 유일한 잠수교인 반포대교의 하단은 상층부 콘크리트 구조의 밑부분이 천장을 이루고 있어서 독특한 분위기를 풍긴다. 빽빽이 밀려 있는 차들과 촘촘히 늘어선 콘크리트 기둥들, 그리고 천장의 보들이 이 이상 밀도 있는 도시는 있을 수 없다는 듯 서로 경쟁하고 있다. 특히 한강 유람선이 지나갈 수 있도록 다리가 불룩 올라온 부분을 '낙타봉 구간'이라고 부르는 것 같은데, 덕분에 러시아워에 차들이 밀려 있는 모습을 좀 더 생생하게 찍을 수 있었다.
이 책에 실린 사진들 속의 모습은 너무도 빨리 변하는 한국의 속도 때문에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는 것들이 많은데, 다음 장에 나오는 장면도 그렇다. 잠수교 차선의 왼쪽 반은 이제 시민들의 통행로로 바뀌었다. 차선이 반으로 줄었기 때문에 이 사진 속의 모습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이 사진을 찍은 것이 2007년 5월 19일인데, 불과 2년여 만에 이 사진은 역사가 되어 버렸다. 역사를 만드는 것은 역사가의 기술도 아니고, 역사적 자료가 쌓여 있는 아카이브도 아니다. 역사를 만드는 것은 가차 없이 흐르는 세월 그 자체이다. 잔뜩 밀려서 느릿느릿 진행하는 차 속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시간이 왜 이렇게 안 가냐고 한숨을 쉬겠지만, 그들이 모르는 사이에 잠수교는 빠른 속도로 그 형태를 바꾸며 역사가 되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