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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역사 > 유럽사 > 독일/오스트리아사
· ISBN : 9788971996201
· 쪽수 : 376쪽
· 출판일 : 2014-10-01
책 소개
목차
머리말 4
프롤로그 11
혁명 121
작별 225
후기 359
옮긴이의 말 374
리뷰
책속에서
다음 날 아침 누가 나를 깨웠을 땐 벌써 짐 싸기가 한창이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처음에는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며칠 전에 사람들이 나한테 설명해주었지만 ‘동원령’이란 말은 나한테 아무 의미가 없었다. 하지만 이제 나한테 뭔가 더 설명해줄 시간도 없었다. 짐을 다 싸서 정오에는 출발해야 했다. 그다음에는 기차가 계속 다닐지 확실치 않았다. 유능한 우리 집 하녀가 말했다. “오늘은 영점오로 가야 해.” 그게 무슨 뜻인지 지금도 아리송하지만 어쨌든 모든 게 어수선하기 짝이 없고 누구나 각자 알아서 챙겨야 한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그래서 내가 눈에 띄지 않게 빠져나와 숲으로 달려갈 수도 있었다. 출발하기 바로 전에 사람들이 간신히 나를 찾아냈다. 나는 나뭇등걸 위에 앉아 얼굴을 손에 묻은 채 엉엉 울면서 이제 전쟁이니 모두 나름대로 희생해야 한다는 말 따위는 전혀 들으려 하지 않았다. 나는 어찌어찌 마차에 실려, 이미 떠난 한스와 바흐텔은 아니었지만 타닥타닥 속보로 달리는 갈색 말 두 마리를 따라 떠났다. 우리 뒤로 먼지구름이 일어 모든 것을 덮어버렸다. 나는 내 어린 시절의 숲을 다시는 보지 못했다.
- 본문 23~24쪽(1부. 프롤로그)
그해 3월 내내 그랬듯 무척 따뜻하고 화창한 봄날이었다. 맑디맑은 하늘 한조각 구름 아래 송진 향기가 나는 소나무 사이 이끼가 덮인 풀 위에 앉아, 우리는 영화에 나오는 연인들처럼 입을 맞췄다. 평온한 세상에는 봄기운이 가득했다. 한두 시간쯤 거기 앉아 있었을까, 전교생이 소풍이라도 가는 날인지 10분마다 학생들이 무리지어 지나갔다. 양떼를 성실하게 지키는 목자 같은 선생님이라면 으레 그러듯 콧수염이나 턱수염을 기른 지도교사가 개구지고 귀여운 남자애들을 이끌고 갔다. 숲길에서 만났을 때 이 학생들은 우리를 지나면서 가벼운 인사말을 던지듯 쾌활하고 카랑카랑한 아이들 목소리로 입을 모아 외쳤다.
“유대인 뒈져라!”
어쩌면 꼭 우리를 겨냥한 말이 아닐 수도 있었다. 나는 유대인처럼 보이지 않고 찰리도 유대인치고는 별로 유대인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냥 아무 악의도 없는 인사말이었을 수도 있었다. 모르겠다. 어쩌면 정말 우리를 향해 도발하는 말일 수도 있었다.
내가 자그마하고 사랑스럽고 발랄한 여자를 품에 안고 ‘봄 언덕 위에’ 앉아 어루만지고 입 맞추는 동안 천진한 아이들이 지나가면서 우리한테 뒈지라고 요구했다. 우리는 그러지 않았고 그 아이들도 우리가 뒈지지 않는 데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걸어갔다.
초현실적인 풍경.
- 본문 179~180쪽(2부. 혁명)
갈색 제복을 입은 사람 하나가 다가와서 내 앞에 버티고 섰다.
“당신은 아리아인이오?”
미처 생각할 틈도 없이 대답했다.
“예.”
그는 내 코를 유심히 살펴보더니 물러났다. 하지만 나는 온몸의 피가 얼굴에 쏠리는 듯했다. 나는 수치와 패배를 한 박자 늦게 비로소 감지했다. “예”라고 대답하다니! 물론 나는 맹세코 ‘아리아인’이다. 거짓말을 하진 않았다. 하지만 훨씬 더 끔찍한 짓을 저질렀다.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이 물어보는데 나는 아리아인이라고, 평소에는 별 의미도 없던 사실을 마치 기다렸다는 듯 냉큼 대답하다니, 어찌나 굴욕적인지. 그렇게 대답함으로써 사건 서류에 몰두할 수 있게 타협하다니, 어찌나 부끄러운지! 벌써 이렇게 휘둘리다니! 첫 관문에서부터 잘못하다니! 스스로 뺨이라도 갈기고 싶었다.
법원에서 나올 때 잿빛 법원 건물은 늘 그렇듯 거리에서 좀 떨어져 잔디밭과 나무들 뒤에 냉정하고 여유롭게 서 있었다. 하나의 제도로서 사법부가 방금 무너졌다는 것은 결코 알아챌 수 없었다. 아마 나한테서도 내가 방금 거의 회복할 수 없을 치욕을 겪고 상처를 받았다는 사실을 알아챌 수 없으리라. 그저 말쑥하게 차려입은 젊은 남자가 포츠담 거리를 조용히 걸어가고 있을 뿐. 거리에서는 아무것도 눈치챌 수 없었다. 평소와 똑같았다. 하지만 공기 속에는 뭔지 모를 일들이 천둥처럼 다가오고 있었다…….
- 본문 186~187쪽(2부. 혁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