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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
· ISBN : 9788972754954
· 쪽수 : 372쪽
책 소개
목차
1장 길을 가다가 잃어버린 길 09
2장 방황하는 넋 205
3장 너의 길, 나의 길 319
작가의 말 369
저자소개
책속에서
“길을 잃어버렸다고요?” 하고 재차 물으며 그녀의 두 눈을 들여다보았다. 호수처럼 깊었다. 이 여자가 잃어버린 길이란 무엇인가. 석가모니가 평생 맨발로 걸어 다녔다는 ‘길 아닌 길’을 말하는 것인가. 이 여자는 형이상학적인 길 찾기를 하고 있다는 것인가 뭔가……. 하긴 대개의 사람들은 길 위에서 길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있다. 사실은 나도 그러한 사람 가운데 하나일 터이다. 그렇다면 이 여자는 시인인가. 화엄경 속의 선재 소년처럼 선지자들을 찾아다니는 것인가. 시인이 아니라면, 문학적인 감수성이 탁월한 것처럼 건방을 떨고 있는, 시쳇말로 살짝 돈 여자인 것인가.
아니다, 사실은 나야말로 길을 확실하게 잃어버린 것인데, 이 여자는 내 앞에서 길을 잃어버렸다고 말을 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 길을 찾게 해주려는 천수천암관음보살의 화신 아닐까.
그녀는 가볍게 그어진 쌍꺼풀과 기다란 속눈썹 아래의 짙푸른 심연처럼 깊은 눈으로 그의 시선을 빨아들이면서 하소연하듯이 말했다.
“선생님, 혼자 여행하시는 모양인데, 심심하지 않게…… 갈 길을 잃어버린 저를 데리고 다니세요.”
그는 당혹했다. 간단한 여행 차림을 한 그녀의 존재가 감당하기 거북스러운 거대한 부피와 무게로 가슴을 누르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를 끌어당기는 알 수 없는 고혹적인 구석이 있었다. 길을 잃었다는 이 여자야말로, 나에게 나의 참다운 일을 가르쳐줄지도 모른다.
침대 머리맡의 이불자락을 들어 올렸다. 그녀의 알몸이 하얗게 드러났다. 그녀는 반듯하게 누운 채 눈을 감고 있었다. 네온사인 빛을 받은 그녀의 몸은 아름답게 빚어놓은 석고상이었다. 신이 만들어놓은 하나의 작은 우주였다. 그는 그녀의 흰 우주 앞에서 몸을 떨었다. 이 일이 어떤 일인데, 이 아이는 스스로의 모든 것을 열어놓고 있단 말인가. 누구에게인가 이미 제 모든 것을 이렇게 열어준 적이 있는 아이 아닐까. 아마 틀림없이 그럴 것이다. 아니다. 그럴 리 없다. 너무 순수하기 때문에 남자와의 깊은 만남이 어떤 일인지를 모르고 있는 것이다. 전율이 온몸을 덮었다. 목과 입안에 혀가 바싹 밭았고, 가슴이 우둔거렸다. 좌절과 절망과 소외와 고독이 이 아이를 이렇게 만들고 있는 것 아닐까. 그렇다면 오래지 않아, 지금 자기가 한 일을 후회하게 되고, 더욱 혹독한 좌절과 절망과 소외와 고독 속으로 빠져들 것이다. 그러면 나에게 모든 것을 기대려 할지도 모른다. 그러는 이 아이의 몸속에서 알 수 없는, 나에 대한 혹독한 배반의 씨가 싹터 날지도 모른다. 그 배반의 씨가 이 아이와 나를 동시에 파멸시킬 것이다. 그녀의 알몸이 거대한 불가사의의 바윗덩이로 다가왔다. 그의 남성은 움츠러들었다.
“그 아이한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 아이가 쓰고 싶어 하다가 쓰지 못한 그 소설들을 써주는 일이었어요. 그래서 소설을 한 편 썼는데 그게 영화로 만들어졌어요. 원작료를 듬뿍 받았어요. 그런데, 죽어간 그 아이의 아픈 사랑과 순백의 영혼을 팔아 나 혼자만 호의호식하고 있는 것 같고, ‘나 살고 있는 이게 무어냐’ 죄 짓고 나서, 서재에 파묻혀 거짓 글쓰기에만 몰두하는 내 인생이 알곡 떨어내고 난 지푸라기처럼 푸석푸석하게 느껴져서 이렇게 길을 나섰어요. 나 지금, 그 아이하고 함께 다녔던 그 바닷가 마을, 그 항구들, 포구들, 함께 먹었던 음식들을 먹으면서 참회 여행을 하고 있는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