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o
logo
x
바코드검색
BOOKPRICE.co.kr
책, 도서 가격비교 사이트
바코드검색

인기 검색어

실시간 검색어

검색가능 서점

도서목록 제공

근현대 한의학 인물 실록

근현대 한의학 인물 실록

김남일 (지은이)
들녘
19,000원

일반도서

검색중
서점 할인가 할인률 배송비 혜택/추가 실질최저가 구매하기
알라딘 로딩중
yes24 로딩중
교보문고 로딩중
11st 로딩중
영풍문고 로딩중
쿠팡 로딩중
쿠팡로켓 로딩중
G마켓 로딩중
notice_icon 검색 결과 내에 다른 책이 포함되어 있을 수 있습니다.

중고도서

검색중
서점 유형 등록개수 최저가 구매하기
로딩중

eBook

검색중
서점 정가 할인가 마일리지 실질최저가 구매하기
로딩중

책 이미지

근현대 한의학 인물 실록
eBook 미리보기

책 정보

· 제목 : 근현대 한의학 인물 실록 
· 분류 : 국내도서 > 역사 > 한국사 일반
· ISBN : 9788975279850
· 쪽수 : 516쪽
· 출판일 : 2011-10-18

책 소개

근현대시기에 활동한 어의, 교육자, 한의사 단체장, 학술지와 한의학 신문 창간자, 독립운동가 등 한의학 발전을 위해 헌신한 사람들을 소개하는 책이다. 소개된 인물들은 최초로 종두법을 도입한 지석영, 솔표 우황청심환을 만든 박성수처럼 익숙한 인물도 있지만, 의사학계 외부로는 알려진 적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목차

시작하는 말_ 근현대 한의학 인물들의 발자취를 더듬다 -6

1. 근현대 한의학 인물 개괄 -23

2. 고종, 순종 년간의 어의들 -31
임금을 감동케 한 뛰어난 치료술 -33
의서를 간행한 어의들 -45
민간 활동에 힘쓴 어의 홍재호 -50

3. 한의학 교육의 명맥을 이어가고자 분투한 인물들 -57
동제의학교의 설립과 폐교 -64
각종 의학강습소의 개설과 일제강점기의 교육활동 -75
해방 후 한의과대학의 설립과 발전 - 89

4. 한의사 단체의 구성과 활동 -125
대한의사총합소의 구성 -127
전선의생대회의 개최와 전선의회의 성립 -144
동서의학연구회 -154
동양의학협회 -173
대한한의사협회 -178
대한한의학회 -186
지역 및 재야 한의사 단체들의 각종 활동 -189

5. 한의학 학술지와 신문의 간행에 매진한 인물들 -207
최초의 한의학 학술잡지 『한방의약계』 -211
『동의보감』, 『동서의학보』, 『조선의학계』, 『동서의학연구회월보』 -218
지역지에서 중앙지로, 1935년 『충남의약』의 창간과 발전 -220
한의학 부흥을 위해 탄생한 학술지 『동양의약』 -225
“한의학의 신체계를 확립하자” 1947년 『동양의학』 창간호 -231
“행림계의 첫아이를 잘 기르자” 1954년에 창간된 『의림』 -234
“문화의 진보와 시대의 변천에 발맞추자” 『동양의약』의 창간과 전석붕의 포부 -237
1963년에 뿌려진 미래를 위한 씨앗, 『대한한의학회지』 -240
『행림』과 『한방의 벗』 -243
“학술연구의 광장이 되리” 1975년 『동양의학』 창간호 -248
서울시한의사회보, 1967년과 1979년 두 차례 나온 창간호 -251
<한의신문> -256
<한의신문> 창간의 공로자 이범성 -256
<민족의학신문> -258

6. 한의학 제도화를 위해 분투한 인물들 -259
한의학 교육의 기초를 다진 사람들, 팔가일지회의 활동 -261

7. 한의학 학술 진흥을 위해 노력한 인물들 -283
개항기 한국의 한의학을 빛낸 삼대의가 황도연, 이제마, 이규준 -285
일제강점기 침구학.상한론 연구, 해방 이후 의역학 연구의 경향 -288
경험방 수집 -302
일제강점기 의서 연구자들 -311
신학설의 창도자들 -324
학술적 정리를 꾀한 학자들 -340
학술단체의 구성과 활동 -358

8. 독립운동에 헌신한 인물들 -371
일제에 저항했던 한의사 노병희와 조종대 -373
일제에 저항했던 한의사 강우규와 심병조 -375
상의의국을 몸소 실천한 한의사 독립운동가 방주혁 -377
독립운동가로 조선무약을 창설한 한의사 박성수 -380

9. 왕성한 활동으로 한의학의 외연을 넓히고자 노력한 인물들 -383
서예와 미술 -385
배구계에서의 활약 - 391
대중매체와 출판 -394
약업계의 활약 -402
한의학의 국제화 -420
개인적 학술활동 -431
의료봉사 -445

10. 근현대 한의사 명의들 -449
한의사 집안을 이어간 인물들 -451
명의로 이름을 떨친 사람들 -476

책을 마치면서_ 이 책이 미래 연구의 초석이 되길 - 492
참고문헌 - 495
찾아보기 - 497

저자소개

김남일 (지은이)    정보 더보기
서울에서 태어났다. 경희대학교 한의학과를 졸업한 뒤 동대학원에서 석ㆍ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경희대학교 한의과대학 의사학교실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동의보감> 연구와 더불어 한국의학사, 중국의학사 등 동양의학사 연구에도 박차를 가하고 있다. 저서에 <근현대 한의학 인물실록> <한의학에 미친 조선의 지식인들> <한권으로 읽는 동의보감>, <한의학사>, <강좌 중국의학의 역사>가 있고, 편저로 <중국 침뜸의학의 역사>가 있다. <주역과 중국의학>, <의역학 사상>, <각가학설>, <고대 중국의학의 재발견> 등의 책을 우리말로 옮겼다.
펼치기

책속에서

1935년 간행된 『동양의약東洋醫藥』 창간호에는 다음과 같은 세 개의 소화笑話가 여백에 기록되어 있다.

① “어떤 사람이 여러 해 동안 여행을 하고 돌아오니 자기의 처가 그동안 자식을 셋이나 낳았다. 그 남자는 이런 괴이한 일이 어디에 있느냐고 그 처에게 ‘남편도 없는데 자식을 낳다니 웬일이오.’ 하며 힐문詰問을 한 즉 그 여자 하는 말이 ‘당신이 안 계시니 당신이 하도 보고 싶어서 너무너무 지극히 생각하니 그 생각이 맺혀서 저 애들이 났소. 큰놈은 원지遠志라고 하는데 이것은 먼 데 계신 당신을 생각하고 생각했기 때문이오. 둘째 놈은 당귀當歸라고 하는데 이것은 당신이 하루바삐 돌아오시기를 늘 생각했기 때문이오. 그다음 놈은 회향茴鄕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당신이 정말 집에 돌아오시는 것을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니 얼빠진 놈처럼 듣고 있던 남편이 하는 말이, ‘만일 내가 또 한 번 더 오래 여행하고 돌아오면 그때는 건재방乾材房을 시작하게 되겠군.’”
② “재왕財旺을 조금도 띄지 못한 지극히 빈곤한 한의漢醫가 있었다. 재수財數있는 의가醫家에게는 병자가 노두열미勞頭熱尾로 잘 나을 사람만 찾아온다더니 마는 이 의가에는 그와 반대로 노말열두勞末熱頭만 찾아와서 도무지 치료성적이 양호치 못했던 모양이다. 거기에 어떤 사람이 문약問藥하러 왔다 약장 되백이를 빼 보니 온통 벌레 천지다. 그 사람이 어이없어 ‘이게 모두 뭐요?’ 물으니, 의원 말이 ‘그것? 백강잠이오.’라고 하니, 객이 ‘말린 누에가 어떻게 살아 있소?’ 하고 물었다. 그러자 의사가 대답하기를 ‘내 약이 워낙 명약이니까 그놈들이 모두 그 약의 신효를 보고 소생된 것이 아니오?’라고 했다.”
③ “의학을 수업하는 자가 있었다. 묘한 치료방법을 들으면 반드시 필기를 하는데 한번은 길을 가다가 도적놈을 만나서 삼림 속에 숨어서 보고 있으니까 여러 놈의 도적이 모여서 토산불(대고환大睾丸)을 가진 놈을 하나 참살을 하는데 목이 떨어지니까 그 큰 고환睾丸이 쑥 쭈그러들어 갔다. 그 친구 곧 필기하되 대고환 치료治療 경험방經驗方이라고.”(이상 세 글은 필자가 임의대로 손질을 가함.)
위의 세 소화笑話는 자칫 딱딱하게 비칠 수도 있는 학술잡지를 여유롭게 즐기면서 볼 수 있도록 여백에 채워놓은 우스운 이야기들이다. 이 글이 실려 있는 『동양의약』은 1935년 한의사 단체인 동서의학연구회에서 간행한 한의학 학술잡지이다. 발행기관은 경성의 동양의약사이며, 편집 겸 발행인은 조헌영이었다.
이 잡지가 나올 무렵인 1934년은 한의계에서는 중요한 역사적 시기였다. <조선일보>를 통해 한의학 부흥에 대한 논쟁이 벌어진 것이다. 조헌영趙憲泳, 장기무張基茂, 정근양鄭槿陽, 이을호李乙浩 등에 의해 이어진 이 논쟁은 한의학 부흥에 대한 전 사회적 관심을 불러일으켜 한의가韓醫家들을 고무시켰다.
이 잡지의 창간사에서는 “동양의학의 현대화, 동양의학의 민중화, 동양의학의 학술적 발전” 이 세 가지를 실현하기 위해 본 잡지가 노력할 것임을 천명하고 있다. 비장한 어조로 이러한 시대적 책무를 실현하기 위해 창간되었음을 표방한 이 잡지의 한 쪽에 위와 같은 농을 기록해 놓은 것이다.
이 소화들은 단순히 웃고 넘기기 어려운 학문적 깊이를 느끼게 해준다. 첫 번째 이야기는 약물의 이름을 부인이 낳은 사생아의 이름에 빗대어 놓음으로써 약물 명칭의 학술적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 두 번째 이야기는 약물 속에 있는 벌레를 환자에게 백강잠白?蠶(누에를 말함)이라고 속이고 넘어가려는 어느 가난한 한의사의 이야기로, 중심의료에서 주변부로 내몰린 한의사들의 처지를 빗대어 표현한 것이 아닌가 한다. 세 번째 이야기는 경험방을 선별할 줄 모르는 분별없는 한의사를 해학적으로 그린 것으로 한의학의 정체성 확립과 치료경험에 대한 수집 등 그동안 진행해 왔던 한의계 현안 문제를 역설적인 농담으로 강조하고 있다.
이렇듯 1935년에 나온 『동양의약』의 소화는 투쟁, 슬픔, 굴복 등의 단어를 떠올리게 하는 일제강점기 한의학의 고정된 이미지를 깨고 카타르시스를 제공해준다.
_일제강점기 『동양의약』에 나오는 한의학 소화


19세기 말 20세기 초는 엽서의 시대이다. 엽서가 유행한 건 엽서 앞면에 있는 이미지 때문이기도 하다. 이 이미지는 사진사와 화가의 시각 혹은 그 작품을 의뢰한 사람의 의도를 드러내 주기 때문에 시대 코드를 읽어 낼 수 있는 거울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엽서에 나오는 이미지와 설명문을 통해 시대적 상황과 제작자의 의도를 읽어 낼 수 있다.
최근 몇 년 사이에 연구서가 많이 나와서 엽서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커지고 있다. 부산근대역사관에서 만든 『사진엽서로 떠나는 근대 기행(The Journey to the Modernity)』, 권혁희의 『조선에서 온 사진엽서』 등은 그러한 관심을 반영한 저작들 이다.
일제강점기에는 엽서가 많이 만들어졌다. 엽서가 다룬 대상은 풍속, 유물, 인물, 유적, 사건 등 다양하다. 특히, 일제의 조선침략 이후 조선개발을 대대적으로 선전하기 위해 박람회를 열고 안내 팸플릿과 엽서를 만들면서 조선 침략을 미화하는 전략에 철저하게 엽서를 이용했다.
그뿐만 아니라 조선에 대한 왜곡된 시각을 심어줄 수 있는 풍속관련 엽서를 계속해서 만들어냈다. 젖가슴을 드러낸 여자, 무식하고 피폐한 조선 민중의 이미지, 옛날 서당과 신교육 시설을 대비하여 놓은 이미지, 무당과 주술, 각종 기생관련 이미지 등이 그것이다. 특히 기생관련 엽서는 수백 종에 이른다. 이들은 기생의 이미지를 활용하여 조선을 환락과 간음의 땅으로 외국에 소개하려 했다. 외국에 조선에 대한 왜곡된 타자의 모습을 전달하기 위해서였다.
필자가 지난 몇 년간 수집한 일제강점기 엽서 가운데 두 장을 소개하려고 한다. 하나는 한국의 인삼에 대한 삽화가 담긴 그림엽서이고 다른 하나는 일제강점기 한약국 앞에서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담은 사진엽서이다.
첫 번째 인삼 관련 엽서는 일제강점기 제국주의의 시선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황당하다. 조선 인삼도 아니고 ‘고려인삼’이라고 써놓고선 ‘人蔘’이란 단어도 ‘人三’이라고 써놓았다. 인삼으로 상징되는 조선의 이미지를 구기려고 ‘고려高麗’라는 말을 첨가하고 ‘인삼’도 ‘人三’이라고 하여 인삼의 영적 이미지를 상쇄시키고자 한 것 같다. 전체적인 의미를 따지지 않고 읽으면 “고려시대 사람 셋(高麗人三)”이 되고 만다.
인삼 위에는 어떤 제약회사의 로고인지는 모르지만 세 명의 인물이 팔뚝을 올리고 체조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체조하는 인물들의 팔 끝은 아래를 향하고 있다. 체조를 하면서조차 독립만세를 부르는 것처럼 보일까 봐 몸을 사리는 듯한 조선인의 모습을 희화화한 것 같다.
게다가 인삼 앞에 모델처럼 서 있는 사람은 기생처럼 보이는 여성이다. 무슨 일인지 몰라도 상당히 요염한 자태로 서 있다. 게다가 기댄 오른손 아래에는 서양의학을 표상하는 십자가 그림이 그려 있는 양약장이 있다. 몸 뒤로는 동백나무가 서 있는 모습이 보인다. 일본에는 동백이 전염병을 퇴치한다는 속설이 있다. 이러한 그림을 통해 도대체 무엇을 우리에게 일깨워주려는 것인가? 전통의학인 한의학을 등지고 일본으로부터 들여온 서양의학에 기대어 안락함을 영위하자는 것인가?
두 번째 아이들이 노는 장면을 묘사한 사진엽서도 보는 이들을 현혹한다. 필자만 해도 이 사진을 기만 원이 넘는 돈을 주고 샀는데 이는 배경에 있는 ‘건재국乾材局’, ‘생당약포生堂藥?’라는 글자 때문이었다.
이 엽서에 관심 있는 사람들의 글을 찾아보니 관심사가 오히려 사진 모델인, 놀이하는 아이들인 모양이다. 실제로 일본사람이 쓴 엽서의 제목을 보니 영어로는 ‘Playing of girls’, 일본말로는 ‘少女板飛逾び’이라고 쓰여 있다. 즉 번역하면 “소녀들이 널빤지 위에서 뛰면서 놂”이다.
이 이미지대로 본다면 한의학의 공간은 여자 어린이들이 문 앞에서 널뛰기나 하는 공간으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간판 주변은 조선의 멸망과 함께 퇴락하는 조선의 전통을 상징하는 금가고 떨어져 나간 벽면이 자 리하고 있다. 어린 아이들은 한약국으로 상징되는 전통 안에서 놀면서 안락을 느끼고 외부의 핍박이 오면 언제든지 전통 속으로 도망갈 것처럼 보인다. 아니면 전통의학의 몰락과 함께 이러한 공간도 사라져 이들은 다른 안락한 공간을 찾아야 할 운명인지도 모른다.
일제강점기 만들어진 엽서를 통해 의도적으로 왜곡된 시선을 한국인들에게 투사한 제국주의적 의도를 제대로 읽어 내어 그 뿌리부터 극복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왜곡된 시선이 지금까지 이어지는 것은 아닌지 반성할 필요가 있다.
_일제강점기에 나온 두 장의 엽서


『의림』 제31호의 뒷부분을 훑어보다가 우연히 ‘우리나라의 원로대가元老大家를 찾아서’ 라는 소개의 글에서 “방주혁方周赫”이라는 인물을 접하게 되었다. 이 글의 앞부분에서는 방주혁(1880~1969)을 돋움체의 글씨로 “무언중無言中에 행行하고 행한 후에 명예와 영화의 대가를 바라지 않는 의가정치인이며 애국투사이다.”라고 평가하고 있다. “의가정치인醫家政治人”과 “애국투사愛國鬪士”는 그를 이해하는 키워드로 제시되어 있다.
그가 왜 의가정치인인가는 <동아일보> 1949년 10월 22일 자 기사를 통해서 알 수 있다. 이 기록에는 그가 김효석, 윤보선, 허정, 장기영, 김도연, 백상규, 윤병호, 김시현 등과 함께 민주국민당의 고문으로 추대되었다고 나와 있다. 민주국민당은 1949년에 한국독립당 계열인 대한국민회의의 신익희, 대동청년단의 지청천, 그리고 김성수, 백남훈 등을 초대 최고위원으로 하여 창당한 정당이었다.
호가 송운松雲인 방주혁은 경남 합천 태생으로 의가醫家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선친은 널리 이름을 떨친 명의였다. 방주혁은 가문의 전통을 이어 “주류천하대환영周流天下大歡迎, 흥국흥가세불경興國興家勢不輕”이라는 문구를 가슴에 새기고 전통의학자의 길에 들어섰다. 22세까지 사서삼경과 의서를 완전히 수학하고 서울로 가 의술을 펼쳤고, 구한말 28세가 되던 해에는 사직참봉社稷參奉이란 벼슬에 올랐다. 그의 능력을 눈여겨 보아온 이유승李裕承 판서判書의 추천으로 시종관侍從官으로 내정되는데, 그 사이 한일합방이 되어 관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그는 궁중에서 고종의 형인 운현궁雲峴宮 흥친왕興親王 이희李熹의 시의侍醫로 있으면서 이희와 가까워졌다. 이희와 방주혁은 경술국치 이후에 만나, 아무 말 없이 함께 눈물만 흘리고 헤어질 정도로 아픔을 함께 나누는 막역한 사이였다고 한다.
경술국치 이후에는 민족독립을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3·1운동 시기에 천도교의 창립자이자 3·1운동의 주도자 손병희가 찾아와 천도교와 시천교를 통합시켜 독립운동을 위한 역량을 한데 모으는 데 도움을 달라고 부탁했다.
방주혁은 손병희와 함께 독립을 위해 헌신했다. 건국 후 초대 부통령을 지냈던 이시영이 국경도시에서 도움을 요청하는 밀정을 보냈을 때에도 위험을 무릅쓰고 독립자금을 맡겼다고 한다. 46세 이후에는 독립운동에 참여코자 수차례 자진해서 중국에 들어가 망명정부 동지들을 만나기도 했다. 이 때문에 그는 일제로부터 요주의 인물로 지목당해 감찰을 당했다. 서울에 있는 자신의 집을 독립운동가들에게 제공하고 자신은 이보다 못한 집에 기거한 것도 유명한 일화이다.
해방 후 방주혁은 한의사로서도 의미 있는 활동을 많이 했다. 한의과대학의 설립과 한의사제도의 창립을 위한 활동이 그것이다. 1947년 행림학원이 만들어질 때 이사로 활동하여 한의과대학의 설립에 노력을 기울였다. 이러한 노력에 힘입어 이 대학은 나중에 동양의약대학을 거쳐 경희대학교 한의과대학으로 발전하게 된다. 부산 피난시절인 1951년에는 한의사제도를 만들고자 김영훈, 박호풍, 박성수 등과 함께 활발하게 활동하여 이를 관철해내는 데에도 큰 역할을 했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그는 서울시 화동 경기중학교 옆에 자도한의원慈道韓醫院을 개원하여 진료했다. 1961년에 나온 『의림』에는 방주혁이 83세의 나이에도 기골이 장대하며 아침 일찍부터 진료를 시작하여 저녁 9시까지 이어지는 진료에도 전혀 피곤을 느끼지 않는 것 같다고 묘사하고 있다.
이와 같은 후배 한의사들에게 본보기가 될 만한 이력 덕분에 그는 대한한의사협회의 고문으로 추대되어 만인의 존경을 받았다.
_상의의국을 몸소 실천한 한의사 독립운동가 방주혁


이 포스팅은 쿠팡 파트너스 활동의 일환으로,
이에 따른 일정액의 수수료를 제공받습니다.
이 포스팅은 제휴마케팅이 포함된 광고로 커미션을 지급 받습니다.
도서 DB 제공 : 알라딘 서점(www.aladin.co.kr)
최근 본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