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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역사소설 > 외국 역사소설
· ISBN : 9788976042125
· 쪽수 : 324쪽
· 출판일 : 2015-01-20
책 소개
목차
책속에서
마타하치는 기운 없이 몸을 일으키더니 다시 그 자리에 꿇어앉았다. 그에게 오스기는 무서운 어머니였다. 세상의 다른 어머니들 이상으로 다정하기도 했지만 조상님 얘기를 할 때면 머리를 들 수조차 없었다.
“하나도 숨김없이 말해 보거라. 너는 세키가하라 전투에 나간 후에 대체 무엇을 하며 지냈느냐? 내가 납득이 갈 때까지 상세히 말해 보거라.”
“말씀 드리겠습니다.”
마타하치도 숨길 생각은 없었다. 그는 친구인 무사시와 전장에서 낙오된 일, 그리고 이부키 산 근처에서 숨어 살던 일, 오코라는 연상의 여자에게 걸려들어 몇 년 동안 동거하면서 겪은 아픈 경험 등과 지금은 후회하고 있다는 사실을 숨김없이 모두 말했다. 그러고 나니 뱃속의 썩은 것들을 토해 낸 것처럼 마음이 가벼워졌다.
“흐흠…….”
곤 숙부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어처구니없는 녀석이군.”
노파도 혀를 차며 말했다.
“그래서 지금은 무얼 하고 있느냐? 옷차림을 보니 제대로 차려 입은 듯한데, 벼슬해서 녹이라도 좀 받고 있느냐?”
“네.”
마타하치는 얼떨결에 이렇게 대답했지만 들통 날 것이 두려워 이내 다시 말했다.
“아니, 벼슬은 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럼, 무얼 하고 있느냐?”
“검, 검술 같은 걸 가르치면서.”
“호오.”
노파는 그제야 마음이 다소 누그러진 것처럼 기분 좋게 물었다.
“안 돼요!”
아케미는 갑자기 몸을 앞으로 엎드리더니 소리쳤다.
“이 손 놓으세요.”
“그렇게 못 하겠다면?”
“싫어, 싫어요!”
비틀린 손목이 끊어질 듯 빨개졌지만 세이주로는 그래도 놓지 않았다. 이럴 때 교하치류의 병법을 사용했다면 아케미가 아무리 저항해도 소용이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지금의 세이주로는 여느 때와는 조금 달랐다. 언제나 자포자기해서 술을 퍼마시고 끈질기게 엉겨들었지만 오늘은 술에 취하지도 않은 채 상기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케미, 너는 나를 이렇게 만들어 놓고 지금 또 날 모욕하는 것이냐?”
“몰라요!”
아케미도 큰 소리로 말했다.
“이 손을 놓지 않으면 모두가 듣도록 소리를 지를 거예요.”
“질러 보아라! 여기는 안채에서 떨어져 있는데다가 아무도 오지 말라고 미리 일러두었으니까.”
“전 갈래요.”
“보낼 수 없다.”
“제 몸을 가지고 제가 가겠다는데 왜 그러세요?”
“네 어머니에게 물어보아라! 나는 네 몸값으로 오코에게 돈을 건네주었다.”
“어머니가 나를 팔았다고 해도 차라리 죽으면 죽었지, 싫어하는 남자에게는 가지 않을 거예요.”
“뭐라고?”
탁자를 덮었던 비단 요가 아케미의 얼굴에 씌워졌다. 그녀는 심장이 터질 듯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아무리 소리쳐 불러도 누구 하나 오지 않았다. 햇살이 희미하게 비치는 창호지에 소나무 그림자가 멀리서 들려오는 파도 소리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밖은 고즈넉한 겨울이었지만 인간사의 무정함과는 달리 어디선가 작은 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들려왔다.
얼마나 지났을까, 창호 안에서 아케미의 울음소리가 흘러나왔다. 한동안 아무런 기척도 나지 않는 듯하더니 누가 손톱으로 할퀴었는지 세이주로가 피가 나는 왼쪽 손등을 누르면서 창백한 얼굴을 들고 문밖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와 동시에 아케미가 문을 박차고 밖으로 달려 나갔다.
무사시는 수행자도 오르지 않는다는 와시가타케의 붉은 속살에 안겨 있었다. 디딜 곳을 찾던 발이 바위에 닿자 부서진 바위 조각들이 산기슭의 성긴 숲 속으로 굴러떨어지면서 그 소리가 까마득히 들려왔다. 백 척, 이백 척, 삼백 척, 하늘을 향해 올라가는 그의 모습이 점점 작아졌다. 하얀 구름이 다가와서 흩어질 때마다 그의 모습은 허공 위에 떠 있는 듯했고 와시 봉은 거인처럼 그의 행동을 초연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게가 바위에 들러붙어 있는 것처럼 구부 능선 근처에 매달려 있는 그는 조금이라도 손과 발이 느슨해지는 순간, 무너져 내리는 바윗돌과 함께 천 길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질 것이었다.
“후우.”
온몸으로 숨을 쉬었다. 산을 오를수록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정도로 숨을 쉬는 게 괴로운 무사시는 조금 오르고는 쉬어야 했다. 무의식중에 발밑을 내려다보니 신궁의 태곳적 숲에서부터 이스즈 강의 하얀 강줄기와 가미지神路, 아사마朝態, 마에前 산의 봉우리들, 도바鳥羽의 어촌, 이세의 넓은 바다까지가 모두 그의 아래에 있었다.
“구부 능선이다!”
가슴팍에서 물큰한 땀 냄새가 올라왔다. 무사시는 문득 어머니의 품에 머리를 파묻고 있는 듯한 도취감에 빠졌다. 산이 그인지, 그가 산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그대로 잠이 들고 싶다고 느낀 순간, 엄지발가락을 걸치고 있던 바위가 우르르 무너졌다. 그의 생명이 요동치며 무의식적으로 발을 디딜 만한 곳을 더듬었다. 숨 한 번 쉬는 것조차 이루 말할 수 없이 괴로웠다. 그것은 마치 검을 마주하고 죽느냐 죽이느냐 하는 호각지세의 대치와 흡사했다.
“저기다. 얼마 남지 않았다.”
무사시는 다시 산을 끌어안고 정상을 향해 손과 발을 움직였다. 여기서 주저앉을 나약한 의지와 체력이라면 장차 어느 순간이든 다른 무사에게 패할 것이 자명했다.
“빌어먹을.”
땀이 바위를 적셨다. 무사시는 자신이 흘린 땀에 몇 번이나 미끄러질 뻔했다. 그의 몸은 한 조각 구름처럼 물기를 흠뻑 머금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