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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역사 > 한국사 일반
· ISBN : 9788983946195
· 쪽수 : 364쪽
· 출판일 : 2010-08-30
책 소개
목차
1부 물과 고기의 만남(水魚之會)
김유신, ‘불쇼’로 김춘추의 발목을 잡다
장보고, 흥덕왕에게 ‘바다의 왕자’로 인정받다
광종, 쌍수를 들어 쌍기를 환영하다
정도전, 이성계의 병영 앞 소나무에 자작시를 새기다
신숙주, 수양대군과 함께 영락제의 능에 참배하다
정선, 이병연과 함께 금강산을 유람하다
2부 불과 얼음의 만남(氷火之會)
연개소문, 김춘추의 제의를 묵살하다
정지상, 김부식의 부탁을 거절하다
심의겸, 윤원형의 집에서 김효원을 만나다
정충신, 언가리에게 할 말을 다 하다
인현왕후, 장희빈의 종아리를 때리다
박정희, 김재규, 차지철, 전두환이 골프를 치다
3부 불과 나무의 만남(火木之會)
진성여왕, 김위홍의 손을 잡고 향가를 읊다
정난정, 기도 중이던 윤원형과 몰래 만나다
홍랑, 최경창을 찾아 한양에 잠입하다
이예순, 도를 찾아 오언관과 떠나다
나혜석, 최린과 함께 파리를 거닐다
박마리아, 뉴욕의 밤에 이기붕과 데이트하다
4부 산과 바다의 만남(山海之會)
서희, 거란의 병영 뜰에서 소손녕과 인사하다
왕식, 쿠빌라이를 만나러 양자강을 건너다
이제현, 만권당에서 조맹부에게 한 수 배우다
소현세자, 아담 샬에게서 십자가와 성서를 선물받다
김병연, 공허와 금강산에 올라 시를 겨루다
김대중과 김정일, 평양 공항에서 악수하다
5부 구름과 구름의 만남(雲雲之會)
공민왕, 신돈에게 맹세문을 써주다
남곤, 조광조에게 “소인”이라는 말을 듣다
명성황후, 김옥균의 밀담을 몰래 엿듣다
이광수, 안창호의 인도로 흥사단에 입단하다
이승만, 김구와 손을 잡고 투쟁에 나서다
김대중과 김영삼, 은단 몇 알을 나누고 각자의 길로 떠나다
저자소개
리뷰
책속에서
다음 날, 정도전이 들뜬 마음으로 돌아가는 길을 재촉하려는데, 문득 병영 앞에 서 있는 장대한 소나무가 눈에 띄었다. 어제 그 둘레를 돌며 병영을 내려다보았던 바로 그 소나무였다. 정도전은 소나무를 한동안 바라보다가, 품에서 작은 칼을 꺼내 소나무 껍질을 벗겨내기 시작했다.
작업은 쉽지 않았다. 정도전은 구슬땀을 흘리며 칼을 꽂고 비틀고 당기기를 반복했다. 철갑 같은 소나무 껍질을 솜씨도 없고 변변한 도구도 없이 벗겨내기란 생각보다 무척 힘겨웠다. 사람 등판만큼 벗겨내는 데 몇 시간이 걸렸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교련 중이던 이성계의 병사들은 대체 저 선비가 뭘 하나 싶어 흘깃흘깃 쳐다보곤 했다.
마침내 적당한 크기로 소나무 껍질이 벗겨지고 속살이 드러나자, 정도전의 손은 피부가 벗겨지고 군데군데 피가 흐르는 지경이 되었다. 그렇지만 만족스러운 듯, 그는 이마의 땀을 소맷자락으로 쓱쓱 닦아냈다. 그러고는 봇짐을 뒤적거려 붓과 먹을 꺼내더니, 하얗게 드러난 나무 속살에다 이렇게 시를 썼다.
한 그루의 소나무여, 아득한 세월을 견뎌(蒼茫歲月一株松)
몇 만 겹으로 둘러싼 산속에서 자라났구나.(生長靑山幾萬重)
다행히도 훗날 다시 보게 되려는가.(好在他年相見否)
인간 세상의 만남은 잠시 지나간 자취 되는 것을.(人間俯仰便陳?)
이것이 이성계와 정도전의 첫 만남이었다. 이 만남 후에 한국사가 어떻게 바뀌었는지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으리라. 두 사람의 만남은 실로 김유신과 김춘추의 만남 이상으로 효과적이고 위력적인 문과 무의 결합을 이루었다. 아득한 세월을 견뎌온 왕조가 두 사람의 협력으로 무너졌고, 한 사람은 옥좌를, 다른 사람은 재상의 지위를 차지하여 새로운 사상과 제도로 다스리는 새로운 나라를 세웠다.
그런데 정도전의 마지막 행동은 약간의 의문을 남긴다. 그가 이성계에게 어떤 메시지를 남기려 한 것은 틀림없다. 그런데 왜 그것을 편지에 쓰지 않고, 진땀을 흘려가며 껍질을 벗겨 소나무에 남겼을까? 마침 종이를 가진 게 없어 그랬다고 할 수도 있지만, 정도전은 함주 여행 도중에 몇 편이나 시를 남겼다. 그걸 볼 때 늘 지필묵을 가지고 다녔다고 짐작할 수 있다. 설령 마침 종이가 떨어졌다 해도 잠깐 발길을 돌려 막사에서 시를 쓰고 이성계에게 직접 전해주면 될 것을, 뭐 하러 모든 사람이 지나가며 볼 수 있는 병영 앞 나무에다 글을 남겼단 말인가?
<정도전, 이성계의 벙영 앞 소나무에 자작시를 새기다>에서
“함께 백제를 친다, 그래서 백제 땅을 나누어 먹는다, 이 말씀이겠지? 괜찮겠군. 좋아요. 동맹을 합시다.”
“아, 정말 다행입니다! 그러면 정식으로 문서를……”
“다만, 조건이 있소. 귀국이 동맹을 맺는 신의의 표시로, 원래 우리 땅이었던 마현과 죽령을 되돌려주시오. 그러면 동맹을 맺으리다.”
“……제게는 그런 결정을 내릴 권한이 없습니다. 그리고 신의 표시로는 너무 과하다고 여겨집니다.”
“흥! 과하기는 개뿔이 과한가?”
갑자기 연개소문이 언성을 높이며 쾅 하고 대전 바닥을 발로 굴렀다. 김춘추는 물론 옥좌의 보장왕까지 흠칫 떨었다. 연개소문의 표정과 말투에서 김춘추는 회담이 끝났음을, 아니 처음부터 결렬되어 있었음을 직감했다.
“과거 왜구가 쳐들어와서 나라가 망하게 되었을 때, 너희 신라는 어찌했느냐? 우리 광개토호태왕께 제발 살려달라는 요청을 했지! 태왕께서 그 간청을 받아들여 군대를 보내서 구해주시지 않았더냐! 그런데 너희가 무슨 보상을 했더냐? 보상은커녕, 나중에 백제와 손을 잡고 우리 고구려를 치더니만, 이번에는 백제를 배신해서 백제의 왕을 죽인 게 너희 신라 놈들 아니냐? 너희처럼 신의라고는 약에 쓸래도 없는 놈들과 무슨 동맹을 할까? 여봐라! 어서 이 신라 놈을 옥에 가둬라!”
이렇게 해서 연개소문과 김춘추 사이의 ‘평양회담’은 실패로 끝났다. 이는 한반도의 운명을 결정짓는 회담으로서 현대의 김구-김일성 회담이나 김대중-김정일 회담에 비할 만했다. 그런데 김춘추와 연개소문은 기본적으로 합의점을 찾을 수 없었다. 두 사람은 성격부터 판이했다. 김춘추가 문을 대표한다면 연개소문은 무를 대표했는데, 김춘추-김유신의 경우에는 문과 무의 완벽한 조화가 가능했으나 이 경우에는 완벽한 배척이었다. (…중략…)
여라 동맹에 실패한 김춘추는 6년 뒤 당나라를 방문해 나당동맹을 맺는다. 그 이후로 고구려는 매우 불리한 세력구도에 놓였고, 결국 멸망으로 치닫게 된다. 고구려로서는 잠정적으로라도 신라의 동맹 제의에 긍정하는 자세를 보였어야 했던 것이다.
한편 신라도 나당동맹이 좋지만은 않았다. 늑대를 물리치려 호랑이를 끌어들인 셈이었고, 결국 나당전쟁을 치러야 했다. 그리고 당나라를 상국으로 받들어 그 문화를 받아들이고 이 땅을 중국화하는 속국의 길로 가야 했다. 늑대와 겨루기 위해 호랑이와 한편이 되었다고 할까. 여라 동맹이 이루어졌다면 고구려와 신라의 ‘남북조 시대’가 열려, 중국의 군사적?문화적 침략을 오랫동안 저지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인간의 성격은 쉽게 바꿀 수 없다. 하지만 냉철한 이성과 겸허한 마음은 도저히 맞지 않는 상대와의 대립을 누그러뜨린다. 그리고 대립의 벽 너머 멀리, 진정한 이익을 볼 수 있게 한다.
<연개소문, 김춘추의 제의를 묵살하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