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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프랑스소설
· ISBN : 9788984371071
· 쪽수 : 488쪽
· 출판일 : 2010-12-14
책 소개
리뷰
책속에서
“아가씨는 누구냐니까?”
내가 거듭 묻자 여자가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날 첫눈에 알아볼 거라 생각했는데…….”
어둠 때문에 얼굴이 또렷하게 보이진 않았지만 귀에 익은 목소리는 아니었다. 더구나 지금은 스무고개 식으로 그녀가 누군지 알아맞히고 싶지도 않았다. 나는 성냥을 그어 패서디나의 벼룩시장에서 산 낡은 허리케인 램프에 불을 붙였다.
은은한 불빛이 실내에 퍼져나가면서 여성 침입자의 모습이 보다 명확하게 들어왔다. 나이가 스물다섯쯤 돼 보이는 젊은 여자로 왕방울처럼 큰 눈에는 장난기가 가득하고, 갈색 머리칼에서는 빗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우린 한 번도 만난 적 없는데 내가 어떻게 알아볼 거라 생각했죠?”
그녀가 피식 헛웃음을 흘렸지만 나는 절대로 그런 수작에 말려들 생각이 없었다.
“아가씨, 이제 그만 하시죠. 이 야심한 새벽에 남의 집에서 대체 무슨 짓이죠?”
“정말 모르겠어요? 나란 말이에요, 빌리.”
캐롤과 단둘이 있을 때면 어린 시절 겪었던 혼돈스런 상황이 부메랑처럼 날아와 나를 할퀴고 지나갔다. 우리가 바라볼 수 있는 세상의 전부나 다름없었던 맥아더파크의 지저분한 공터들, 우리를 가두었던 그 악취 나는 수렁과 질식할 것 같았던 공기, 학교가 파한 후 철책으로 둘러쳐진 농구장에서 나누었던 고통스러운 대화의 기억들…….
오늘도 나는 우리가 아직 열두 살에 머물러 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수백만 부가 팔린 내 소설들, 캐롤이 체포한 수많은 범죄자들은 우리 둘이 맡은 연기에 필요한 소품에 불과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우린 아직도 그 혼돈의 거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사실 우리 셋 다 아이를 낳지 않은 건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우리는 각자 자신의 강박증과 싸우기에도 벅차 생명을 잉태해 흔적을 남기겠다는 희망 따위는 품어 볼 틈이 없었다.
우리가 알고 지낸 지는 벌써 10년째다. 밀로를 제외하고는 캐롤은 내게 하나밖에 없는 친구다. 캐롤은 미스 밀러 말고 나와 유일하게 이야기가 통하는 사람이다. 우리 관계는 아주 독특하다. 캐롤은 내게 여동생이나 여자친구 이상의 존재이다. 우리 관계에는 한 마디로 뭐라 단정 지을 수 없는 ‘독특한’ 면이 있다.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우리의 관계는 4년 전부터 급격히 달라졌다. 나는 바로 옆집, 내 방에서 불과 10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무시무시한 지옥의 공포가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매일 아침 층계에서 마주치는 소녀의 내면에서는 이미 생명이 사그라지고 있었다. 그녀에게는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하며 끔찍한 수난을 겪어야 하는 숱한 밤들이 있었다. 누군가가 그녀의 피를, 생명을, 수액을 빨아먹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내겐 그녀를 도울 방법이 없었다. 나는 외톨이였으니까. 고작 열여섯 살이던 내게는 돈도, 패거리도, 총도, 탄탄한 근육도 없었다. 가진 거라곤 비교적 잘 돌아가는 머리와 굳은 의지뿐이었는데, 그것만으로는 그녀가 처한 상황을 바꿀 방법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