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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영미소설
· ISBN : 9788984371132
· 쪽수 : 430쪽
· 출판일 : 2012-01-30
책 소개
리뷰
책속에서
장을 보는 날에는 12시 30분에 아파트로 돌아온다. 그 다음에는 노트북을 열고, 부팅이 되는 동안 커피를 끓인다. 하루에 ‘5백 단어씩 써야 한다’고 내 자신을 채근한다. 5백 단어. 백지로 두 장. 다시 말하자면 내가 매일 쓰겠다고 정해놓은 소설의 분량이다.
일주일에 엿새를 일한다. 날마다 두 장씩 쓰면 일주일에 열두 장이 나오는 셈이다. 꾸준히 계속 쓰면 열두 달 안에 소설 한 권을 쓸 수 있다. 아, 석 달 동안 버틸 생활비밖에 남지 않았다는 사실은 아예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하루 몫의 원고 분량을 꼬박 채우는 것에만 신경 썼다. 5백 단어. 메일을 쓸 때에는 20분도 걸리지 않을 양이지만 소설은 달랐다.
“이런 곳에서 시간을 보내기에는 너무 아깝다고 생각하죠?”
분명 여자 목소리였다. 발코니 저쪽 끝에서 들려온 낮고 허스키한 목소리. 여자는 어둠 속에 가려져 윤곽밖에 보이지 않았다. 붉은 담배 불빛만이 어둠을 뚫고 선명하게 보였다.
“내 생각을 모르시잖아요?”
“그래요. 그냥 넘겨짚어 봤어요. 저녁 내내 불편해 보이던데요. 살롱이 맘에 안 들죠?”
“저녁 내내 나를 지켜봤어요?”
“그냥 가끔씩 보았을 뿐이에요. 여자를 꼬드기려 애쓰다가 실패해 발코니로 나와 심호흡을 하며…….”
“뛰어난 심리분석이네요. 그럼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내가 안으로 들어가려 할 때 여자가 말했다.
“조금 놀렸다고 쌀쌀맞게 돌아서는 거예요? 늘 그래요?”
나는 다시 몸을 돌렸다. 여자의 모습은 여전히 윤곽만 보였다.
“처음 보는 사람을 놀리는 것도 이상한 일 아닌가요?”
“그냥 지나가는 말로 몇 마디 했을 뿐인데 아주 심각하게 반응하네요.”
“이런 장난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서…….”
“장난? 누가 지금 장난을 친다는 거죠?”
“당신이.”
“사실 난 그쪽을 꼬드기는 중인데…….”
“평소에도 이런 식으로 남자를 꼬드깁니까?”
정말이지 견디기 힘든 사흘이었다. 이전처럼 오후 2시에 일어나 인터넷카페에 급여봉투를 받으러 갔다. 시네마테크에서 오후 시간을 보내고, 값싼 저녁을 사 먹고, 카페에서 시간을 죽이다가 사무실에 나가 글을 썼다. 새벽이 되어 크루아상을 사들고 집으로 갔다.
깨어 있는 동안에는 늘 마지트 생각을 했다. 마지트와 함께 보낸 그날 오후의 일들이 계속 머릿속에서 어른거렸다. 그 순간순간이 빠짐없이 다 떠올랐다. 마치 내 머릿속에서 무한반복으로 상영되는 영화 같았다. 마지트의 살 냄새가 코에서 계속 맴돌았다. 내 몸에 닿았던 손톱의 느낌도 선연했다. 더 깊이 나를 받아들이려고 다리를 들어 올리던 마지트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섹스가 끝나고 나서 나누었던 교감도.
수잔은 나와의 섹스가 만족스럽지 않다며 몇 달 동안이나 나를 멀리 했다. 문제가 뭔지 솔직히 털어놓으라고 말했지만 그저 ‘기계적이다’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나중에 알았지만 수잔은 그때 이미 가드너 롭슨 학장과 밀회를 즐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