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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영미소설
· ISBN : 9788984374737
· 쪽수 : 496쪽
· 출판일 : 2024-02-26
책 소개
리뷰
책속에서
나는 여섯 살 때부터 카메라를 수집했다. 외할아버지가 은퇴해 포트로더데일의 콘도에 살고 있었는데, 거기서 탁자에 놓인 낡은 브라우니 카메라를 보았다. 나는 브라우니 카메라의 뷰파인더를 들여다본 순간 그 즉시 사로잡혔다. 마치 작은 구멍을 통해 세상을 엿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한 개의 이미지로 시야를 좁힐 수 있어 주위 모든 사물을 다 보지 않아도 된다는 게 매력적이었다. 그러나 감수성이 예민한 여섯 살짜리 꼬마를 가장 크게 만족시킨 건 렌즈 뒤에 몸을 숨긴 채 세상을 바라볼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꼬마는 카메라 렌즈를 자기 자신과 세상 사이를 가로막는 벽처럼 사용했다.
우리 가족이 외할아버지의 콘도에 머무르는 동안-아버지와 어머니가 말다툼을 벌이고,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가 말다툼을 벌이는 동안-나는 브라우니 카메라의 뷰파인더에 내 눈을 붙이다시피 하며 지냈다. 사실, 어른들과 가까이 있을 때면 늘 내 얼굴을 카메라로 가렸고, 말할 때조차도 내리지 않았다. 아버지는 그런 내 모습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어느 날, 아버지와 함께 저녁 식탁에 앉았을 때 나는 브라우니 카메라를 눈높이로 든 채 칵테일새우를 먹으려 했다. 그때 아버지의 울화가 폭발했다. 아버지는 내 손에 들린 카메라를 홱 낚아챘다. 외할아버지는 사위의 행동이 지나치다고 생각한 듯 나를 변호했다.
“베니가 카메라를 갖고 놀게 내버려두게.”
“이 아이 이름은 베니가 아니라 벤저민입니다.”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나와 함께 학교를 다녔던 거의 모든 아이들에게 ‘성취’라는 말은 단 하나의 의미, 즉, ‘큰돈을 벌다’라는 뜻으로 통했다. 백만 달러 단위의 연봉. 계급 사다리의 맨 위쪽에 오르거나 안정적인 전문직에 뛰어들어야만 얻을 수 있는 돈. 나는 아버지가 제안한 로스쿨 예비과정을 마쳤지만(틈을 내 사진 수업도 들었다), 마음속으로 늘 다짐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아버지에게 더 이상 생활비를 의지하지 않아도 되는 날이 오면 ‘성취’라는 말과 완전 작별하겠다고.
케이트는 늘 내게 말했다.
“아버지 때문에 겁먹지 마.”
케이트 브라이머. 기차가 해리슨 역을 빠져나가는 동안,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배너티 페어》의 반들반들한 종이를 휙휙 넘기고 있었다. 그 잡지의 ‘자랑거리’ 섹션에 케이트의 기사가 실려 있었다. 애니 레보비츠가 찍은 케이트의 사진이 한 면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사진의 배경은 보스니아의 대량 학살 현장,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체들이 눈 덮인 풍경 위에 나뒹굴고 있었다. 늘 그렇듯, 멋진 위장복을 입은 케이트는 ‘용감한 여성’의 표상답게 카메라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렇지만………… 아비로서 한 가지 충고를 해두마. 언젠가 반드시 어려운 때가 찾아올게다. 앞으로 5년 후가 될 수도 있지. 돈 한 푼 없다는 사실이 비통하고, 널 지치게 할 게다. 그런 때를 대비해 네가 로스쿨 졸업장 같은 걸 따놓으면 걱정 없이 다른 길을 찾을 수 있다. 변호사가 되어 여유가 생기면 관심이 있는 분야에 좀 더 집중할 수도 있겠지. 넌 사진을 좋아하니까 최고의 장비를 살 수도 있고, 전용 암실 같은 걸 꾸밀 수도 있고…………”
“꿈도 꾸지 마세요.”
“알았다, 알았어. 더 이상 말하지 않으마. 그렇지만 명심해라. 돈이 곧 자유야. 돈이 많을수록 선택의 폭은 넓어져. 네가 학교로 돌아가기로 결심한다면, 로스쿨을 졸업하거나 MBA 과정을 마치기로 한다면, 내가 학비를 대고 네 생활비까지도 대주마. 대학원을 다니는 동안 적어도 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겠지.”
“정말 대주실 수 있어요?”
“당연하지. 아비가 약속한 건 지킨다는 걸 너도 잘 알잖느냐?”
물론 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파우스트의 거래 같은 아버지의 제안을 나는 거절했다. …………적어도 한 달 동안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