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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과 생태

예술과 생태

(우리시대 철학적 지성의 예술미학 강의)

박이문 (지은이)
  |  
미다스북스
2010-12-12
  |  
1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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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과 생태

책 정보

· 제목 : 예술과 생태 (우리시대 철학적 지성의 예술미학 강의)
· 분류 : 국내도서 > 인문학 > 동양철학 > 한국철학 > 한국철학 일반
· ISBN : 9788989548485
· 쪽수 : 368쪽

책 소개

우리시대의 철학적 지성 박이문 선생의 예술미학 강의. 여기에 담은 글들은 몇 개를 빼놓고는 거의 모두 지난여 년 동안 학회나 특강을 위해서 또는 다양한 국제적 및 국내적 학회에서 영어 혹은 한국말로 발표했던 논문들 가운데서 예술과 생태문제에 관련된 18개를 모은 것이다. 전체의 논문을 각각 ‘예술’과 ‘생태’라는 두 분야로 묶어서 살펴본다.

목차

프롤로그 어둠과 빛 · 6

1부 예술

1_미학과 예술철학 · 27
2_예술의 종말 이후 미술사 · 53
3_예술의 원형으로서의 공예 · 69
4_둥지의 건축학 · 85
5_예술이라는 언어의 꿈 · 109
6_시의 개념과 시적 둥지 · 123
7_시인의 사회적 책임과 의무 · 131
8_시적 혁명 · 157
9_자기해체적 예술창조 과정 · 165

2부 생태

10_생태학적 합리성과 아시아 철학 · 185
11_지구촌, 동아시아 공동체 그리고 문학의 역할 · 221
12_지구촌 시대의 문화비전 · 231
13_생태 위기와 아시아의 사상 · 249
14_생태 위기와 아시아 생태문화 · 265
15_지구촌에서의 소통과 공생을 위한 인문학 · 277
16_환경 윤리의 철학적 초석 · 295
17_생명의 존엄성과 윤리적 선택 · 321
18_세계의 예술적 변용 · 343

후기 · 362

저자소개

박이문 (지은이)    정보 더보기
서울대학교 불문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프랑스 소르본 대학교에서 문학 박사 학위를 받은 뒤 도미하여 서던캘리포니아 대학교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프랑스, 독일, 일본, 미국 등지에서 30여 년 동안 지적인 탐구와 후학 양성을 위해 교수 생활을 한 뒤 귀국했다. 이후 포항공과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다 정년 퇴임했으며, 2009년까지 연세대학교 특별 초빙 교수로 재직했다. 그리고 포항공과대학교, 미국 시몬스 대학교 명예교수로 활동했다. 주요 저서로 『문학과 철학』, 『문명의 위기와 문명의 전환』, 『현상학과 분석철학』, 『노장사상』, 『과학철학이란 무엇인가』 등과 시집 『나비의 꿈』, 『울림의 공백』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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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된단 말인가? 이성의 가르침에 따라 곧게 살고 양심의 명령에 따라 옳게 사는 것 말고 다른 의미가 어디 있겠는가? 궁극적 어둠을 다소나마 밝혀주는 이성과 양심의 빛 말고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그러기에 끊임없는 희망과 좌절, 의미와 무의미의 애매한 중간 지역에서 헛될지 모르지만 애를 쓰고, 착각일지 모르지만 주장하고, 질지 모르지만 투쟁하고, 배반당할지 모르지만 사랑한다. 어둠과 빛의 중간 지역에서 우리는 모르지만 알려 하고, 쓰러지지만 다시 일어나고, 결국은 죽지만 살려고 한다.
- <프롤로그> 중에서


단토에 의하면 워홀의 예술작품 <브릴로 상자>는 헤겔이 말하는 우주의 역사가 시작과 끝이 있는 우주적 정신의 진화과정이듯이 예술의 역사도 나름대로의 시작과 끝이 있는 이야기라는 것을 처음으로 보여준 작품이다.
단토는 서양에서의 예술 발전과정의 시대적 역사를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단계로 구별하여 서술한다. 첫째 ‘예술’이라는 특수한 활동과 제품을 자각하기 시작한 르네상스 이전에 나타난 고대예술 즉 ‘예술탄생 이전’의 예술, 둘째 르네상스 시대 피렌체의 예술비평가이자 예술사가였던 조르조 바사리에 의해서 전통적 예술관인 예술의 기능이 ‘모방’이라는 개념 즉 이야기로 정착되었던 시대의 예술, 셋째 20세기 전반 뉴욕 예술의 이론계를 휘어잡았던 클레멘트 그린버그의 선언에 의해 분류, 해석, 평가된 ‘마니페스토라는 선언적 내러티브’, 즉 이야기 시기의 예술.
그러나 단토에 의하면 시대마다 나름대로 다른 예술의 본질을 설명하고 예술작품의 분류, 의미해석, 평가를 정당화하는 기능을 했던 수많은 과거의 예술적 이론들 중 어느 것도 포스트모던 시대인 오늘날의 해체적 예술의 창조, 설명, 소통 가치, 존재 이유를 설명하지 못한다. 가령 뒤샹의 작품 <샘>이나 워홀의 <브릴로 상자>는 지금까지 존재했고 시대와 장소마다 나름대로의 역할을 했던 기존의 모든 예술에 관한 이야기, 예술관, 기능, 정의 등이 무용지물로 됐음을 의미한다. 이런 점에서는 ‘예술의 종말’이라는 말이 의미를 갖지만 그와 동시에 예술의 새로운 창조적 가능성으로 파악될 수 있다. 정확하고 보편적인 예술의 정의가 존재하지 않게 된, 즉 예술에 어떠한 제한이나 구속이 존재하지 않게 된 세계에서는 모든 예술가나 비평가는 어떠한 제재도 없이 하나의 작품을 놓고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고 평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볼 때 단토가 말하는 ‘예술의 종말’은 예술의 끝이 아니라 사실상 ‘예술의 해방과 새로운 시작’일 뿐이다. 무엇을 만들어도 무슨 짓을 해도 예술이 될 수 있고, 그러한 것들에는 나름대로의 의미가 부여되고 감상의 대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중략)

모든 가치평가는 반드시 어떤 관점에서만 가능하다. 특정한 관점을 떠난 초월적, 총체적 관점에서의 평가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평가 대상의 성격에 따라 평가적 관점은 바뀐다.
가령 수학적 혹은 과학적 평가는 오로지 진위와 그것을 뒷받침하는 논리에 의해서만 가능하지 그것이 우아한 언어로 좋은 종이 위에 진술됐느냐 등의 문제는 전혀 고려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예술작품의 경우, 그것의 진위 문제는 그것의 평가 관점이 될 수 없으며 넓은 의미에서 ‘예술적’, 더 일반적으로는 ‘미학적’ 관점만이 평가적 관점이 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수학, 과학, 철학 등 학문의 평가적 관점은 비교적 단순하다. 하지만 위 두 경우와는 달리 건축의 경우는 좀더 복잡하다.

건축 평가에 있어서는 어떤 관점들이 고려되어야 하는가?
편의상 다음과 같은 몇 가지만을 우선 생각해 볼 수 있다.

(중략)

둘째, 미학적 관점이다. 물리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만큼 모든 건축물은 필연적으로 공동체 구성원들의 시각적 경험 대상이 되고, 시각적 경험은 인간에게 빠질 수 없는 미학적 가치를 동반하는 이상 그것들은 인간의 미학적 가치에 대한 욕구를 최대한 충족시킬 수 있어야 한다. 모든 건축이 의도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기능적일 뿐만 아니라 언제나 ‘보기 좋은’, ‘아름다운’ 것이 되도록 설계되는 것은 당연하다. 무엇보다도 어떤 기능을 위해 설계된 건축이 그냥 도구로서의 ‘집’, ‘공장’, ‘기념관’, ‘박물관’에 머물지 않고, 내재적 가치를 가지는 ‘예술작품’으로도 취급되어 그것의 미학적 가치가 평가 받아 예술사의 중요한 일부를 차지하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중략)

앞서 말했듯 마르크스는 기존 철학과 철학자에게 급진적 비판을 가했다. 이는 전통적 시적 글쓰기, 그러니까 시^문학^예술에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다. 그의 철학관을 ‘참여철학관’이라고 한다면, 그의 문학관이나 예술관도 ‘참여문학관’, ‘참여예술관’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마르크스적 ‘참여문학관’은 서구에서 사회주의 혁명정부 소련의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형태로 나타났고, 사르트르의 실존주의에서 문학의 ‘참여 개념으로도 나타났으며, 1930년대의 일본과 한국에서 프롤레타리아 문학이론, 전후 한반도에서 마르크스주의적 좌파문학, 6·25전쟁 이후 남한에서 1970~1980년대의 참여문학, 민중문학, 민족문학, 통일문학 등의 문학운동으로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시, 소설, 예술 일반이 ‘참여’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아니 도대체 ‘참여’란 무엇을 뜻하는가? 그것은 어떤 집단과 관계를 맺고 그것에 동참하여 그것이 갖는 고통과 기쁨을 함께 나누면서 그 집단의 개혁 작업에 적극적으로 동참함을 의미한다. 이런 점에서 참여문학은 한 국가 혹은 인류라는 사회 공동체의 크고 작은 근본적이고 지엽적인 제 문제들의 해결과 개혁을 위한 사회적 작업에 직접적 그리고 적극적인 행동 기능을 담당하기 위한 문학적 글쓰기를 의미한다. 행동은 실현을 요청하는 ‘가치’로서의 이념이 전제된다. 참여가 필연적으로 이념적 참여 즉 정치적 활동일 수밖에 없다면, 시적·문학적·예술적 참여도 결국 이념적 활동이며 필연적으로 일종의 정치적 활동이다.

(중략)

시는 존재에 충실하고자 하는 정신의 언어적 표현이다.

사람들은 흔히 시인을 진리와는 상관없이 감정에 따라서만 움직이는 동물로 여긴다. 그러나 사실은 정반대이다. 과학자나 철학자보다도 시인은 한결 더 객관적 사실에 정직하고 가장 근원적인 진리를 추구한다. 인식되기 이전의 존재는 무의미하다. 언어 이전의 존재 인식은 불가능하다. 존재는 가령 ‘산’, ‘개’, ‘컴퓨터’, ‘사랑’ 등의 개념 즉 언어의 범주를 통해서만 인식되고 표상될 때에만 비로소 그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나 ‘산’, ‘개’, ‘컴퓨터’, ‘사랑’ 자체가 아니고 그러한 것들의 관념화, 개념화, 추상화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언어는 존재를 밝혀주는 동시에 그것을 은폐한다. 이러한 언어의 은폐성을 의식할 때 시적 충동이 생기고 그러한 언어적 장벽을 극복하고자 할 때 시적 작업이 시작된다. 과학자와는 달리 시인은 존재에 대한 기존의 인식과 언어적 표상에 만족하지 않고 그것을 극복하려고 한다. 시는 한가한 사람들의 헛소리가 아니다.

시는 언어에 의한 언어의 파괴작업이다.
시가 존재에 충실하고자 하고 언어가 존재를 은폐한다면, 시가 할 첫 번째 작업은 기존의 인식 양식을 거부하고 기존에 사용된 표상 언어를 파괴하는 것이다. 앞에 있는 언어가 제거되었을 때 존재는 은폐 이전의 상태 즉, 그 자체를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 모든 시인이 존재에 대해 상식과는 다른 시각을 의도적으로 제시하고 일상적 언어를 뒤틀려고 하는 경향을 보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으며 한 편의 시가 상식적으로는 이해하기 어렵고 난해하게 느껴지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시인은 상식적으로 상투적인 모든 것을 거부한다.
시인은 시의 성격상 필연적으로 약간은 ‘이상한’아니 ‘미친’ 인간이다. 약간은 이상하거나 미치지 않은 인간은 시인이 아니다.

그러나 시의 관점에서 볼 때 정말 이상하거나 미친 인간은 시인이 아니라, 오히려 가장 상식적인 인간들이거나 가장 똑똑한 과학자이거나 가장 투명한 철학자이다. ‘이상한’혹은 ‘미친’ 관점에서 볼 때 그 신선하고 참된 모습이 비로소 드러날 수 있다. 시를 쓴다는 것은 존재 자체를 은폐하며 언어를 파괴하고 언어 이전의 존재 자체와 보다 가까이 접하고자 하는 작업이며, 그것은 구체적으로 기존의 언어를 새로운 언어로 대치하는 작업이다.
한 편의 시는 바로 이러한 작업의 결과물이다.
또한, 시는 해방을 위한 자유의 외침이며 개혁을 위한 혁명적 행위이다.

인간의 세계인식, 경험 그리고 의식은 언제나 언어적이다. 인간은 자신이 제작한 언어의 그물망 속에 갇혀 그 속에서만 존재한다. 시가 언어를 파괴하고자 하는 이유는 우리가 갇혀 있는 언어의 감옥으로부터 해방되어 존재 자체에 보다 진실하고자 하는 데 있다.
그러므로 언어 파괴 작업으로서의 시는 곧 개혁을 위한 혁명적 행위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정치적 자유, 사회적 혁명과는 무관한 듯이 보이는 어려운 말로 무엇인가를 써내는 시인들이야말로 근본적인 차원에서 정치적이며 혁명적이다.

시가 의도하는 것은 존재의 세계에서 화석화된 우리의 인식으로부터의 해방이며 그러한 해방을 통해 근원적인 자유를 되찾고자 하는 혁명적 활동이다.

(중략)

전통적 동아시아의 자연 중심적 세계관
전통적인 인간 중심주의는 인간의 오만이 만들어낸 착각이다. 인류는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 가장자리에 있으며, 인류의 기적 같은 진화는 유대·기독교·이슬람이 전제하고 있는 바와 같이 초월자의 선택에 의해 결정되었거나 힌두^불교가 주장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자연의 우연한 산물이다. 우주적인 관점에서 볼 때 인류의 가치는 동물의 가치와 근원적으로 차별되지 않으며, 그의 존엄성은 다른 동물의 존엄성과 근본적으로 차등 지을 수 없다. 위와 같은 사실들은 현대 과학, 특히 천문학, 물리학, 화학, 생물학 등의 과학 분야에서 이미 수없이 발견되고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 발견될 것이다. 또한 동북아시아 사상의 뿌리를 이루고 있는 노장사상 즉, 철학적 도교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 있다. 정통적 노장사상은 전통적 사상 가운데서 가장 과학적인 즉 비의인적인 동시에 가장 자연 중심적이며 생태학적이다. 적어도 이런 점에서 동아시아는 새로운 문명의 싹을 틔울 수 있다. 자연은 한없이 아름답고 자비롭다. 미국 원주민이 대지를 ‘어머니’라고 부르는 것으로 알 수 있듯이 자연은 모든 생성의 원천이자 젖줄이다. 그것은 대자연이 보면 볼수록, 느끼면 느낄수록,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신선하고 풍요하기 때문이다. 자연은 무한히 조용하면서도 생기에 넘치고, 무한히 소박하면서도 아름답고 거룩한 모든 것들의 모체이자 그것들 자체이다. 자연은 영혼을 가진 인류를 비롯한 유인원, 그 밖의 수많은 종류의 식물과 동물들 및 신비롭고 거룩한 모든 생명체의 고향이자 거처이며, 일터이자 휴식처이고, 행복의 둥지이다.

-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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