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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역사 > 서양사 > 서양중세사
· ISBN : 9788991124004
· 쪽수 : 500쪽
책 소개
목차
역사와 전설 속의 위대한 여인을 기억하며 · 18
서문 · 22
프롤로그: 1152년 5월 18일 · 25
1. 풍요로운 아키텐 · 28
2. 미덕의 표상 · 56
3. 악마의 부추김 · 78
4. 예루살렘으로! · 106
5. 정당한 이혼 · 134
6. 행복한 결말 · 157
7. 왕국에 관한 모든 것 · 178
8. 신의 은총을 받은 잉글랜드 왕비 엘레오노르 · 196
9. 왕께서 기적을 행하셨다 · 214
10. 날로 깊어가는 의혹 · 235
11. 성스러운 순교자 · 257
12. 새끼들이 깨어날지니 · 273
13. 왕비님과 왕자님들을 조심하십시오 · 286
14. 가여운 포로 · 304
15. 패배한 왕, 수치, 수치로다 · 327
16. 독수리가 세 번째 둥지에서 기쁨을 찾으리라 · 348
17. 연륜에 대한 찬사 · 364
18. 악마가 풀려난다네! · 389
19. 내 노년의 지팡이 · 411
20. 가장 경애하는 엘레오노르 · 433
21. 악인의 소생은 번성하지 못하리라 · 449
22. 촛불이 꺼지다 · 464
엘레오노르의 가계도 · 478
참고문헌 · 483
리뷰
책속에서
이제 앙주의 앙리는 중세 유럽의 가장 부유한 상속녀 가운데 한 사람과 혼인함으로써 영지를 더욱 넓히려 하고 있었다. 앙리의 옆에 선 여인은 아키텐의 여공女公이자 푸아투의 여백女伯그리고 프랑스의 전 왕비 엘레오노르였다. … 앙리는 이 결혼에 성공한 데 이어 몇 년 뒤 1154년 잉글랜드 왕위까지 제 것으로 만듦으로써, 잉글랜드와 지금의 프랑스 지역, 곧 스코틀랜드 접경에서 피레네 산맥에까지 뻗친 방대한 영토를 소유한 앙주 제국의 기틀을 확립하게 된다. 이만한 규모의 제국이라면, 그보다 훨씬 덩치가 작은 프랑스에게 치명적인 위협이 될 것이었다. … 향후 4백 년에 걸쳐 서유럽의 외교와 안녕을 좌우하게 될 새로운 판도가 모습을 드러내려 하고 있었다. 이제부터 프랑스의 통치자들은 대대로 앙주 제국을 조각내고 정복하는 데 혼신의 힘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이렇게 플랜태저넷 가 최초의 잉글랜드 왕 헨리 2세와 아키텐의 엘레오노르 두 사람의 결혼은, 12세기 기독교세계의 정치판도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을 뿐 아니라 이후로도 상당기간 유럽사의 향방을 결정짓는 중요한 분수령이 되었다.
왕실이 이동을 할 때면 말과 마차, 수레, 그리고 온갖 종류의 물품과 살림살이를 실은 소나 말 같은 동물의 행렬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왕비와 귀부인들은 말 위에 앉거나 가죽으로 지붕을 덮은 통 모양의 마차를 탔다. 궁에 딸린 관료와 시종만도 2백 이상을 헤아렸고, 동행한 하인들의 수도 어마어마했다. 요리사, 빵 굽는 사람, 과자 굽는 사람이 따로 있었던 것은 물론이고, 과일류, 가금류, 와인, 고깃간, 술 창고, 각종 잔, 접시, 버터 등을 담당하는 급사나 장인이 있었으며, 이들은 모두 식료품의 공급과 조달, 부엌과 식품저장고의 관리를 책임졌다. 여기에 사제, 서기, 화가, 의전관, 사냥꾼, 뿔 나팔 부는 사람, 파수꾼, 경호원, 궁수, 중기병, 고양이 잡는 사람, 늑대 쫓는 사람, 사냥개 관리인, 왕실 고양이 관리인, 천막 관리인, 촛불 시종, 국왕 침대 운반자, 국왕 재단사, 세탁하는 사람 등이 보태졌다. 특히 세탁 시종 가운데는 국왕의 옷을 말리고 목욕을 준비하는 시종도 있었는데, 이 시종들이 헨리의 목욜 수발을 얼마나 들었을지는 의문이다. 1209년 존 왕은 6개월 동안 여덟 번째 목욕을 하면서 스스로도 놀라했다고 한다.
테오발드 대주교가 토머스 베켓을 왕에게 소개하면서 그를 대법관직에 추천했던 것도 이 회의였던 것 같다. 헨리는 첫눈에 베켓이 마음에 들었고, … 이것이 역사상 가장 유명했던 친교 가운데 하나이자 동시에 훗날 두 사람 모두를 엄청난 파국으로 몰고 갔던 우정의 시작이었다. … 베켓과 헨리의 관계는 지나치다 싶을 만큼 가까웠다. 당시 사람들은 두 사람이 요셉과 파라오처럼 궁합이 잘 맞았다고 말했다. … 국왕은 공석으로 남아있는 캔터베리 주교 자리를 누구로 채울 것인가를 두고 여전히 고민 중이었다. 그리고 부활절을 전후하여 왕비와 팔레즈에서 머무는 동안 드디어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그는 베켓을 원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베켓은 자신에게 충직하며, 또한 그가 교회개혁을 위해 구상 중인 급진적인 계획들을 추진하는 데도 큰 도움을 되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 하룻밤사이에 이 도도하고 세속적인 궁정인이자 정치가, 군인은 오로지 영적인 사명에만 헌신하는 금욕적인 사제로 환골탈태한 것처럼 보였다. … 국왕은 그가 더 이상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지만은 않을 것임을 예감한다. … 베켓 역시 성직자 처벌제도가 악용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교회의 권위와 특권은 교회를 세속의 개입으로부터 지키기 위한 것이므로, 대주교는 어떤 식으로든 이것이 침해받는 것은 좌시할 수 없었다. 베켓은 왕의 개혁을 반대했고, … ‘우리의 관례는 제외한다’는 단서를 달았다. 헨리는 불쾌했다. … “신께서 보시는 앞에서,” 헨리는 고함을 질렀다. “짐은 경들의 관례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듣지 않겠다! 나의 관습에 지금 당장, 무조건 동의하라.” 베켓과 주교들이 계속 완강하게 버티자 헨리는 홀을 뛰쳐나가 버렸다. 다음 날 새벽, 국왕은 웨스트민스터를 떠나면서 아이와 버크햄스테드에 있는 베켓의 장원을 몰수하라는 명을 대법관에게 내렸고, 베켓의 집에서 헨리 왕자를 데리고 나왔다. … 1165년에서 1170년 사이 루이 왕은 적어도 스무 차례 이상 헨리와 베켓이 만나는 자리를 만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모두 수포로 돌아갔다. 앞으로도 6년간 두 사람은 절대 타협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법적원칙을 둘러싸고 처음 불거졌던 분쟁이 이제는 누구의 권한이 더 막강한가를 판가름하기 위한 감정싸움으로 확대되어 버렸다. … “누가 이 골칫거리 성직자를 내게서 좀 치워주겠나?” 정확히 기록된 바는 없지만 아마 헨리 왕은 그렇게 표현했던 것 같다. … “빌어먹을! 군주가 천박한 사제 놈 하나한테 이런 수치스러운 모욕을 당하는데 그냥 보고만 있다니!” … 기사 넷이 사라진 것을 알게 된 헨리는 뒤늦게 그들의 의중을 간파하고 모골이 송연해졌다. 재빨리 그들을 소환하는 사자를 보냈으나, 이미 상황은 종료된 듯했다. 헨리는 아무런 손도 쓸 수가 없었다. … 잉글랜드의 대주교가 살해당했다는 소식은 온 유럽을 충격으로 몰아넣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형 이후로 가장 최악의 악행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었다. … 거의 모든 이들이 순교자의 죽음을 국왕의 책임으로 돌렸고, 기독교 세계 전체가 헨리를 비방했다. … 살아있는 베켓보다 죽은 베켓이 발휘한 위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선종과 거의 동시에 그는 순교자로 추앙받기 시작했다. 캔터베리에 살았던 이들은 앞다투어 몰려와 베켓의 피를 몸에 문지르거나 병에 담아갔고, 그의 옷자락을 찢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