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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역사 > 한국근현대사 > 일제치하/항일시대
· ISBN : 9788991274563
· 쪽수 : 400쪽
책 소개
목차
1. 스쳐간 순간이 역사가 되고
서른, 세상을 뒤집다
서른에 꿈꾸었던 나라
태평의 잠을 깨운 구로후네(黑船)
우라가(浦賀)와 강화도
사무라이와 선비의 전쟁관
고개는 숙여도 기싸움은 밀리지 않아
‘무뎃포(無鐵砲)’의 무모함을 자각하다
페리가 일본으로 먼저 간 까닭은
미국을 먼저 만난 행운
외국선을 쫓으면서도 내공을 축적하다
『해국도지海國圖志』가 일으킨 파장
사무라이와 선비, 세상을 보는 다른 눈
데지마, 해외로 열린 일본의 창
효용가치가 떨어진 조선통신사
페리 내항의 정보도 미리 입수
까맣게 모르고 있다 당한 조선
2. 천황을 부활시킨 요시다 쇼인
다이로 아베 마사히로의 결단
요시다 쇼인, 구로후네 현장에 서다
천하의 스승, 사쿠마 쇼잔을 만나다
주유천하 끝에 만난 구로후네
생각보다 일찍 온 페리의 재 내항
개항시기만큼 벌어진 한일 근대화의 격차
요시다 쇼인, 마침내 밀항 기도
군국주의 맹아萌芽를 키운 운명의 회항回航
쇼인 사상의 중독성
무덤에서 불러낸 구스노키 마사시게
맹자에 빠지다
쇼카손주쿠(松下村塾)에 몰려든 제자들
천출에서 총리로 비상한 두 사나이
멀리 듣고 높이 보라
요시다 쇼인, 반역을 모의하다
무사시의 들판에 뿌려진 원념怨念
3. 회천回天의 기수, 다카스키 신사쿠
뜻을 세우면 목숨을 걸라
전통 무사의 혈통을 잇다
검호劍豪 가쓰라 고고로
쇼카손주쿠 입문과 에도 유학
이이 나오스케 암살과 정국의 반전
가쓰 가이슈와 후쿠자와 유키치의 등장
상하이 견학과 근대화의 자각
사쓰마번의 웅기
내부의 적을 더 두려워했던 막부
위기를 절호의 기회로
죠슈의 어순조御楯組와 사쓰마의 정충조精忠組
10년 은거에 들어가다
화살 세 개의 교훈
마침내 시작된 양이전쟁
초망굴기草莽푞起
두 천민 재상이 꽃피운 쇼인의 유훈
4. 막부를 치다
죠슈 파이브, 영국으로 가다
이토 히로부미와 이노우에 가오루의 각별한 인연
8·18 정변과 죠슈의 몰락
변란은 끝이 없고
사이고 다카모리의 등장
시모노세키전쟁과 신사쿠의 활약
죠슈의 항복과 기병대 해산 위기
대세를 역류할 것인가, 순응할 것인가
이토 히로부미의 결단
잇쇼켄메이一所懸命
뒤늦게 합류한 야마가타 아리토모
가쓰라 고고로의 귀환
국민개병제의 도입
도사土佐의 두 낭인, 료마와 신타로
사이고 다카모리, 죠슈를 품다
사카모토 료마의 기발한 제안
삿쵸동맹의 결성
전투는 사람이 하는 것
1천 결사대에 무너진 막부의 2만 대군
꽃잎 아래 봄에 지다
5. 요시다 쇼인의 긴 그림자
개항기 일본에 주어진 행운
고종과 메이지의 엇갈린 운명
상투와 ‘죰마게(丁?)’
스스로 물러난 쇼군
막부군의 마지막 저항
정한론을 뒤엎은 이토 히로부미
유신의 주역들은 가고
조선 병탄에 나선 죠슈 파벌
시골 사무라이에 당한 조선
죠슈군벌이 주도한 한일강제합병
유태계 자본이 도와준 러일전쟁
이토 히로부미의 조선합병에 대한 생각
서른 한 살, 안중근의 절묘한 선택
6. 오늘도 소나무는 자란다
이토 히로부미, 안중근을 쏘다
일본이라는 나라
조선을 삼켰으나 소화하지 못한 일본
‘바카야로(ばかやろ)’에 숨겨진 이면
초혼사와 야스쿠니신사
가이텐의 종말
한국, 갸쿠텐의 시작
조선 민중의 좌절과 극복
의도적인 망각 뒤에 가려진 역사의 진실
사야가와 김환의 경우
채향정에 서린 제국의 잔영
소나무는 다시 자란다
※ 주요 등장인물 약전
※ 참고문헌
※ 고종과 메이지시대 연표
저자소개
리뷰
책속에서
조선과 일본이 개국 과정에서 보여준 극명하게 대조적인 대응 방식의 이면에는 지정학적 요인 외에도 선비와 사무라이라는 극단적으로 이질적인 지배층의 구성도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새로운 문명의 내습에 직면하여 개국을 전투적 관점에서 보느냐, 명분의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대응 방식도 극과 극으로 갈렸던 것이다. 무력으로 개국을 거부할 수 없다면 어떻게든 타협점을 찾아 후일을 도모하려고 했던 것이 일본이었고, 금수禽獸의 문명을 받아들일 수 없었기에 전투의 승패와는 관계없이 문을 닫아걸었던 것이 조선이었다.
하멜이 조선에 표류해온 시기는 네덜란드가 데지마상관을 통해 일본과 독점무역을 개시한지 불과 12년 뒤의 일이었다. 만약 이때 조선 조정이 하멜 일행의 가치를 깨닫고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대외무역에 나섰더라면, 조선의 근대사는 획기적으로 달라졌을 것이나 조선은 이 굴러온 복덩어리를 걷어차 버렸다. 당시는 효종의 북벌정책이 추진되던 시기였는데도 불구하고 정작 중요한 신 군사기술의 습득기회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
하멜표류기가 계기가 되어 조선의 존재를 인식하게 된 네덜란드는 조선과의 교역을 추진하기 위한 1 천 톤급의 무역선 ‘코레아호’를 건조하기까지 했지만, 서구와의 대외무역을 독점하려는 일본 막부의 방해로 ‘코레아호’는 결국 조선으로 항해하지 못했다. 조선 조정은 이 같은 움직임조차 전혀 감지하지 못했다. 데지마에 복원돼 있는 당시 데지마의 무역선과 하멜상선의 모양은 복사판처럼 똑같다. 똑같이 주어진 상황에서 조선이 얼마나 귀중한 기회를 날려 버렸는지 이 상선의 모형이 침묵으로 증언하고 있다.
주목할 점은 일본이 수교를 위한 화친조약을 선행하고 3∼4년의 시간이 흐른 뒤 통상(무역)조약을 체결한데 비해, 조선은 수교와 통상조약을 동시에 체결했다는 사실이다. 일찍 문을 연 일본은 시간적인 여유를 갖고 단계적으로 시장을 열면서 시행착오를 교정해 나갔지만, 출발이 늦었던 조선은 그와 같은 시행착오를 교정할 시간적인 여유가 없었다. 조선과 일본의 개국(수교)시점 자체도 22년의 격차가 있지만, 서구열강을 대상으로 한 실질적인 개항(통상)을 따지면 그 격차는 24년으로 벌어진다. 이 기간에 일본은 근대화를 위한 국체변경(왕정복고)과 국가제도의 개혁(내각제 도입 및 헌법 제정)을 거의 마무리했고, 조선은 이 24년간의 격차를 극복하지 못하고 일본에 합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