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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역사 > 한국근현대사 > 일제치하/항일시대
· ISBN : 9791159000201
· 쪽수 : 500쪽
책 소개
목차
머리글
1장 조선을 탐한 조슈 사무라이
900번을 찍어 넘어뜨린 조선
한 마을에서 자란 침탈의 주역들
조선을 탐한 조슈 사무라이
기라성처럼 쏟아진 근대화의 주역들
신국神國의 이데올로그 요시다 쇼인
주유천하 끝에 만난 구로후네
다이로 아베 마사히로의 결단
요시다 쇼인, 구로후네 현장에 서다
유신의 풍운아 사카모토 료마
1년 만에 다시 돌아온 페리 제독
페리가 일본으로 먼저 간 이유
개항 시기만큼 벌어진 한·일 근대화의 격차
요시다 쇼인, 마침내 밀항을 시도하다
군국주의 맹아를 키운 운명의 회항
쇼인 사상의 중독성
무덤에서 불러낸 구스노키 마사시게
맹자에 빠지다
쇼카손주쿠에 몰려든 제자들
천출에서 총리로 비상한 두 사나이
요시다 쇼인, 반역을 모의하다
무사시의 들판에 뿌려진 원념
2장 회천回天의 기수, 다카스키 신사쿠
사이후이死而後已
다카스키 신사쿠의 성지, 시모노세키
쇼카손주쿠에 입문한 두 사무라이
에도 유학과 요시다 쇼인의 처형
이이 나오스케 암살과 정국의 반전
미국으로 간 가쓰 가이슈와 후쿠자와 유키치
존왕양이와 공무합체파의 충돌
폭풍을 비켜가다
이보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
모리 가문의 천도
초망굴기로 일어선 기병대
두 천민 재상이 꽃피운 요시다 쇼인의 유훈
조슈 파이브, 영국으로 가다
‘8.18 정변’과 조슈의 몰락
변란은 끝이 없고
시모노세키전쟁과 신사쿠의 활약
막부의 조슈 정벌과 기병대 해산 위기
이토 히로부미의 결단
마침내 회천의 거병
뒤늦게 합류한 야마가타 아리토모
가쓰라 고고로의 귀환
오무라 마스지로의 등장
‘4경전쟁’의 발발
사카모토 료마의 참전과 고쿠라 공략
봄꽃 아래 지다
‘가이텐’의 종말
3장 사무라이 정신의 고향, 가고시마
이부스키 한·일 정상회담의 여운
일본의 천손강림 신화와 조선과의 진한 인연
기미가요와 히노마루의 고향
반란의 수괴가 된 라스트 사무라이
사이고 다카모리에 헌정된 땅
무뎃포의 무모함을 자각
일본을 구한 무라타 소총과 조선이 외면한 개틀링 기관포
전설이 된 사쓰마 사무라이
시대를 앞서 간 영주 시마즈 나리아키라
사이고 다카모리와 오쿠보 도시미치
중앙 정치 무대에 등장한 사쓰마 번
테라다야의 비극과 과격파 사무라이의 괴멸
나마무기 사건과 사쓰마의 자각
정국의 주역으로 복귀한 사이고 다카모리
사카모토 료마의 기발한 제안
삿쵸동맹의 결성
스스로 물러난 쇼군
막부군의 마지막 저항
타오르기 시작한 정한론의 불꽃
초량왜관에 밀려오는 격랑의 물결
정한론의 불을 지핀 사이고 다카모리
힘없이 말만 쏟아내다 되풀이한 비극
4장 오늘도 소나무는 자란다
김종필의 명연설
한국, ‘갸쿠텐’의 시작
조선 민중의 좌절과 극복
데지마를 활용했던 일본, 하멜을 쫓아낸 조선
별단풍설서와 해국도지
중체서용, 화혼양재 그리고 동도서기론
일본의 행운과 조선의 불운
‘통치하지 않는 왕’의 부활
국운을 건 러일전쟁 도발
병사들의 피로 조달한 전쟁 국채
일본이 러일전쟁을 벌인 이유
조선 침탈을 강력 후원했던 영국과 미국
오늘도 소나무는 자란다
■ 책을 쓰고 나서
■ 주요 인물 소개
■ 고종(조선)과 메이지(일본) 시대 연표
저자소개
리뷰
책속에서
국가는 무엇으로 사는가?
일본은 봉건제 사회에서 벗어나 근대화를 이행하는 과정에서 수만 명의 사무라이들이 국가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한 투쟁에 목숨을 던졌다. 서구 열강의 외세 공략에 앞서 내부적으로 치열하게 투쟁하며 수백 년간 누적된 갈등과 모순을 정리하고 자존의 기반을 마련했다. ‘시시志士’라고 하는 초야의 이름 없는 사무라이들이 근대화를 향한 열정으로 목숨을 던졌고, 그 죽음으로 나라는 살았다. 당시 일본에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나라를 바로 세우려는 진동陣東과 같은 지사들이 넘쳐났다.
반면에 조선은 그와 같은 치열한 내부적 갈등과 혁신의 몸부림이 상대적으로 매우 약했다. 망국에 즈음해서야 초야의 선비들이 의병 봉기를 통해 일어섰으나 이미 국운은 기울었다. 그렇게 나라는 망했고, 윤곡尹穀과 같은 선비들의 순사가 잇따라 아름다운 이름을 남겼으나 나라는 구하지 못했다. 일본의 사무라이와 조선의 선비들은 목숨을 걸고자 했던 동기가 달랐고, 결정적으로는 죽음을 선택한 시점에서 한 세대의 차이가 있었다. 바로 그 차이가 국운을 갈랐다. 매천梅泉은 바로 이 점을 통절히 여겨 겨우 윤곡에 머물러 배운 자의 의리를 다하는 것에 그칠 뿐이요, 진동에 이르러 나라를 구하지 못했음을 한탄하며 순사했다.
광복 후 약 20년의 혼란기를 거친 뒤, 일본의 메이지유신보다 100여 년이 늦은 1960년대 후반에 와서야 한국은 산업화의 장정에 올랐다. ‘잘 살아보세’라는 목표에 대한 처절한 헌신은 메이지유신의 치열함을 능가했고, 40여 년의 절치부심 끝에 마침내 국운 상승의 기운에서 일본을 눌렀다. 그러면 된 것인가? 이제 한국은 일본을 극복한 것인가? < 머리글 >
조선을 탐한 조슈 사무라이
막부 말기 일본에는 약 260개의 번(藩. 도쿠가와 막부시대 1만 석 이상의 영지를 보유했던 봉건 영주의 직할령)이 있었다고 하는데, 조슈 번이 어떻게 한 시대를 뒤흔들 정도로 수많은 인재를 동시에 배출할 수 있었을까? 그것도 불과 다다미 여덟 장의 초라한 시골 학숙이 분화구가 되어 폭발적으로 인재를 쏟아낼 수 있었을까? 이 시골 학숙(쇼카손주쿠)에서는 도대체 무엇을 가르쳤기에 제자들이 목숨을 걸고 막부 체제를 타도하고 천황국가를 건설한 주역이 되었을까? 그들의 칼끝은 왜 조선을 겨누었을까? < 1장 >
개항 시기만큼 벌어진 한 . 일 근대화의 격차
조선이 1876년 2월에 일본과「강화도조약」을 체결한 뒤 서구 열강과 본격적인 수교에 나선 것은 미국(1882년 5월)과의「조미수호통상조약」이 시작이었다. 그 후 영국·독일(1883년 11월), 이탈리아(1884년 6월), 러시아(1885년 10월)와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했다. 주목할 점은 일본이 수교를 위한 화친 조약을 선행하고 3∼4년의 시간이 흐른 뒤 통상(무역) 조약을 체결한데 비해, 조선은 수교와 통상 조약을 동시에 체결했다는 사실이다. 일찍 문을 연 일본은 시간적인 여유를 가지고 단계적으로 시장을 열면서 시행착오를 교정해 나갔지만, 출발이 늦었던 조선은 그와 같은 시행착오를 교정할 시간적인 여유가 없었다. 조선과 일본의 개국(수교) 시점 자체도 22년(일본 1854년 : 미국 - 조선 1876년 : 일본)의 격차가 있지만, 서구 열강을 대상으로 한 실질적인 개항(통상)을 따지면 그 격차는 24년(일본 1858년 : 미국 - 조선 1882년 : 미국)으로 벌어진다. 이 기간에 일본은 근대화를 위한 국체 변경(왕정복고)과 국가 제도의 개혁(폐번치현 : 번을 폐지하고 현을 설치)을 거의 마무리했고, 조선은 이 24년간의 격차를 극복하지 못하고 일본에 합병됐다. < 1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