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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는 신이다

그대는 신이다

슈리 H.W.L. 푼자 (지은이), 김병채 (옮긴이)
슈리크리슈나다스아쉬람
26,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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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는 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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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제목 : 그대는 신이다 
· 분류 : 국내도서 > 종교/역학 > 명상/선
· ISBN : 9788991596887
· 쪽수 : 356쪽
· 출판일 : 2023-06-25

책 소개

“그대는 신이다.”라는 말은 “그대는 붓다다.”와 같은 말이다. 물이 하나이듯이 진리는 하나이다. 그 진리는 생각 너머에 있다. 그러니 자신이 좋아하는 말을 쓰면 된다. 저자는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생각을 하지 말라고 한다. 생각에는 그 사람이 윤회할 내용이 담겨져 있다. 그래서 끊임없이 침묵하라고 한다.

목차

서문 8
개정판 서문 12
제1장 비차라 – 나 탐구 15
제2장 근원으로 돌아가십시오. 27
제3장 ‘나’를 수술하십시오. 51
제4장 나 탐구 61
제5장 탐구가 자유입니다. 73
제6장 나는 누구인가? 89
제7장 찾기를 포기하십시오. 109
제8장 ‘나’ 너머에 있는 것 133
제9장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마십시오. 145
제10장 깨달았다고 말한다면 환영 속에 있는 것입니다. 157
제11장 그대는 이미 나 안에 있습니다. 177
제12장 의심은 그대를 수백 번 죽일 수 있습니다. 193
제13장 마음을 잃는 것을 두려워 마십시오. 213
제14장 신은 보이는 대상이 아닙니다. 235
제15장 나는 신입니다. 241
제16장 얻음으로 잃습니다. 257
제17장 더 나아갈 수 없는 곳 275
제18장 생선 바구니를 내려놓으십시오. 289
제19장 그냥 존재하십시오. 303
제20장 모든 것이 브람만입니다. 313
슈리 푼자의 삶 329
산스크리트 용어 풀이 349

저자소개

슈리 H.W.L. 푼자 (지은이)    정보 더보기
파파지는 1910년, 당시 인도에서 가장 존경을 받고 있던 성자 중 한 사람인 스와미 라마 티르타의 누이를 어머니로 하여 펀잡 지방에서 태어났다. 그는 8세 때 진리를 깨달았다. 이 깨달음은 아루나찰라의 성자인 그의 스승, 바가반 슈리 라마나 마하리쉬를 만난 30대 초반에 무성해진다. 그때 이후, 그는 그의 현명한 언어와 바라봄, 교감으로 자신의 현존에서 흘러나오는 조용한 영혼의 힘으로 이 깨달음의 아름다움을 다른 이들과 함께 나누기 시작하였다. 그가 1997년 9월에 육체를 떠나자, 이 힘은 폭발하여 그의 생전보다 더욱 강하게 이 세상에 느껴지고 있다. ... 그는 보이지 않는 아쉬람을 갖고 있었으며, 전통적인 의미로 보았을 때 그는 보이지 않는 스승의 삶을 살았다. 그의 삿상에 참여한 구도자들은 그의 말과 친존에서 기쁨의 웃음을 터뜨렸으며, 햇살처럼 펼쳐지는 행복감에 깊이 잠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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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채(크리슈나다스) (옮긴이)    정보 더보기
경상북도 포항에서 태어나다. 1972년 경북대학교를 졸업하고 난 뒤 다수의 직업을 거친 후 서울의 대기업에서 근무를 하였다. 직장의 일보다는 신을 만나고자 하는 염원이 늘 가슴에 있었다. 어느 날 회사로 돌아가는 길에 명동 성당에 들러 성모상 앞에서 기도를 하였다. “신을 보는 삶을 주소서. 그렇지 않다면 이 삶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럴 수 없다면 저의 생명을 거두어 주소서.”라고 기도한 적도 있었다. 회사 생활은 나의 길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 회사를 그만두었다. 무엇을 할 것인지는 몰랐다. 이 생활은 아니라는 것을 느꼈을 뿐이었다. 충남에 있는 수덕사 근처에서 생활했다. 덕산 성당 신부님으로부터 신학교에 들어갈 것을 권유받았지만, 신을 만나고픈 열정이 더 강했다. 그곳에서 몇 개월 지내다 서귀포로 가서 약 2년간 생활하였다. 부산으로 가서 대학교 강사 생활을 몇 년 하다가 창원에 있는 국립 대학교 교수가 되었다. 가르치다가 명상을 배워야 되겠다는 생각이 일어났다. 그래서 송광사 주위의 암자에 기거하기도 하였다. 법정 스님에게 제자로 받아달라는 부탁을 드리기도 하였다. 성당 고해소 신부님에게 “신이 어디에 계십니까?”고 질문을 하였다. 신부님은 “산과 들에 있지요.”라는 답을 하셨다. 세상에 산과 들이 얼마나 많은 데 하는 생각이 들어서 절망을 느꼈다. 1988년 말 붓다가 태어난 곳인 인도로 명상을 배우러 갔다. 뉴델리에 기거하면서 슈리 오로빈도 아쉬람에 자주 갔다. 그곳의 한 이방인에게 길을 물었다. “제가 어디로 가면 좋습니까?”그분이 답하였다. “알란디로 가세요.”그래서 여정이 시작되었다. 켈커타에서 마더 데레사의 축복을 받기도 했다. 비파사나 아카데미에서 명상을 하다가 마음 너머에 있는 것을 경험했다. 거기에는 찬란한 무엇이 있었다. 그곳의 성자분께서 그것을 사마디라 하셨다. 봄베이의 한 요가 연구소에서 외국풍의 연구원에게 인도에서 가장 성스러운 곳을 물었다. 그는 “티루반나말라이에 있는 아루나찰라 산입니다. 거기에 라마나 아쉬람이 있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라마나는 신이라는 애칭을 가졌으며 동물들과도 대화를 나누시는 분이셨다. 이미 돌아가셨다. 말로의 대화가 없는 곳이었다. 아름다운 아루나찰라 산자락에 고요만이 있었다. 그곳으로 순례를 온 스승과 한 무리의 제자들도 말을 하지 않았다. 눈을 마주하는 것이 전부였다. 많은 것을 느끼게 하였다. 다른 곳들에서는 무엇을 하라고 하는데 이곳에서는 무엇을 하라고 하지 않았다. 3호실의 나의 숙소로 가는 길에 남쪽의 파파지라는 별명을 가지신 나나가루라는 성자 분을 만나고 대화까지 나누었다. 그때는 그분의 메시지를 이해하지 못하였다. 그곳에서 한 달 가량 머물렀다. 깨닫는 것을 다음의 생애들로 미루어야 될 것 같았다. 그래서 고국으로 돌아오고자 하였다. 돌아오기 직전에 북인도의 갠지스 강가인 하리드와르에서 라마나 마하리쉬의 제자 슈리 푼자를 만나 대화를 나누었다. 그분께서는 북쪽의 파파지라는 별명을 지니신 분이셨다. 그분이 말씀하시는 요지는 마음이 나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 말의 의미를 이해했다. 그래서 나는 마음을 내려놓았다. 그러자 순식간에 이 현상계를 벗어나 빛이 끝없이 펼쳐진 하늘로 갔다. 다시 돌아온 옮긴이에게 “그것이 깨달음입니다. 그대는 붓다입니다. 찾을 것이 더 없습니다. 당장 고국으로 돌아가십시오.”라고 말씀을 주셨다. 고국으로 돌아와 정기적으로 티루반나말라이에 있는 라마나 아쉬람을 방문하였다. 2016년에도 라마나스라맘으로 가서 저녁 찬송인 파라야나를 하였다. 온 사랑과 정성을 다하여 라마나님을 흠모하였다. ‘바리 바리 라마나 구루’라는 구절을 찬송하다가 또 마음 너머로 갔다. 나는 경전들에 대한 아무런 지식도 없이 아루나찰라의 은총만으로 깨달음을 경험한 것 같다. 창원에 슈리 크리슈나다스 아쉬람을 열고 소수의 사람들과 진리를 나누는 대화의 장을 마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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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제15장
나는 신입니다.


신에게 가까이 있고 싶습니다.
책에서 뭔가를 읽고 있는 여학생처럼 그대는 신을 말하고 있습니다. 신을 흥미의 대상으로, 그대 자신을 주체로 만들고 있습니다. 신은 대상화될 수 없습니다. 신은 주체 그 자체입니다. 그대가 “나는 존재이다.I Am”라고 말할 때, 이 말의 의미는 “나는 신이다.”라는 뜻입니다. 이것을 안다면 그대의 개인적 동일시는 끝납니다. 산스크리트는 이것을 ‘아함 브람마스미’라고 합니다. 이것은 “나는 신-브람만-아트만이다.”를 뜻합니다. 신에게 다가가길 원한다면 신을 대상화하는 것을 그만두십시오. 대상화는 분리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신이다I Am God.”를 깨우치려는 강함을 지니십시오.

그러므로 신은 이 환영을 보는 자입니다.
다시 그대는 보는 자와 보이는 것의 관계를 만들었습니다.

나와 자아 사이에, 실재와 환영 사이에 큰 차이가 있는 것처럼 생각됩니다.
이것은 실재이고 저것은 환영이다. 이것은 자아이고 저것은 나라고 말하는 것은 마음이 만들어 낸 것입니다. 이것은 마음의 창조물입니다!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경험을 하다가, 갑자기 큰 블랙홀에 있는 저를 발견했습니다.
이 경험으로 그대는 무엇을 했습니까? 이 경험은 얼마나 머물렀습니까? 이제 이 경험을 다시 한다 해도 그대는 이 경험을 옛날 경험과 비교할 것입니다. 그래서 그대는 지금의 경험 또한 잃을 것입니다. 그대는 이 경험을 하면서 왜 그것을 분석하고 있습니까? 이해하려는 마음이 일어나 그대는 그 경험을 잃습니다.

그 경험을 지키도록 노력했습니다.
어떻게 텅 빈 상태를 지킬 수 있습니까? 결코 존재하지 않았던 것을 그대가 어떻게 지킬 수 있습니까? 어떻게 지킬 수 있습니까? 그대도 알다시피, 어디에선가 잘못이 있습니다.
마음과 이 경험은 함께 할 수 없습니다. 그대는 맺은 우정들 중 하나를 포기해야 합니다. 신과 마음 중 원하는 것을 선택하십시오! 그대가 삿상에 앉기 전에 이것을 결정해야만 합니다.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고 있다.”가 유일한 경험이라는 것을 알아야만 합니다. 그대는 40년 전에는 여기에 없었고 지금으로부터 50년 후에도 여기에 없을 것입니다. 전과 후
에 있는 것은 또한 지금이며 실재임에 틀림없습니다.
다음에는 조심하십시오. 마음에 의해 씻겨가지 마십시오. 그대 마음 안에 아무런 차별이 없어야 합니다. “나는 환영이다”, “나는 아트만이다.”를 이해하려 해서도 안 됩니다. 왜 이해하려고 합니까? 아무것도 없는데 그대가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무엇인가가 있을 때만 그대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대가 뜻하는 대로 움직여서 나는 흐뭇합니다.

제가 그것을 묘사하려고 할 때 그것은 증발합니다.
그것은 묘사할 수 없습니다. 그것을 기술하려 애쓴다면, 그대는 기술해야 하는 것을 잊게 됩니다.

저에게 다른 가르침을 주시겠습니까?
그대에게 숙제를 주겠습니다. “이것 모두는 무엇인가?”라는 질문 입니다. 이것에 답하십시오. 질문을 이해합니까?

‘이것’을 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문제입니다!
그대가 이것에 답한다면 나는 기쁠 것입니다. 그대는 현명합니다. 질문에 답하는 데 그대의 현명함이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보고 싶습니다.



제가 신의 존재를 믿도록 해 주시겠습니까? 저는 신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무엇인가에 대한 믿음을 갖고 싶습니다.
인간이 신을 이해할 수 있습니까? 누가 신을 이해할 것입니까? 신을 이해할 수 있다고 누가 그대에게 말했습니까? 그대는 신은 말할 것도 없고, 그대 자신이 누구인지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대 자신을 먼저 이해하십시오.
어떤 것에 대한 믿음을 갖지 마십시오. 그대는 이미 거기에 있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믿음은 종교 창시자들이 만든 단어입니다. 믿음을 가지면 그대는 천국으로, 믿음이 없으면 그대는 지옥으로 간다고 그들은 말합니다. 믿음은 옳지 않습니다. 차라리 그대는 실재로부터 일어나는 사물들의 존재 방식을 찾아내야만 합니다! 그대가 누구인지를 알아내라고 나는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위해서는 믿음은 필요치 않습니다.
그대의 옷에서, 그대의 두파다에서 시작하십시오! 나는 두파다가 아닙니다. 다음으로 옷, 시계, 반지로 가십시오. 그대는 옷, 시계, 반지가 아닙니다. 이것들은 그대의 것이지만, 결코 그것들은 그대가 아닙니다. 이것을 깨우치십시오! 나는 머리카락, 안경, 코가 아닙니다. 코는 내 것이지만 나는 코가 아닙니다. 이것은 상식적인 이해입니다. “나는 코다!”라
고 그대는 말하지 않습니다. 피부는 그대의 것이지만, 피부가 상하면 성형수술로 대체할 수 있습니다. 나는 피, 뼈, 골수가 아닙니다. 나는 내 몸 안의 액체가 아닙니다. 이것들은 내가 아닙니다. 나에게 속하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이 집은 내 것이지만, 나는 집이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이 남습니까? 남아 있는 것은 집주인입니다. 남아 있는 것은 소유물이 아닌 소유자입니다. 나는 그대 질문에 답하고 있습니다. 자, 무엇이 남아 있습니까? 내가 마음, 몸, 감각이 아닐 때 남는 것은 무엇입니까?

제 영혼입니다.
아! 훌륭합니다. 하지만 그 대답에서도 그대는 영혼을 소유물로 간주했습니다. 나의 집, 나의 차, 나의 영혼처럼 거기엔 차이가 없습니다! 영혼을 소유한 그대는 누구입니까? 영혼이 몸이나 피에 속한다고 말한다면 전혀 적당하지 않습니다. 이성적인 답은 무엇입니까?
그대는 신을 믿고 싶어 합니다. 나는 그대에게 우선 그대의 나, “나는 신이다.”임을 믿으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그대는 결코 실패하지 않을 것입니다. 신을 믿는 것은 신이 되는 것입니다. 신을 아는 것은 신이 되는 것입니다! 신을 이해하는 것은 신이 되는 것입니다. 신 그 자신 이외에 누가 신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그대가 신을 이해한다면 신은 그대의 대상이 됩니다. 그렇다면 누가 주체입니까? 신이 주체입니다! 신은 객관화되는 대상이 아닙니다. 신은 주체입니다. 그러므로 그대가 신의 대상이 되는 것이 더 낫습니다. 그래야만 일이 될 것입니다. “나는 신이다.”라고 말하는데,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이것은 최상의 믿음, 최상의 신앙입니다. 다른 것에 대한 믿음을 가지는 대신, 그대가 신이라는 그대의 나에 대한 믿음을 가지십시오. 이것이 최상의 믿음입니다. 그래야 그대는 정상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대는 비정상이거나 정상 이하입니다.



사람들 모두가 그것을 가지고 있지만, 저는 가지지 못해서 속상합니다.
분리가 고통입니다. 그대는 ‘다른 사람’과 분리되어 있다고 느낍니다. 그래서 고통스럽습니다. 이것이 전부입니다. 그대는 숨어 있으며, 그대의 진정한 모습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습니다.
그대는 모든 것을 포함하는 온전한 하나입니다. 그대는 모든 것 그 자체입니다. “나는 다른 존재이다”, “다른 사람들은 어떤 다른 존재이다.”라는 개념을 버리십시오.
사람들은 나가 단전에 자리 잡고 있다고 말합니다.
원에는 하나의 중심이 있을 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중심이 단전
에 있다면 원주는 무엇입니까?

몸입니다.
나는 조건 지어져 있지 않습니다. 나가 단전에 있다고 하는 것은 그것을 조건 짓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조건 지어질 수 없습니다. 아무런 중심이 없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몸이라는 개념을 지닌다면, 그때 그대는 단전에 중심이 잡혀 있다는 개념을 지닐 수 있습니다. 몸 속에 있는 ‘중심’이라는 개념들은 모두 집중의 대상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중심들에서 오는 효과를 나는 본 적이 없습니다. 중심과 원주가 있다는 개념을 포기할 때, 아마도 일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원주가 없다면 집중될 것도, 집중하는 자도 없는데, 무엇이 중심입니까?
중심들을 고정시키지 마십시오! 이것은 단지 마음의 속임수입니다. 중심은 그대를 자유에서 멀어지게 하기 위한 속임수의 마음일 뿐입니다. 한 생각을 어느 곳에 내리게 하지 마십시오. 그러면 그대는 이것을 볼 것입니다. 어느 곳에든 생각이 머물게 하지 마십시오. 그러면 마음은 어디로 가겠습니까? 이 중심들에 시간을 주지 마십시오. 40~50년을 이 중심들에 투자한 사람들을 많이 보았지만 유일한 결과는 굴레에 더 집착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제게는 신을 알려는 강한 갈망이 있었습니다. 이 갈망으로 저는 진리와 하나 되는 수많은 경험을 했습니다.
진리를 수없이 경험했다는 것은 없습니다. 진리에는 오직 한 번의 경험이 있을 뿐입니다. 신은 그대에게 그 경험을 줄 수 없습니다. 신을 강하게 갈망한다면, 이 신은 그대를 교회로 보낼 것입니다. 신은 교회에서만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진리에는 아무런 신이 없습니다. 진리는 진리입니다. 신은 그대 자신의 창조물입니다. 이 말은 논쟁거리가 되겠지만, 신은 교회에서만 살아 있을 뿐입니다.

최근에, 저는 마음이 없는 경험을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마음이 교활함을 압니다.
마음이 거기에 없는데, 누가 그것을 경험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마음이 교활하다는 것을 안다는 것 그 자체가 마음의 교활함입니다. 깨어나십시오!

제 마음은 매우 강하고 영리합니다. 저를 도와주시겠습니까?
왜 패배를 받아들였습니까? 왜 마음이 강하다는 것을 인정합니까? 마음은 그대의 주인이 아닌, 하인이 되어야 합니다. 하인이 되면 마음은 복종하지만, 주인이나 교사가 되면 마음은 도살자가 될 뿐입니다! 이 마음으로 패배를 느끼지 마십시오. 그대는 마음을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너무나 강하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습니까? 그대는 결코 마음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은 유령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대에 게 유령이 보입니다. “나에게는 강한 마음이 있다.”거나 “나는 마음 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유령이 출몰하고 있습니다. 삿상에 심리치료사가 한 명 있습니다. 그가 유령 문제를 도와줄 것입니다. (웃음) 그는 시간당 100달러를 요구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령으로 괴로움을 당하면 대가가 비쌀 것입니다.
생각이 일어나는 것을 의식한다면 생각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알아 듣겠습니까? 나는 반복해서 말할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생각이 일어날 때, 생각을 바라보십시오. 그렇게 하십시오. 이해한다면 말하십시오. 평생 동안 생각이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생각을 바라보고 무엇이 일어나는지 말하십시오.
방심하지 마십시오. 생각이 오도록 초대하십시오. “오, 생각이여! 너를 좋아한다. 너를 사랑한다!”라고 말하십시오. (웃음) 그리고는 무슨 생각이 오는지 보십시오.

생각이 오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생각을 못 오게 하는 비법을 그대는 알고 있습니다. 그대가 젊은 나이에 럭나우로 와서 기쁩니다. 생선 시장 대신 삿상으로 오게 만든 그대 안의 강한 갈망이 있음에 틀림없습니다. 이야기를 하나 하겠습니다.
여자 낚시꾼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강에서 낚은 물고기를 팔기 위해 시장에 가곤 했습니다. 어느 날 저녁, 강한 폭풍이 불어 닥쳐 머리에 물고기 바구니를 이고는 걸을 수조차 없었습니다. 거리에서 꽃가게를 하는 여인이 말했습니다. “자매님, 여기 오셔서 폭풍이 멈출 때까지 쉬시지요. 바람이 너무 세차게 불어서 지금은 걸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여자 낚시꾼이 가게로 들어왔습니다. 안에는 온통 장미와 재스민 같은 꽃들이 가득했습니다.
밤이 왔지만, 여자 낚시꾼은 잠들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꽃가게 주인에게 말했습니다. “잠을 잘 수가 없군요. 곳곳에 좋지 않은 꽃 냄새가 배어 있어서 이 냄새 때문에 두통이 납니다. 그래서 자매님이 허락하신다면, 생선 바구니를 베고 잤으면 합니다.” 그녀는 그렇게 했고, 즉시 코를 골며 잠이 들었습니다.
이처럼 생각이라는 쓰레기를 지니고 살던 사람들은 생각이 없이는 잠을 잘 수가 없습니다. 모든 생각은 온 연못을 망치는 물고기와 같습니다. 그대의 마음에 생각이 있으면 그대는 평화로울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생각도 그대의 마음 안에 머물러 있지 못하게 하십시오. 그때 그대는 다른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살아가는 동안 단 일 초만이라도 그렇게 해보십시오. 여러 달 동안, 여러 해 동안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단 일 초 동안이라도 그렇게 하십시오! 그대의 마음 안에 생각을 허락하지 마십시오!
(파파지는 기침을 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쉰 목소리로 말한다.) 그대도 알다시피 모든 단어는 힘이 있습니다. “나는 그대를 사랑한다.”라고 말할 때, 그것은 힘을 갖고 있습니다. 욕을 할 때도 힘이 있습니다. 나쁜 말은 상처를 주고, “사랑합니다.”와 같은 좋은 말은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말은 굉장한 힘을 갖고 있습니다. 나는 ‘물고기’라는 단어를 사용해 왔고, 그래서 (더욱 기침하기 시작한다) 이것이 말의 힘입니다.



저의 신-나를 깨닫고 싶습니다. 그러나 저와 그것 사이에는 베일이 있는 듯합니다.
그대와 그것을 가로막는 베일은 그대 마음 안에 있는 갈망입니다. 그대는 큰 의식에 도달하려는 갈망이 있습니다. 이것이 그대와 그것을 가로막는 베일입니다. 철저하게 갈망도 생각도 없어야만 합니다. 갈망은 생각입니다. 갈망이 있으면 그대는 마음과 갈망의 대상을 가집니다. 그러나 신은 대상이 아닙니다. 신은 주체입니다. 신은 보이지 않습니다. 이르거나 도달되는 것도 아닙니다. 신은 보는 자입니다! 어떤 것을 보려고 애쓰지 마십시오. 신은 대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모든 대상은 시작과 끝이 있습니다. 그러나 크나큰 의식은 시작도 끝도 없습니다. 잠시 동안이라도 그냥 어떤 것을 갈망 하지 마십시오. 그리고는 ‘위대한 의식’과 ‘위대하지 않은 의식’이 어디에 있는지 나에게 말하십시오.
이제 베일은 어디에 있습니까? 이것, 저것을 원하기에 베일이 만들어집니다. 그러나 갈망이 없을 때 신이 스스로 와서 그대의 가슴 안에 앉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슴에 있는 의자가 갈망의 쓰레기들로 가득하다면 신이 어디에 앉을 것입니까? 신은 절대적으로 순수한 자리를 필요로 합니다. 오직 그때만이 신은 초대받지 않아도 와서 그 의자를 영원히 소유할 것입니다. 그때 그대가 하는 모든 것은 신이 하는 것이 됩니다. 그때 그대는 어떤 것도 필요치 않습니다.
이름과 모습을 모두 버리십시오. 그러면 그대와 나를 가로막는 아무런 베일이 없을 것입니다. 베일이 걷혀질 때 마지막 남은 일은 다른 사람의 베일들을 걷어 주는 자비입니다. 이 일은 자신의 베일을 걷어 버린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자아를 가진 사람이 어떻게 다른 사람들의 자아를 없앨 수 있겠습니까? 지금 자아를 없애십시오. 그대가 인간의 모습으로 있을 때, 자아를 없애려는 갈망이 있을 때, 자아를 없애십시오. 해방을 갈망하지 않는 사람은 꼬리 없는 동물에 불과합니다. 진정한 사람은 사람으로 살면서 베일을 없앤 사람입니다. 이것을 의심하지 마십시오. 그대는 그것을 했습니다.

어떤 벽이 제가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도록 막는 것 같습니다. 이 베일은 제가 살아오는 동안 배웠던 것으로 만들어진 벽입니다.
이 벽은 개념입니다. 벽을 부순다면 안도 바깥도 없을 것입니다. 그대는 생각하지 않아야 합니다. 생각으로는 개념을 없앨 수 없습니다. 이 개념은 존재하지 않는 상상일 뿐입니다. 뱀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뱀은 결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항상 새끼줄이었습니다. 그대는 새끼줄을 잘못 보고서 그것을 뱀이라 부릅니다. 그대가 만든 창조물들은 그대 스스로 책임져야 합니다. 새끼줄이 뱀을 만든 것이 아니라 그대가 뱀을 만들었습니다. 그렇게도 많은 고통을 그대에게 주었던 이 개념들이 무엇인지 찾아내십시오.
그냥 침묵하십시오. 그리고 개념을 보십시오. 그러면 개념이 더 이상 거기에 없을 것입니다. 그대를 불행으로 몰아넣는 개념들을 바라보십시오. 그저 바라보기만 하십시오! 그대에게 고통을 주는 개념이 일어나는 곳을 바라보는 데는 노력이 필요치 않습니다. 그대가 이 개념을 창조했습니다. 그리고 결코 존재하지도 않고 있는 그 뱀을 그대는 좋아합니다. 이 개념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대는 평화, 사랑, 행복, 희열 속에서 늘 잘 있습니다. 이것이 그대의 성품입니다. 그 이외의 모든 것은 존재하지 않는 개념들입니다. 부모, 사제, 그리고 사회가 그대에게 내다 버린 개념들, 의도들, 관념들, 이 모두를 버리십시오. 너무나 많은 쓰레기들이 그대의 머리와 가슴 위에 놓여 있습니다. 그대는 쓰레기 속에서 길을 헤매고 있습니다. 자, 같은 질문을 다시 해보십시오.

할 수 없습니다. 더 이상 질문이 나오지 않습니다.
훌륭합니다! 그대의 얼굴을 보니 이제 모든 것이 변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훌륭합니다! 이것이 그대의 본성입니다. 본성에 머무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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