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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는 누구인가

그대는 누구인가

슈리 H.W.L. 푼자 (지은이), 엘리 잭슨 베어 (엮은이), 크리슈나다스(김병채) (옮긴이)
슈리크리슈나다스아쉬람
20,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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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는 누구인가
eBook 미리보기

책 정보

· 제목 : 그대는 누구인가 
· 분류 : 국내도서 > 종교/역학 > 명상/선
· ISBN : 9788991596016
· 쪽수 : 284쪽
· 출판일 : 2024-11-25

책 소개

이 칼리 유가의 시대에 슈리 라마나는 삿트와의 땅에 침묵과 ‘나’ 탐구의 기초를 다졌다. 이 때문에 그는 마하리쉬라 불린다. 슈리 푼자는 이 침묵의 불꽃을 시장에 던졌다. 그는 활동의 땅에다 오묘한 불씨를 당겼다.
이 칼리 유가의 시대에 슈리 라마나는
삿트와의 땅에
침묵과 ‘나’ 탐구의 기초를 다졌다.
이 때문에 그는 마하리쉬라 불린다.

슈리 푼자는 이 침묵의 불꽃을
시장에 던졌다.
그는 활동의 땅에다
오묘한 불씨를 당겼다.
그 불씨로 온 세상이 불타고 있다.
이 때문에 그는 모든 이들로부터
사랑하는 아버지
파파지라 불린다.

―그를 따르는 한 아들이

목차

개정판 서문 10
1. 자유의 외침 _ 15
2. 정화 _ 29
3. 그대는 누구인가 _ 33
4. 의심, 두려움 및 장애물 _ 51
5. 마음 그리고 자아 죽이기 _ 85
6. 생각과 텅 빔 _ 95
7. 수행과 명상 _ 117
8. 무엇을 해야 하는가 _ 141
9. 해방에 이르게 하는 수단 _ 163
10. 삼사라인가, 니르바나인가 _ 171
11. 릴라 _ 183
12. 욕망 _ 197
13. 깨달음 _ 219
14. 스승 _ 231

슈리 푼자의 삶 _ 249
용어 풀이 _ 273

저자소개

슈리 H.W.L. 푼자 (지은이)    정보 더보기
파파지는 1910년, 당시 인도에서 가장 존경을 받고 있던 성자 중 한 사람인 스와미 라마 티르타의 누이를 어머니로 하여 펀잡 지방에서 태어났다. 그는 8세 때 진리를 깨달았다. 이 깨달음은 아루나찰라의 성자인 그의 스승, 바가반 슈리 라마나 마하리쉬를 만난 30대 초반에 무성해진다. 그때 이후, 그는 그의 현명한 언어와 바라봄, 교감으로 자신의 현존에서 흘러나오는 조용한 영혼의 힘으로 이 깨달음의 아름다움을 다른 이들과 함께 나누기 시작하였다. 그가 1997년 9월에 육체를 떠나자, 이 힘은 폭발하여 그의 생전보다 더욱 강하게 이 세상에 느껴지고 있다. ... 그는 보이지 않는 아쉬람을 갖고 있었으며, 전통적인 의미로 보았을 때 그는 보이지 않는 스승의 삶을 살았다. 그의 삿상에 참여한 구도자들은 그의 말과 친존에서 기쁨의 웃음을 터뜨렸으며, 햇살처럼 펼쳐지는 행복감에 깊이 잠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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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 잭슨 베어 (엮은이)    정보 더보기
1947년에 뉴욕 브루클린에서 태어났다. 수많은 영적 전통을 배우며 수행하던 도중 1990년에 인도에서 스승 슈리 푼자를 만나 영원한 자유를 깨달았다. 그 후 서구에서 영적 지도자로 활동하고 있으며, 오랫동안 연구해 온 에니어그램의 숨겨진 가치를 이용하여 진정한 자기 탐구의 길을 돕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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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채(크리슈나다스) (옮긴이)    정보 더보기
경상북도 포항에서 태어나다. 1972년 경북대학교를 졸업하고 난 뒤 다수의 직업을 거친 후 서울의 대기업에서 근무를 하였다. 직장의 일보다는 신을 만나고자 하는 염원이 늘 가슴에 있었다. 어느 날 회사로 돌아가는 길에 명동 성당에 들러 성모상 앞에서 기도를 하였다. “신을 보는 삶을 주소서. 그렇지 않다면 이 삶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럴 수 없다면 저의 생명을 거두어 주소서.”라고 기도한 적도 있었다. 회사 생활은 나의 길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 회사를 그만두었다. 무엇을 할 것인지는 몰랐다. 이 생활은 아니라는 것을 느꼈을 뿐이었다. 충남에 있는 수덕사 근처에서 생활했다. 덕산 성당 신부님으로부터 신학교에 들어갈 것을 권유받았지만, 신을 만나고픈 열정이 더 강했다. 그곳에서 몇 개월 지내다 서귀포로 가서 약 2년간 생활하였다. 부산으로 가서 대학교 강사 생활을 몇 년 하다가 창원에 있는 국립 대학교 교수가 되었다. 가르치다가 명상을 배워야 되겠다는 생각이 일어났다. 그래서 송광사 주위의 암자에 기거하기도 하였다. 법정 스님에게 제자로 받아달라는 부탁을 드리기도 하였다. 성당 고해소 신부님에게 “신이 어디에 계십니까?”고 질문을 하였다. 신부님은 “산과 들에 있지요.”라는 답을 하셨다. 세상에 산과 들이 얼마나 많은 데 하는 생각이 들어서 절망을 느꼈다. 1988년 말 붓다가 태어난 곳인 인도로 명상을 배우러 갔다. 뉴델리에 기거하면서 슈리 오로빈도 아쉬람에 자주 갔다. 그곳의 한 이방인에게 길을 물었다. “제가 어디로 가면 좋습니까?”그분이 답하였다. “알란디로 가세요.”그래서 여정이 시작되었다. 켈커타에서 마더 데레사의 축복을 받기도 했다. 비파사나 아카데미에서 명상을 하다가 마음 너머에 있는 것을 경험했다. 거기에는 찬란한 무엇이 있었다. 그곳의 성자분께서 그것을 사마디라 하셨다. 봄베이의 한 요가 연구소에서 외국풍의 연구원에게 인도에서 가장 성스러운 곳을 물었다. 그는 “티루반나말라이에 있는 아루나찰라 산입니다. 거기에 라마나 아쉬람이 있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라마나는 신이라는 애칭을 가졌으며 동물들과도 대화를 나누시는 분이셨다. 이미 돌아가셨다. 말로의 대화가 없는 곳이었다. 아름다운 아루나찰라 산자락에 고요만이 있었다. 그곳으로 순례를 온 스승과 한 무리의 제자들도 말을 하지 않았다. 눈을 마주하는 것이 전부였다. 많은 것을 느끼게 하였다. 다른 곳들에서는 무엇을 하라고 하는데 이곳에서는 무엇을 하라고 하지 않았다. 3호실의 나의 숙소로 가는 길에 남쪽의 파파지라는 별명을 가지신 나나가루라는 성자 분을 만나고 대화까지 나누었다. 그때는 그분의 메시지를 이해하지 못하였다. 그곳에서 한 달 가량 머물렀다. 깨닫는 것을 다음의 생애들로 미루어야 될 것 같았다. 그래서 고국으로 돌아오고자 하였다. 돌아오기 직전에 북인도의 갠지스 강가인 하리드와르에서 라마나 마하리쉬의 제자 슈리 푼자를 만나 대화를 나누었다. 그분께서는 북쪽의 파파지라는 별명을 지니신 분이셨다. 그분이 말씀하시는 요지는 마음이 나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 말의 의미를 이해했다. 그래서 나는 마음을 내려놓았다. 그러자 순식간에 이 현상계를 벗어나 빛이 끝없이 펼쳐진 하늘로 갔다. 다시 돌아온 옮긴이에게 “그것이 깨달음입니다. 그대는 붓다입니다. 찾을 것이 더 없습니다. 당장 고국으로 돌아가십시오.”라고 말씀을 주셨다. 고국으로 돌아와 정기적으로 티루반나말라이에 있는 라마나 아쉬람을 방문하였다. 2016년에도 라마나스라맘으로 가서 저녁 찬송인 파라야나를 하였다. 온 사랑과 정성을 다하여 라마나님을 흠모하였다. ‘바리 바리 라마나 구루’라는 구절을 찬송하다가 또 마음 너머로 갔다. 나는 경전들에 대한 아무런 지식도 없이 아루나찰라의 은총만으로 깨달음을 경험한 것 같다. 창원에 슈리 크리슈나다스 아쉬람을 열고 소수의 사람들과 진리를 나누는 대화의 장을 마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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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깨달음이나 나 실현은 자각, 즉 참 존재(Being)에 대한 자명한 자각입니까?

그렇습니다. 깨달음이란 자각입니다. 완전한 자각 혹은 참 존재는 같은 것입니다. 차이가 없습니다. 완전한 자각. 모든 것이 거기에 있습니다. 그대는 그 자각입니다.

제게는 이 자각이 있습니다. 하지만 모두 알다시피 스승님의 깨달음은 저의 깨달음보다 훨씬 더 깊습니다. 차이가 무엇입니까?

그대가 차이를 만듭니다. 그러지 않으면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만약 제가 스승님 자리에 앉아 있으면, 일주일 뒤에는 아무도 찾아오지 않을 것입니다.

한번 해 보십시오. 이리 오십시오. (모두 웃음) 나도 이 차이점을 나의 스승께 질문했습니다. 나의 스승은 차이가 없다고 했고, 나는 그 말을 받아들였습니다.

그것이 문제인 것 같습니다. 저는 충분히 받아들이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게는 그것이 있습니다.

충분히 받아들이지 않는다고요? (웃음) 나는 그 말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러자 아무 문제도 없었습니다. 그대가 받아들이면 아무런 문제도 없을 것입니다. “나는 자유롭다.”를 받아들이면 그대는 자유롭습니다. “나는 자유롭지 않다.”를 받아들이면 자유롭지 않습니다.

어제 스승님께서는 누구나 언젠가는 진리를 직면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제가 그 점을 거리낌 없이 믿는다면, 그때 저는 깨달은 것입니까?

아닙니다. 참 존재(I AM)는 그대가 믿든 믿지 않든 상관이 없습니다. 참 존재의 관점에서는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참 존재를 완전히 받아들이십시오. 그것이 전부입니다. 그대가 받아들임에 정도를 둔다면, 예를 들어 “천천히 받아들여 보자. 받아들임을 실천해 보자.”라고 하면, 그대는 천천히 받아들일 것입니다. 그것은 그대에게 달려있습니다. 그것은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깨달음은 오늘, 내일 혹은 그 다음 날에도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같은 채로 있습니다. 지금 얻든지 일 년 뒤 혹은 이 생애 동안에 얻든지 깨달음은 변치 않을 것입니다.
그대는 깨달음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완전히 받아들여 보십시오. 그러면 어디에 문제가 있습니까? 그대는 이미 자유롭습니다. 그대가 자유롭지 않다고 누가 말합니까? 그대는 깨달음에 문을 열지 않고 있습니다. “나는 자유롭다.”라고 말하기조차 두려워합니다. 나는 그대가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사람들은 “나는 묶여 있다. 나는 고통스럽다. 나는 비참하다.”라고 말할 때는 편하게 말합니다. 그런데 “나는 자유롭다! 나는 불멸이다!”라고는 아무도 말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누구의 잘못입니까? 그대가 말하고 생각하는 일이 그대로 일어날 것입니다. 그것은 실현될 것입니다, 지금 아니면 내일. “나는 자유롭다.”라고 생각하십시오. 그러면 그대는 자유롭습니다.
사람들은 자유를 간절히 원하지 않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유를 갈망합니까? 나는 그대가 이미 자유롭다고 말하지만 그대는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대는 무엇인가를 하고 싶어 합니다. 자유는 노력이 필요 없습니다. 다른 것을 얻으려면 노력이 필요할 수 있습니다. 자유는 무료입니다. 노력이 필요 없습니다.

더 이상 애쓰지 말고 그냥 받아들이라는 말씀이군요.

그러면 자유가 있을 것입니다.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으면 여기에 자유가 있습니다. 붙잡으려 하면 자유는 더 멀리 가 버립니다. 이미 여기에 있는 것을 붙잡으려 애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잘 배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웃으며) 훌륭합니다. 이 점을 배웠다면 그대의 공부는 끝났습니다. 어떤 노력도 하지 않으면 그대는 바로 그것(That)이 됩니다.


그대는 항상 자유롭습니다! 자유를 찾아다닐 필요가 없습니다. 다른 무엇은 찾아다녀야 합니다. 자유, 깨달음, 평화, 희열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은 여기에 있습니다. 지금 여기에 있기 위해 무슨 노력이 필요합니까? 그대 자신으로 있기 위해 해야 할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대가 어디로 돌아갈 수 있겠습니까? 다른 곳에 있을 때에만 돌아와야 합니다. 어디에서 돌아와야 합니까? 집에 있다면 비행기를 탈 필요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 사회, 부모에게서 빌린 잘못된 생각들을 버리기만 하면 됩니다. 괴롭거나 고통스러운 것은 그대의 성품이 아닙니다.

그릇된 생각은 금세 사라집니까 아니면 천천히 사라집니까? 천천히 사라지겠지요?

그대를 속이는 마음만이 ‘천천히’라고 말합니다. 바로 지금 존재하는 데 무슨 이해가 필요합니까? 바로 지금 존재하는 데, 이미 그대인 채로 존재하는 데는 이해나 오해가 필요 없습니다.

그러면 왜 제가 여기로 왔습니까?

그대가 ‘여기’로 온 까닭은 자신이 ‘거기’에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제가 “나는 무엇인가?”를 생각하다 보면 질문이 매우 복잡해져 버립니다. 그런데 스승님은 단순하게 정리하십니다. 스승님은 “나는 나다.”(I AM the Self)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이 단순함은 그대가 소화하기에는 너무 어렵습니다.

저는 ‘나는 나다.’라고 하는 대신 나의 개념이 무엇인지를 찾고 있습니다.

그대는 어떤 생각도 개념도 만들 필요가 없습니다. 이것은 행위자 자신입니다. 그대는 이 점에 동의해야 합니다. 동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대가 어떤 사람에게 “나는 자신(나)이 아닌가요?”라고 물을 수 있습니까? 그러면 그 사람이 그대를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웃음) ‘나’라는 단어를 완전히 알 때 그대는 완성됩니다. 모든 것이 ‘나’ 안에 담겨 있습니다.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그대가 자신을 ‘나’라는 이름으로 부른다면 아무런 어려움이 없을 것입니다. 그대는 영원이 될 것입니다. 어떤 죽음도 그대를 건드릴 수 없습니다. 그냥 나로 머무십시오. 그대가 할 일은 그것이 전부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그렇게 어렵습니까? ‘나는 나’라고 세례를 베푸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입니까? 그것이 전부입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니 단순하군요.

너무 단순하여 받아들이기 어렵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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