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이미지

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사회과학 > 사회운동 > 노동운동
· ISBN : 9788992792271
· 쪽수 : 336쪽
· 출판일 : 2011-12-05
책 소개
목차
서문_나는 왜 이 책을 쓰게 되었나·6
1_울산에서 시작된 나의 사회적 삶·11
울산과의 첫 만남, 현대공고 교사가 되다 / 학생, 교사들과 일상을 나누다 / 사회에 눈뜨다 / 교사 모임을 만들다 / 잊을 수 없는 제자 / 담임이 되다 / 노동자로 살아갈 제자들 / 연행, 폭풍 전야 / 교육 민주화 선언 / 징계를 막기 위해 나선 제자들 / 동료 교사, 졸업생들의 구명 운동 / 지역사회의 관심 / 현대그룹의 실체와 대면하다
2_나와 노동운동·49
노동문제상담소 간사가 되다 / 6월 항쟁에 나서다 / 7, 8월 노동자 대투쟁을 통해 노동자의 힘을 경험하다 / 연행과 구속 / 권용목에 대한 추억 / 장명국과 노무현에 대한 기억 / 노동운동 지역 조직 건설 / 노동운동의 총선 투쟁 / 전태일 노동상을 수상하다 / 87년 노동자 대투쟁 20주년 기념사업
3_나와 교육운동·81
전교조 결성 / 교사가 왜 노동자인가? / 울산의 해직 교사들 / 학교에 남은 선생님들 / 학교 밖 교사 / 쇠망치 테러와 전교조 사수 / 해직 교사 복직 투쟁 / 모두가 복직한 사무실에 혼자 남아 / 전교조 합법화, 분회 결성, 단체교섭 / 고교 평준화 운동의 성공
4_교육위원 노옥희·111
13년 만의 복직과 교육위원 출마 / 전교조 교육위원 / 비리와의 전쟁 / 장애인 교육권 투쟁 / 토호 세력과의 한판 싸움 / 친환경 무상 급식 / 발렌타인 양주 사건과 박준일 기자 / 정보 공개는 중요하다 / 선물에 대한 나의 원칙
5_나의 정치를 말하다·145
울산시장 후보로 추대되다 / 시장 후보 출마를 받아들이다 / 민주노총 시장 후보 경선 / 노옥희 후보가 당선되면 재앙? / 시장 후보로 선출되어 ‘노동자 시장 노옥희’를 외치다 / 본격적인 당 활동 / 투명 회계와 당 혁신 / 민주노동당을 떠나다 / 진보신당 창당과 총선 후보 출마 / 4.9 총선 / 촛불, 시당위원장, 당사 마련 / 미포조선 굴뚝 농성 지지 단식 / 재보선과 원내 정당 / 비싼 수업료를 치른 지방선거 / 기억하고 싶지 않은 시장 선거 / 새롭게 지역 활동을 시작하다 /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친구 / 동구청장 보궐선거
6_내 인생의 사람들·227
부모님 / 형제자매들 / 성장 과정 / 남편과의 만남 / 결혼 / 해고자 부부 / 남편의 해고와 구속 / 평등 부부 / 자녀 교육 / 방목 / 대학 2학년 딸의 결혼 / 외할머니가 되어 깨닫게 된 것들
7_나의 교육 탐방(1): 덴마크·267
나의 무지를 일깨워 준 덴마크 교육 기행 / 자전거, 핵, 1달러 / 다양한 선택이 보장되는 교육과정 / 교육 주체가 주인인 교육 / 교사와 학생을 신뢰하는 교육 / 공동의 선과 민주주의, 자아실현을 위한 교육 / 우리 교육에 대한 고민은 우리 스스로
8_나의 교육 탐방(2): 핀란드·285
핀란드 교육을 보러 가다 / 왜 우리는 핀란드 교육에 주목하는가 / 핀란드 교육의 성공 비결은 무엇인가
9_다른 사람이 말하는 노옥희·297
사랑하는 노옥희 선생님께(박진한) / 선생님은 제게 동지입니다(안현호) / 서민이 당당하게 살 수 있는 현실을 만들어 주면 좋겠다(정익화) / 노동자 정치의 큰길을 개척해 주시길 바랍니다(박준석) / 나는 이렇게 노옥희와 ‘엮였다’(조용식) / 내가 본 노옥희 선생님(정찬모) / 우리가 노샘을 추대한 이유(명숙)
저자소개
책속에서
“잊을 수 없는 제자” 중에서
2006년 5월 울산시장 후보 사무실에 찾아온 제자들과 함께.
그 학생은 졸업 후 부산 사상공단에 취업했다. 취업한 공장은 이른바 ‘마찌꼬바’(영세기업)로 불리는 금형 공장이었는데 그곳에서 그만 사출기에 손이 눌려 결국은 손목을 자르게 되는 대형 산재 사고를 당했다. 1980년대 초 노동조합조차 없는 회사가 많았고 산재를 당해도 제대로 치료받지 못하던 시절이라 대공장도 아닌 영세기업에서 산재를 당한 노동자의 처지가 어땠을지는 짐작하고도 남을 것이다. 주변에 적극적으로 나서서 도와줄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매점 담당 교사로 가까이 지냈던 내가 이 일을 해결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녀 보았지만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어린 나이에 부모도 없고 손목까지 잘렸으니 그 절망이 얼마나 클까 생각하면서 정작 나는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생각하며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학생들에게 전공과목만 열심히 가르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교사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학생들에게 도움이 되는 길이 없을지 등의 고민은 계속되었다.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면서 아이들과 함께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위선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에 괴로운 나날이었다.
어떻게든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면서 산재 보상과 노동자들의 권리를 지키는 노동조합이란 것이 법으로 보장되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한 가닥 희망이었다. 제자들이 졸업 후 어떻게 살고 있는지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고, 노동자로 살아가는 제자들을 보면서 나의 교사 생활도 이전과 같을 수 없었다. 노동자로 살아갈 제자들에게 노동자 의식을 갖게 하는 책도 읽게 하고, 동료 교사들을 조직하는 일에 집중하는 등 노동문제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노동자로 살아갈 제자들” 중에서
아이들이 졸업 후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알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졸업생을 대상으로 어떤 생각을 하며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묻는 설문지를 만들어 돌렸다. 울산은 물론이고 멀리 광양에 있는 졸업생들까지 도와줘서 5백 부 넘게 수거할 수 있었다. 수거된 설문지는 혼자 바를 정(正)을 써가며 그야말로 수공업적 방법으로 분석했다.
설문 조사를 통해 제자들이 하루에 몇 시간 일하며 임금은 얼마를 받는지 구체적인 근무 조건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대학을 나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갖가지 차별을 받고 있으며 아무런 희망이 없는 노동자 생활을 벗어나고 싶어 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야간대학에 다니고 있는 경우도 있었다. 물론 이들이 대학을 나온다고 해서 모두 노동자 생활을 면하게 되는 것도 아니었기에, 어떻게 하면 이들이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게 할 수 있을까 고민하게 되었다. 결국 졸업하면 노동자로 살아갈 제자들에게 노동자라는 것에 대한 자부심을 심어 주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권용목에 대한 추억” 중에서
1987년 8월 18일 현대중공업에서 출발해 남목고개를 넘어 공설운동장까지 행진하고 있는 노동자 대열.
권용목은 현대엔진 노조 설립을 주도하고 위원장을 지냈으며 이후 현대그룹노동조합협의회를 만들어 의장을 맡으면서 현대그룹 전체 노동자들의 지도자로 우뚝 서게 되었다. 권용목의 연설을 들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를 잊지 못할 것이다. 나는 아직까지도 그보다 더 나은 연설을 들어 본 적이 없다. 1987년 7월 5일 현대엔진 노조 결성 보고 대회와, 8월 17일, 18일 3만 대군 앞에서 호령하던 그의 연설은 현대그룹 노동자들의 가슴에 깊은 감동과 자부심으로 남았으리라 생각한다.
그는 현대엔진 노조 결성과 8월 17일, 18일 연대 투쟁으로 구속되었고 석방되자 바로 해고되었다. 여기에 굴하지 않고 민주 노조를 사수하고자 조합원들과 함께 본관을 점거하고 파업 농성에 돌입했는데, 이 때문에 또다시 구속되었다.
외아들인 권용목이 구속되자 권처흥 아버님을 비롯해 어머니와 부인은 매일 구치소로 출근하다시피 하며 면회를 했다.
처음에 아버님은 나와 같은 이른바 ‘외부 세력’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가졌으나 투쟁 과정에서 생각이 바뀌셔서 울산 노동자의 아버지로 노동자들의 존경을 받았다. 또한 ‘재벌의 아들’인 정몽준에 맞서1989년 1월 15일 결혼식에서 주례 권처흥 아버님과 함께.
‘노동자의 아버지’로 1992년 총선에 출마하기도 하면서 가족 차원의 지원을 넘어 투쟁의 한복판에서 헌신하는 삶을 살았다. 개인적인 인연으로는 우리 부부의 주례를 맡아 주신 분이기도 하다. 주변에 훌륭한 분들이 많았지만, 노동자로서의 삶을 살겠다는 의지를 담고자 주례를 부탁했는데, 그 후 지역의 많은 노동자들의 주례를 서주시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