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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예술/대중문화 > 음악 > 음악이야기
· ISBN : 9788993818833
· 쪽수 : 624쪽
· 출판일 : 2016-12-15
책 소개
목차
들어가며
1부
2부
3부
4부
5부
6부
7부
8부
나가며
악보, 그리고 연습의 흔적
감사의 글
옮긴이의 글
이 책에 나오는 음악가들
참고문헌
리뷰
책속에서
매년 이탈리아에서 보내는 여름휴가를 위해 짐을 싸는 중이었다. 짐 가방을 잠그기 직전, 뭔가에 홀린 듯 〈발라드〉 악보를 끼워넣었다. 우리 가족이 빌린 농가에는 싸구려 업라이트 피아노가 한 대 있었다. 가족이 모두 외출을 하고 혼자 남겨진 어느 날, 그 누구도 엿들을 일이 없음을 확신하고는 피아노 앞에 앉아 이 무시무시한 작품을 느릿느릿 짚어나가기 시작했다. 쇼팽의 발라드 네 곡은 대학 시절부터 알던 작품이지만, 내가 연주할 수 있는 작품이라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못했다. 등산에 비유하자면, 험산險山을 올라본 경험이 전무한 중년 남자가 어느 날 갑자기 마터호른을 정복하겠다고 덤비는 꼴이었다. 한번 꽂힌 일은 해내고야 마는 저돌적인 성격을 가진 아마추어라면 못할 일도 아니겠으나, 그 과정에 얼마나 많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는 누구도 모를 일이다.
어느새 피아노 연습은 내 일상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 되어 있었다. 현실 도피라 해도 좋고, 어리석은 충동이라 해도 상관없지만, 내 몸이 피아노를 치라고 요구하고 있었다. 출근 전 20분을 피아노 앞에서 보낸 날은 뇌의 화학 반응이 달라진 것만 같은 강력한 느낌을 받곤 했다. 연습을 하고 하루를 시작하면 마치 내 뇌가 ‘안정’된 것처럼 느껴졌고, 앞으로 열두 시간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모두 대처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 기분의 원천이 정확히는 화학 반응이 아니라 신경회로망의 재편임을 알게 된 것은 한참 뒤의 일이다.
브렌델은 오로지 피아노만을 위해 곡을 쓴 유일무이한 작곡가가 바로 쇼팽이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게 중요하다고 한다. 쇼팽의 경우에는 음악이 피아노라는 악기에서 비롯되고 형성된다. 다른 작곡가들의 피아노 작품에서는 교향악의 면모나 합창곡의 면모 따위를 어렵잖게 느낄 수 있지만, 쇼팽이 쓴 음악은 처음부터 끝까지가 오로지 피아노 음악이었다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