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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예술/대중문화 > 음악 > 음악이론/음악사
· ISBN : 9788993818864
· 쪽수 : 304쪽
책 소개
목차
한국어판 서문
서곡: 음악과 종교
보편적이지만 양면적인 인류의 현상들
음악은 종교적 신앙의 표현인가?
중요한 것은 정신적인 태도다
종교적 음악 체험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초월의 흔적들
모차르트에 대한 색다른 접근
1 신비를 찾아서: 내가 경험한 모차르트 음악
1주제: 모차르트는 가톨릭 신앙인이었는가?
2주제: 모차르트는 신앙을 가지고 있었는가?
3주제: 모차르트는 신적인 존재였는가?
4주제: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5주제: 불가사의
6주제: 행복
7주제와 피날레: 초월의 흔적들
2 민중의 아편인가? 시대사적인 지평에서 본 모차르트의 〈대관식 미사〉
계몽주의와 전례 개혁
혁명의 천둥소리
키리에: 계몽적 신앙심
글로리아: 찬란하게 빛나는 하느님 찬미
크레도: 극적인 고백
상투스: 예부터 내려온 ‘세 번의 거룩’
아뉴스 데이: 평화의 간구
리하르트 바그너: 구원을 향한 열망
바그너 이해하기
1 신들의 황혼 뒤에는 무엇이 오는가? 시대사적인 지평에서 본 바그너의 〈니벨룽의 반지〉
영웅 오페라에서 신화 드라마로
신격화에서 탈신격화로
혁명적 사회 비판
〈신들의 황혼〉은 무엇을 알려 주는가?
구원의 마법?
〈신들의 황혼〉: 종말 드라마
구원의 필요성은 있으나 구원의 현실이 없다
바그너에게 신은 죽었는가?
포이어바흐: 무신론의 마법의 새
시민사회의 대리 종교에 대한 바그너의 비판
무신론과 거리 두기
문헌으로 주는 답변
음악으로 주는 답변?
2 구원을 향한 열망: 바그너의 〈파르지팔〉
비기독교적인가, 아니면 지나치게 기독교적인가?
예술은 종교인가?
예술은 대리 종교가 아니다
〈트리스탄〉의 사랑의 종교
〈파르지팔〉의 단념의 종교
예술 이론과 살아온 삶 간의 모순
‘기독교적’이란 수도자적이라는 뜻일까?
에로스와 아가페
예수의 만찬: 이별의 만찬과 기억의 만찬
〈파르지팔〉의 성찬: 신비로운 전례 드라마
〈파르지팔〉의 핵심 주제
불교와 기독교 그리고 교회일치?
핵심은 윤회가 아니라 구원이다
응용 해방신학
해방인가 구원인가?
무대 위의 구원?
신성
구원자
은총의 사건과 인간의 행위
구원자에게 구원을?
무엇으로부터의 구원인가?
만년작의 메시지
안톤 브루크너: 신앙의 교향악
음악적 감각으로 믿는다?
1 비범한 교회음악가이자 교향곡 작곡가
교회음악가 브루크너: 비타협적인 작곡가
교향곡 작곡가 브루크너: ‘음악과 종교’의 민감한 사례
2 종교성의 문제
근대 음악의 세속화
순박한 신앙과 고도로 복잡한 음악 간의 괴리
신비주의자도 아니고 ‘절대음악’ 작곡가도 아니었다
종교 기반의 교향악
3 현대성의 문제
낭만주의 음악의 위기
쇤베르크의 혁명: 브루크너와의 유사성?
쇤베르크가 일으킨 획기적인 패러다임 변화
4 미래성의 문제
분열된 문화 경영
새로운 음악에서 사라진 전통
세계-음악?
희망
피날레: 예술과 의미
1 무의미한 미술?
현대 미술계의 모순들
전위미술의 위기
2 무의미한 역사가 아니었다
고전적 근대 미술의 성과들
성미술
3 예술과 의미에 관한 새로운 문제
예술 작품의 내재적인 의미
예술의 사회정치적 차원
예술과 삶의 의미
4 예술에서의 근본적인 믿음 혹은 근본적인 불신?
범신론적 지평에서 본 예술
허무주의적 지평에서 본 예술
무의미만을 상징화하는가?
도발적이고 부정적인 그림으로도 근본적인 신뢰를 표현할 수 있다
의미의 근원을 긍정한다
5 예술은 의미를 계승한 유산이자 예측이자 규명이다
종교에 열린 예술
역사주의가 아니라 역사의식이다
미래주의가 아니라 앞을 향해 나아가는 지향성이다
인상주의가 아니라 현재와의 관계 맺기다
6 인간에게 봉사하는 예술
기준은 인본주의다
놀이가 펼쳐지는 공간
예술은 의미의 상징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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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책속에서
음악과 종교는 통시적(역사의 흐름을 따라 보는 방식)이면서 공시적(여러 지역을 가로질러 보는 방식)인 현상이며, 인류의 보편적인 현상이다. 종교 ‘텍스트들’은 문자로 기록되기 훨씬 전부터 노래로 불렸다. 또한 종교 행위들도 비록 형식과 용법은 서로 크게 다르지만 거의 모든 종교 전통에서 음악으로 표현되었다. / 그러나 이와 함께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 있다. 그리고 이것이 근본적인 어려움을 안겨 주는 문제다. 고도로 복잡한 현상인 음악과 종교는 둘 다 인류의 양면적인 현상이다. 종교가 인본주의를 전파하면서도 그와 동시에 비인간성을 정당화할 수 있듯이, 음악도 선과 악에 똑같이 이용될 수 있다. 인간은 음악으로 고귀한 감정과 형언할 수 없는 아름다움과 지고의 행복을 표현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음악을 이용해 수없이 많은 이들을 전쟁과 죽음으로 내몰았다. 때문에 인간이 태곳적부터 음악에서 신들의 목소리뿐 아니라 악마의 소리까지 들었던 건 우연이 아니다. 종교적인 사람이 음악을 가장 순수한 형식의 영성으로 찬미했다면, 다른 이들은 바로 그 종교적인 이유 때문에 음악이 가장 사악한 형식의 관능성이라고 저주했다. 종교적 열광을 최고조로 높이기 위해 기악을 긍정하는 이들이 있었는가 하면, 어떤 이들은(교부뿐만 아니라 칼뱅도) 예배에서는 물론이고 때론 세속의 일상에서까지 기악을 추방하려 했다.
음악은 말 한마디 없어도 그 자체가 종교적 경험의 중요한 원천일 수 있다. 아무리 감각적이라고 하더라도 예술 중에서 가장 영적인 분야인 음악, 이 음악과 종교의 경계선은 무척이나 가늘고 미세하다. 거의 모든 경험을 고양하고 변화시킬 수 있는 음악의 변형력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크다. 그러나 음악적 체험이 둘도 없이 강렬해지는 것은 음악과 종교가 동일한 의미와 목표를 가지고 서로의 에너지를 하나로 모을 때다.
서로 너무나 다른 두 모차르트 숭배자는 모차르트와 관련한 문제에서는 상대의 의견을 인정하지 않았다. 오직 바르트 발언의 단 한 구절만이 힐데스하이머에 의해 인용되었을 뿐이다. 그 대목은 “천사들이 하느님을 찬양할 때 바흐를 연주하고 있을지”는 전혀 자신할 수 없지만, “천사들이 저희끼리 있을 때는 모차르트를 연주하고 그 연주를 사랑의 하느님도 무척 즐겁게 듣고 있으리라는 것”만큼은 확신한다고 한 바르트의 유명한 문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