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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역사 > 조선사 > 조선시대 일반
· ISBN : 9788993854169
· 쪽수 : 280쪽
· 출판일 : 2010-03-19
책 소개
목차
건원릉建元陵 | 조선 건국의 아버지 태조 이성계
정릉貞陵 | 조선 최초의 국모 신덕왕후
헌릉獻陵 | 철권으로 조선의 기틀을 잡은 태종 이방원과 원경왕후
영릉英陵 | 조선의 문화를 꽃피운 세종대왕과 소헌왕후
현릉顯陵 | 세종의 분신 문종과 현덕왕후
장릉莊陵 | 비운의 왕 단종
사릉思陵 | 가장 슬픈 왕비 정순왕후
경릉敬陵 | 요절한 덕종과 파란의 소혜왕후
공릉恭陵과 순릉順陵 그리고 영릉永陵
| 시대를 풍미했던 한명회의 딸 장순왕후, 공혜왕후 그리고 추존왕 진종과 효순왕후
광릉光陵 | 계유정난으로 등극한 세조와 정희왕후
창릉昌陵 | 유약한 왕 예종과 계비 안순왕후
선릉宣陵 | 비극의 씨앗을 남긴 성종과 정현왕후
정릉靖陵 |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중종
온릉溫陵 | 치마바위 전설로 유명한 단경왕후
희릉禧陵 | 죽어서도 편히 잠들지 못한 장경왕후
효릉孝陵 | 독살설과 함께 잠든 인종
태릉泰陵 | 불교를 사랑한 문정왕후
강릉康陵 | 외척의 농단에 휘둘린 명종 그리고 인순왕후
목릉穆陵 | 서자 출신 왕 선조와 의인왕후 그리고 인목왕후
장릉章陵 | 재위하지 않았던 왕 원종과 인헌왕후
장릉長陵 | 가장 용렬한 왕 인조와 인렬왕후
휘릉徽陵 | 예송논쟁에 휘말린 장렬왕후
영릉寧陵 | 북벌을 주창했던 효종과 인선왕후
숭릉崇陵 | 외국에서 태어난 왕 현종과 과격한 성품의 명성왕후
명릉明陵 | 차마폭에 휩싸였던 숙종과 인현왕후 그리고 인원왕후
익릉翼陵 | 꽃피우지 못하고 잠든 인경왕후
의릉懿陵 | 식물임금 경종과 선의왕후
혜릉惠陵 | 세자빈 신분에서 왕후로 추존된 단의왕후
원릉元陵 | 묻히고 싶은 곳에 잠들지 못한 영조와 정순왕후
홍릉弘陵 | 무수리 출신 시어머니를 극진히 모신 정성왕후
융릉隆陵 | 장조로 추존된 장헌세자와 헌경왕후
건릉健陵 | 개혁군주 정조와 효의왕후
인릉仁陵 | 순조와 안동김씨 세도정치의 근원지 순원왕후
경릉景陵 | 풍류를 사랑했던 헌종과 효현왕후 그리고 효정왕후
수릉綏陵 | 추존왕 문조와 신정왕후
예릉睿陵 | 강화도령 철종과 철인왕후
홍릉洪陵 | 망국에 중심에 서 있던 고종과 명성황후
유릉裕陵 | 조선의 마지막 왕 순종과 순명효황후 그리고 순정효황후
저자소개
리뷰
책속에서
건원릉建元陵이라는 능호는 ‘조선을 건국한 왕이다’라는 상징성을 가지고 있다. 이후 역대 왕들의 능호는 이성계에 대한 존경과 경외의 의미로 두 자 능호를 피하고 외자로 지었다. 건원릉에는 개경사라는 원찰이 있었다. 태조가 죽자 태종은 불교에 귀의했던 아버지를 위해 능으로부터 700미터 덜어진 곳에 원찰 개경사를 지었다. 개경사는 연산군 때까지 명맥을 이어가다가 폐사되었다.
…… 태조 이성계는 신덕왕후 곁에 묻히는 것을 소망해서 살아생전 부인이 잠들어 있는 정릉에 수릉(임금이 죽기 전에 미리 만들어두는 임금의 무덤)을 잡아놓기도 했다. 그러나 아들 방원이 계모 곁에 묻어주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한 태조는 고향 함흥에 묻어달라는 유교를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 하지만 태종 이방원은 자신의 아버지를 한양근교에 예장했다. 조선 개국에 반대하는 고려 유신들의 저항이 살아 있는 현실에서 아버지를 함경도 변방으로 보냈을 때 발생할 수 있는 정치적인 위험을 차단한 것이다. 그 대신 함흥에서 고향 흙과 억새를 가져와 봉분을 마무리했다.
창덕궁 진선문에서 즉위한 연산군은 부왕의 산릉지를 찾아서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이에 윤필상, 노사신, 신승선, 이극돈, 김응기, 최호원이 산릉 후보지를 보고 와서 복명했다.
“광평대군의 묘가 첫째요, 그 다음이 정역의 묘요, 또 그 다음이 고양군 관사 자리입니다.”
고양에서 의경세자에게 자리를 내주고 강남으로 옮겨 온 정역이 다시 한 번 보따리를 싸야할 위기에 처했다.
“고양군의 땅은 어떤 흉하고 해로운 것이 있어서 셋째가 되는가?”
“지리서에 ‘물을 얻는 것得水이 상上이 되고 바람을 감춘藏風 것이 다음이다’라고 하였는데, 정역의 묘는 청룡이 짧고 백호가 낮고 멀어서 바람이 모이는 곳이니 불가하오며 ‘수구水口와 산두山頭가 낱낱이 돌아야 한다’고 하였는데 관사 자리는 산세가 바로 내려오고 산이 하나도 돌아앉은 것이 없으니 불가하므로 신의 생각으로는 광평대군의 묘 자리가 제왕의 능에 합당하다고 여깁니다.”
최호원이 정연한 논리로 고했다.
“만약 광평의 묘를 쓴다면 무덤을 파내야 할 것이니 신神이 편안하겠는가?”
“조종의 산릉은 옛 무덤을 파내지 않은 데가 없으니 땅의 길흉만을 볼 것이지 어찌 그런 폐단을 헤아리겠습니까.”
임금의 의중을 헤아리는 데 동물적인 감각을 지니고 있는 윤필상이 머리를 조아렸다.
“대왕대비의 말씀이 ‘광평의 묘는 그 자손이 병들고 요절하여 썩 내키지 않고 또 문중의 무덤이 많아 그것을 발굴한다면 예장을 잘 해주어야 할 것이므로 그 폐단이 적지 않다’고 하십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연산은 정현왕후 윤씨를 자신의 친모로 생각하고 있었다.
1659년 5월 4일, 효종이 창덕궁 대조전에서 숨을 거두자 현종은 영릉이라는 능호를 내리고 10월 29일 건원릉 서쪽 언덕에 예장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14년 후, 영림부령 이익수가 광중에 물이 고여 있다고 상소했다. 이로 인해 봉릉 당시 총호사 영의정 정치화는 관직을 삭탈당했고 보수공사를 할 당시의 선공제조 김수항은 관직이 깎였다. 송시열은 사직했고 허적은 면직을 청했다.
임금은 우의정 김수홍을 총호사로 임명하고 천장 작업에 착수했다. 관상감 제조 민유중이 새로운 산릉지로 홍제동을 추천했으나 여주로 최종 낙점되었다. 당시 천장은 국상 못지않은 국가 대사였다. 거여를 마련하는 것은 물론 임금이 상복을 입어야 했다. 더구나 건원릉 서쪽에 있던 영릉에서 여주까지는 적지 않은 거리였다. 현종은 김수홍과 천릉도감 당상을 희정당으로 불렀다.
“구릉에서 신릉까지 몇 리나 되는가?”
“구릉에서 사기소沙器所까지 85리고 사기소에서 이천까지 35리며 이천에서 신릉까지 50리인데, 사기소에서 이천으로 가는 길을 잡지 않고 곧장 신릉으로 향할 경우에는 겨우 75리밖에 안 됩니다.”
호조참판 김휘가 ‘겨우’라는 대목에 힘주어 말했다. 100리 이내란 뜻이다. 이렇게 천장된 곳이 오늘날 영릉이다. 천릉을 마친 임금은 봉릉 당시의 낭청 신명규와 이정기에게 사형을 내렸다. 그러나 김수홍의 적극적인 변론으로 신명규는 대정, 이정기는 정의에 귀양 가는 것으로 수습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