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이미지

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에세이 > 한국에세이
· ISBN : 9788993985832
· 쪽수 : 280쪽
· 출판일 : 2012-08-20
책 소개
목차
작가의 말 | 이 글을 읽을 당신에게
프롤로그 | 물 위의 집들이 꾸는 꿈
1부 그 거리로 나는 간다
잃어버린 한 줌의 시간을 찾아서 ― 황학동 만물시장, 그곳에는 오래된 미래가 있다
그래도 삶은 오래오래 지속된다 ― 혜화동 옛길, 간직한 것은 잊히지 않는다
꿈길밖에 길이 없어 그 길로 나섰더니 ― 필동 남산길, 우리 다시 만나는 그날은 언제일까?
더 오랜 날들이 지난 뒤에도 ― 송정리 바닷가, 그때 너와 나는 함께 살았다
냇물은 흘러 흘러 어디로 가나 ― 태백시 철암역, 어두워진 골목길로 아이들은 달려간다
단 한 번뿐인 그 순간, 그 자리로 다시 돌아오는 것들 ― 내 마음의 거리에 부치는 몇 줄의 편지
2부 그리움은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아비뇽, 내 마음의 강과 숲으로 난 창을 열고 ― 연 선생님께
낡고 허름한 종이로 만든 배를 타고 ― 안 선생님께
사랑과 기쁨이 충만한 삶의 조건을 위하여 ― 다시 연 선생님께
누가 할 것인가, 네가 아니면! ― 객석에 띄우는 편지 1, 시모비치 선생님께
마법의 춤, 사랑의 노래 그리고 흐르지 않는 꿈의 시간 ― 객석에 띄우는 편지 2, 희정에게
조금만 더 당신 곁에 머물 수 있나요? ― 객석에 띄우는 편지 3, 현아에게
나뭇잎은 나무가 아닌 곳에서 무성했으리라 ― 작가가 되기 위한 길, 명지에게
3부 사라지는 모든 것은 아름답다
사랑과 죽음의 변주곡 ― 루이스 세풀베다, <연애소설 읽는 노인>
삶의 진실을 찍어가는 따라지들의 연가 ― 박근형, <삽 아니면 도끼>
저 먼 곳에서 메아리치는 예지의 목소리가 들리는가 ― 베르나르 마리 콜테스, <로베르토 쥬코>
손자는 괴롭고 할머니는 외롭지요? ― 박상륭, <남도>
제 그림자를 향해 오열하는 젊은 예술가들의 초상 ― 체호프, <갈매기>
우리는 날아간다, 저 광활한 우주 속으로 ― 배강달, <우주비행사>
결혼, 사랑의 완성 또는 자유의 구속 ― 고골, <결혼>
에필로그 | 희망과 위안의 빛을 찾아서 ― 다들 행복하세요?
축하의 말 | 작가는 자기 자신을 기억해야 한다 ― 시인 이문재
저자소개
책속에서
슬픔의 거리가 빽빽하게 들어찬 내 수첩의 첫머리에 황학동 만물시장이 있다. 나는 그곳에서 그렇게도 갖고 싶던 옛 화집들과 레코드판, 명작 비디오테이프들을 공짜나 다름없는 헐값에 사들일 수 있었다. …… 어느 해 여름에는 낯선 할머니 한 분이 지나가던 나를 불러 세웠다. 할머니의 손에는 막 구워낸 수수떡 한 장과 식혜 한 사발이 들려 있었다. 총각, 많이 좀 먹어야겠네. 그러다가 병나겠어. 그때 그 할머니가 건네준 떡 한 조각의 온기가 입때 내 핏속을 돌아다니고 있다. 그녀에게 오래전 돌아가신 외할머니의 체취를 맡은 것일까. 돌이켜보면 여태 나를 먹이고 입히고 키운 것은 바로 그들이 아니던가.
그러던 어느 해 가을밤이었나. 피곤에 지쳐 깜박 선잠이 들었는데 습관처럼 켜놓은 라디오에 아주 낯익은 한 여자의 목소리가 꿈결인 듯 저 멀리 아득하게 밀려왔다. 어느 적막한 산사의 스님이 외는 게송과 같은 구음. 조공례의 소리를 들으며 십여 년도 더 지난 그 옛날, 친어머니나 다름없던 한 늙은 여자의 모습을 그려보았다. 별안간 그전에는 관심도 없던 그 소리가 가슴을 세차게 치기 시작했다. 그 두드림은 걷잡을 수 없는 것이어서 나는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한참 동안이나 흐느꼈다. 십여 년 전에 내 곁을 떠난 그이가 실은 내 가슴속에 살아 있던 것이다. 상여 소리는 나를 지금은 떠나온 형언할 수 없는 그리움의 세계로 데려간다. 살아남은 자와 죽어 흙이나 바람이나 물이나 불로 화한 자들을 들쑤셔 다시 불러온다.
봄볕이 따스한 오후면 간혹 어떤 아이들은 공장의 굴뚝 위로 기어올라가 뻐끔뻐끔 담배를 피워댔지요.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은 평화로웠고 밝고 따스한 햇살만이 붕붕거리며 날아다니던 그 옥상 위에서 저는 꿈을 꾸었습니다. 한 편의 멋진 소설을 구상하거나 다른 아이들 틈에 끼어 해바라기를 했지요. 한가로운 공상을 즐기다가 어떤 이는 생의 희열을 참지 못하고 지상을 향해 밑으로, 밑으로 추락하는 일도 가끔 있었지요. …… 지금 생각하면 모든 게 이상했어요. 그곳은 마치 카프카의 성처럼 은밀하고 중세 유럽의 요새처럼 단단했지요. 초등학교 꼬마들이 쓸 법한 앉은뱅이 나무 의자에 앉아 책상에 얼굴을 파묻고 슬프게 울던 기억이 납니다. 아무도 제가 울고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않았습니다. 저는 전혀 슬프지 않았거든요. 그런데도 자꾸 눈물이 나왔습니다. 불쌍한 녀석. 불쌍한 녀석. 같은 말을 되풀이하면서 제 살을 야금야금 파먹으며 저는 그때 그곳에서 조금씩, 조금씩 죽어가고 있었나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