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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일기 7

해방일기 7

(깨어진 해방의 약속)

김기협 (지은이)
너머북스
23,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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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일기 7
eBook 미리보기

책 정보

· 제목 : 해방일기 7 (깨어진 해방의 약속)
· 분류 : 국내도서 > 역사 > 한국근현대사 > 해방전후사/한국전쟁
· ISBN : 9788994606262
· 쪽수 : 442쪽
· 출판일 : 2014-05-19

책 소개

해방공간의 한국 정치 지형을 '좌우 대립'이 아니라 중간파와 좌우 양극단의 갈등으로 파악하자는 '중극 대립'의 시각으로, 학계 안팎의 지식인과 시민사회에서 갈수록 반향을 얻고 있다. 7권은 1947년 5월에서 8월까지 해방 2주년을 맞는 넉 달간을 다룬다.

목차

머리말 냉전의 시작과 미소공동위원회의 파탄

1. “이 박사 지령 앞에 무서울 것이 없다”
1947년 5월 2~29일


1947. 5. 2. 대한민청과 조선민청 해산 명령은 ‘상호주의’?
1947. 5. 4. 미국의 ‘원조’는 냉전의 ‘무기’
1947. 5. 9. 고리짝 속에 무엇이 들어 있었을까?
1947. 5. 11. 동아일보와 장택상의 합작 ‘빨대질’
1947. 5. 14. 만 25세 선거권? 너무했다!
1947. 5. 16. “무서울 게 어디 있어? 이 박사 지령인데”
1947. 5. 18. 10년 신탁통치를 기꺼이 받은 오스트리아
1947. 5. 21. 뜻이 있는 자에게는 돈이 없었다
1947. 5. 23. 미소공위 재개 앞에서 딴짓하는 이승만
1947. 5. 25. 김기, 지지 기반이 무너진다
1947. 5. 29. 대형 사기사건 배경에는 언제나 군정청이······
안재홍 선생에게 묻는다-조선 독립을 더 어렵게 만든 미군정
해방의 시공간-일지로 보는 1947년 5월

2. 미소공위, 성공의 희망이 보인다
1947년 6월 1~29일


1947. 6. 1. 대한민국 국회의 ‘숫자로 밀어붙이기’ 전통
1947. 6. 4. 미소공위 재개에 임한 중간파의 움직임
1947. 6. 8. 여운형이 자식들을 평양으로 보낸 이유
1947. 6. 11. 미소공위, 드디어 ‘건국 백서’를 내놓다
1947. 6. 13. 감나무 밑에 입 벌리고 누워 있는 남로당
1947. 6. 15. 나쁜 놈. 약은 놈, 멍청한 놈
1947. 6. 18. 마셜 미 국무장관은 미소공위 성공을 원했다
1947. 6. 20. 중간파도 전열을 가다듬고 있었다
1947. 6. 22. 시위대 대표 노릇을 한 수도경찰청장 장택상
1947. 6. 25. 민정장관 안재홍의 고군분투
1947. 6. 27. 하지의 직격탄, “이승만 씨, 테러를 그만두시오”
1947. 6. 29. 도지사 바꾸기도 벅찬 ‘허수아비 민정장관’
안재홍 선생에게 묻는다-“김구 선생님, 왜 우리 마음을 버리십니까?”
해방의 시공간-일지로 보는 1947년 6월

3. 여운형의 죽음에서 조선의 현실을 본다
1947년 7월 2~30일


1947. 7. 2. 조만식도 ‘반탁’에서 물러섰는데······
1947. 7. 4. 정판사사건의 김홍섭 검사와 곽노현 사건의 김형두 판사
1947. 7. 6. 극좌와 극우는 정치세력이 아니라 정치파괴세력
1947. 7. 11. 느닷없이 “배 째라!”로 돌아선 미국 대표단
1947. 7. 13. 마셜의 태도가 바뀌는 조짐이 보인다
1947. 7. 16. 경찰을 범죄조직으로 만들어낸 조병옥과 장택상
1947. 7. 17. 밫은 작고 그림자는 컸던 박정희의 쿠데타
1947. 7. 20. 여운형 선생 65주기를 맞아
1947. 7. 23. 음미할 여지가 있는 후버 전 대통령의 ‘망언’
1947. 7. 25. 전략가 여운형과 전술가 박헌영
1947. 7. 30. “브라운 소장, 당신마저!”
안재홍 선생에게 묻는다-여운형은 누가 죽였는가
해방의 시공간-일지로 보는 1947년 7월

4. 미국은 미소공위를 버리고 어디로 가는가?
1947년 8월 1~31일


1947. 8. 1. 3년차로 접어들며, “역사의식의 결함” 박근혜만의 것인가?
1947. 8. 6. ‘주인 없는 들개’가 된 ‘권력의 주구’ 경찰
1947. 8. 8. 『해방전후사의 인식』과 『한국전쟁의 기원』
1947. 8. 13. “커밍스가 상식 이하?” 전상인, 너무 웃긴다
1947. 8. 15. 해방 2년, 되살아난 경찰의 위세
1947. 8. 17. 러치 군정장관, ‘이승만의 사람’이었나?
1947. 8. 20. 마셜 국무장관, 미소공위 폐기 선언 직전!
1947. 8. 22. 소련, “회담을 하자는 거야, 말자는 거야?”
1947. 8. 24. 미국의 승부수, 총선거
1947. 8. 26. 이승만과 김구의 ‘정책이념 차이“
1947. 8. 29. “독도는 우리 땅!” 힘 있게 외치려면
1947. 8. 31. 미소공위를 버리는 미국의 수순
안재홍 선생에게 묻는다-조병옥과 장택상의 “진짜 야비한 이간질”
해방의 시공간-일지로 보는 1947년 8월

저자소개

김기협 (옮긴이)    정보 더보기
서울대학교 사학과에서 동양사 공부를 시작해, 경북대학교에서 중국 고대천문학 연구로 석사학위를, 연세대학교에서 마테오 리치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과학사학회에서 활동하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편집위원(과학분과)을 지냈다. 1980년대에 계명대학교 사학과에서 강의하고, 1990년대에 중앙일보 문화전문위원을 역임했다. 박사학위 이후 전문연구에서 벗어나 문명사의 흐름을 포괄적으로 파악하는 작업을 진행해왔으며, 한국사, 중국사, 한중관계사 등에 몰두하고 있다. 저서로 『밖에서 본 한국사』(2008), 『망국의 역사, 조선을 읽다』(2010), 『아흔 개의 봄』(2011), 『해방일기』(10권, 2011~2015), 『냉전 이후』(2016), 『오랑캐의 역사』(2022)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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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1947년 5월 20일 이승만은 미소공위 참여의 조건 두 가지를 내걸었다. 1) 신탁통치 조항 삭제 2) 어떤 식의 민주주의인지 밝힐 것. 쉽게 말해서 미소공위를 무시하고 그 결렬을 바란다는 것이다. 1)은 모스크바결정을 뒤집어야 한다는 것인데, 모스크바결정의 실행기구인 미소공위가 어쩔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리고 2)는 ‘미국식’ 민주주의와 ‘소련식’ 민주주의를 대비함으로써 미·소간의 대립을 부추기는 것이다. 엊그제 일기에서 밝힌 것처럼 이승만과 미국 정부 사이의 ‘밀약설’이 떠돌고 있었다. 누가 퍼뜨린 소문인지는 빤한 일이다. 밀약설의 내용인즉, 미국 정부가 남한 단독정부를 세워 이승만에게 맡기기로 했다는 것이다. 하지 사령관보다 ‘윗선’에서 남한에 괴뢰국가를 만들기로 이승만과 약속을 했다는 것이다.
이승만은 1946년 12월 미국으로 떠나면서부터 하지와 완전히 결별했다. 미국에서는 하지가 용공주의자라고(심지어 공산주의자라고까지) 인신공격을 했고, 조선에서는 하지 같은 ‘아랫것’들이 모르는 밀약을 미국 정보와 맺었다는 소문을 냈다. 그 허위선전의 도가 심했기 때문에 하지가 이승만의 주장을 모아 국무성에 보내 진위를 밝혀줄 것을 요청했고, 그 결과 이승만의 주장을 반박하는 국무성 발표가 5월 23일에 나온 것이다. 이승만은 이처럼 하지를 묵살하고 분단건국의 길로 일로매진하는 입장이었으니 미소공위도 무시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반탁진영에서도 김구 세력과 한민당의 입장은 이승만과 차이가 있었다.
김구 세력은 이승만처럼 분단건국을 지향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미소공위를 반대하는 입장은 이승만과 통했다. 미소공위의 가장 큰 목적이 새로운 임시정부를 만드는 것인데, 김구 세력에서는 중경에서 돌아온 임정이 임시정부 역할을 맡기 바랐다. 한민당은 이념을 가진 정당이라기보다 눈치를 봐서 자기네 이익을 늘리고 손해를 줄이기에 급급한 이익집단이었다. 어떤 건국 방향에라도 참여해서 자기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작용하고 싶어했다. 그러니 미소공위에도 일단 참여해놓고 보자는 입장이었다.
-1947. 5. 25. 일기 중에서

1947년 8월 중순 민정장관 안재홍의 명령에 따라 과도정부 독도조사단이 만들어졌다. 역사학자인 국사관 관장 신석호, 외무처 일본과장 추인봉, 문교부 편수사 이봉수, 수산국 기술사 한기준의 네 명으로 구성된 조촐한 조사단이었다. 그런데 네 명의 조사단이 8월 16일 대구에 도착한 후 일행이 엄청나게 늘어났다. 경상북도 직원 두 명과 경찰 한 명이 합류해 조사단 자체가 7명으로 늘어난 것은 고사하고, 조선산악회의 ‘울릉도조사대’ 63명이 나타난 것이다. 조선산악회는 단순한 등산클럽이 아니었다. 국토조사와 탐험을 중요한 목적으로 활동한 조선산악회는 진단학회와 함께 당시 조선의 대표적 국학 연구단체였다. 과도정부의 후원으로 조선산악회가 조직한 울릉도조사대는 본부 인원 15명과 8개 반 48명의 학술반으로 구성되고 당대의 일류 학자들이 대거 참여한 특급 학술조사단이었다. 정부의 독도자사단은 간판일 뿐이고 이 울릉도조사대가 이번 탐사활동의 실체였던 셈이다. (중략) 다오위다오에 대한 중국 입장에 비해 독도에 대한 우리 입장이 훨씬 유리한 것이 1947년의 조사활동 덕분이다. 우리는 주권국가를 아직 세우기 전부터 독도 영유권을 주장했고, 그것도 입으로만 떠든 것이 아니라 당시 상황에서 쉽지 않은 대규모 조사활동까지 벌였던 것이다. 반면 중국은 타이완을 돌려받은 1945년 이후에도 댜오위다오 영유권을 거론하지 않고 있다가(국민당 정권도, 공산당 정권도) 1971년에야 들고나왔다. 샌프란시스코회담 때 이승만 정부의 무성의와 무책임으로 우리 입장에 약간의 약점이 생기기는 했지만(『독도 1947』, 748~798쪽) 1947년의 조사활동은 그런 정도로 무너지지 않을 근거를 남겼다. 독도 문제와 다오위다오 문제를 놓고 왜 우리 정부가 중국과 적극적 공조정책을 취하지 않는지 이상하다.
- 1947. 8. 29. 일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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