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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역사 > 일본사 > 일본근현대사
· ISBN : 9788994606972
· 쪽수 : 304쪽
· 출판일 : 2025-06-13
책 소개
‘네오콘 일본’은 어디로 가나?
『네오콘 일본의 탄생』은 아베 신조로 대표되는 보수우익 그룹을 ‘네오콘’으로 지칭하며 이들의 거침없는 독주가 어떻게 일본 사회를 한껏 오른쪽으로 옮겨놨는지 그 우경화 과정을 해부한다. 일대 변곡점은 2011년 3월 11일 동일본 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전사고(이하 3·11)였다. 일본 사회가 3·11의 원인을 제거하고 새로운 미래로 나아가는 대신 네오콘의 집권이라는‘퇴행’을 선택한 이유는 뭘까? 3·11은 어째서 퇴행의 변곡점이 됐을까? 이 책은 3·11에서 아베의 집권으로 현재의 일본이 주조되던 3년간의 중대한 국면을 현장에서 지켜본 저널리스트 서의동의,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한 시도이자 생생한 탐사 보고서다.
이 책은 시곗바늘을 3·11의 20년 전으로 돌려 탈냉전기 일본의 위기와 불안, 그 속에서 우경화가 빌드업되는 과정을 살펴보는 것으로 시작한다. 1990년대 탈냉전 이후 일본의 진로를 둘러싼 갈등이 고이즈미 준이치로의 신자유주의, 하토야마 유키오의 복지주의를 거쳐 아베 신조의 신보수주의로 귀착되었다. 아베는 일본을 ‘일국 평화주의’국가에서 체스판을 직접 설계할 수 있는 ‘인도-태평양’ 전략국가로 탈바꿈시키려 했다. 저자는 이웃 일본에서 이뤄지고 있는 거대한 변화가 어떤 배경에서 어떤 과정을 거쳐 이뤄졌는지를 1990년대 이후부터 짚어보려는 것이 책을 쓰게 된 주요한 동기라 했다. 저자가 특파원으로 부임한 지 닷새째 되던 날 3·11이 발생했고 피폭을 무릅쓰고 4일간 센다이시 쓰나미 취재 이야기에서부터 3년 동안의 각종 인터뷰, 사진 등이 생생함을 배가한다.
서의동은 국가 간 관계에서 ‘존엄·감정의 균형’이 이익 균형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본다. 가해국이 과거에 범한 잘못을 제대로 기억하고 전승하는 것은 존업과 감정의 균형을 잡는 기초 작업으로, 한·일 관계의 ‘최소 강령’이라 강조한다. 『네오콘 일본의 탄생』으로 현대 일본 사회의 심대한 변화를 들여다보는 일은 현재 우리 사회의 우경화 경향과 향배를 짚어보는 데에도 많은 시사점을 줄 것이다. 너머북스의 ‘너머의 글로벌 히스토리’ 아홉 번째 책이다.
일본의 변곡점 ‘3·11’
저자는 2011년 이후 특파원 재직 3년간 지켜본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 패전 이후를 연상케 하는 정치·사회적 혼돈과 격변의 먼지로 시야가 흐릿한 동란기라 표현했다. 3·11은 일본인들의 불안감을 최대로 키운 사건이었다. 사건 직후부터 2012년 말까지의 일본은 우리의 ‘12·3’ 내란 이후와 같이 새로운 질서의 실체가 뚜렷하지 않은 ‘인터레그넴(권위 부재 기간)’의 상태였다. 그러나 3·11이 몰고 온 지각변동은 네오콘이 집권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다. 사회당 등 민주당을 왼쪽으로 이끌어갈 리더십은 부재한 반면, 오른쪽으로 이끌어갈 에너지는 충만했던 것이다. 결국 3년의 짧았던 민주당의 집권은 실패하고 2012년 말 아베로 대표되는 신보수주의와 역사수정주의를 정체성으로 한 정치그룹이 전면에 나서고 만다.
3부로 구성된 이 책은 1990년대 걸프전 이후 국제사회에서 위기를 맞은 일본이 평화헌법에 어긋나는 보통국가론을 주장하고, 과거사 문제를 맞닥뜨리며 불안과 당혹감을 느낀 가운데, 민주당과 사회당 등의 정치세력들이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실패하게 된 사정을 고찰하는 것으로 시작해, 이후 본격적으로 신보수주의가 발호하며 일본 사회가 우경화되는 사건과 그 과정을 살펴본다.
우경화의 심리 기제로서의 역사수정주의와 넷우익 그리고 혐한론
젊은 세대 독자들은 실감하기 어렵겠지만, 전후 일본의 번영은 1980년대 말에 절정에 이르렀다. 이때 많은 전문가들이 일본이 곧 미국을 능가할 것이라 내다봤다. 하지만 일본 경제는 이런 예측이 나오자마자 붕괴되었고, 1980년대까지만 해도 코스모폴리타니즘이 대세였던 일본 사회는 일거에 정체성 위기에 휩싸였다. 이 책은 경제 거품이 꺼진 것에 때맞춰 봉인이 해제된 과거사 문제에 직면하게 된 일본인들의 불안과 당혹감 등 1990년대 일본의 혼돈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정치 경제의 혼란은 청년 세대를 직격했다. 격차사회가 청년들을 압박하고, 내셔널리즘과 우익에 귀의하는 청년들이 늘어났다. 만화 같은 서브 컬처가 청년들을 유혹했다. 이 책은 우익 만화가 고바야시 요시노리가 역사수정주의를 대중화시킨 과정,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새역모)의 교과서 전쟁, 넷우익과 혐한론의 발호 등을 살펴본다. 특히 고바야시 요시노리의 만화 『전쟁론』이 청년 세대에 미친 영향은 지대했다. 대동아전쟁을 긍정하고 군대 보유 필요성까지 주장하는 이 만화에 젊은이들이 열광했다. 이제 평화, 민주주의, 고도성장 같은 것은 자신들의 일상과는 무관한 ‘딴 세상’ 이야기가 되어 버렸다. 민주주의, 시민운동, 인권은 학교에서나 접할 수 있는 질감 없는 언어였고, 그런 언어들을 구사하며 ‘멋진 척하는’ 좌파들에게 적의를 품게 되었다. 이 틈을 타 미군에 의해 전전의 역사가 왜곡되었다며‘자학사관’을 벗어나 일본의 근대사를 국민의 자긍심을 높이는 방향으로 다시 봐야 한다는 우익의 움직임이 ‘새역모’로 세력화됐다. 일본군 위안부, 난징대학살 등 과거사 문제를 통해 일본의 ‘과오’들이 드러났지만 일본의 새로운 세대는 그런 과거사를 학교에서 배우지 못했다. 일본 사회는 지난 잘못을 진지하게 대면하고 성찰하기보다는 내셔널리즘의 프레임을 동원해 우회하는 길을 택했다.
탈냉전 이후 일본 좌파의 몰락
2009년 민주당의 집권은 탈냉전 이후 일본의 총체적 보수화 과정의 ‘막간극’에 불과했다. 1990년대 들어 일본은 장기불황이 지속되고 주변국과의 과거사, 영토 갈등이 빈번하게 전개되면서 보수우익의 결집이 이뤄지고 있었다. 중도우파 계열의 민주당 정권이 일본의 진로를 바꾸려면 왼쪽에서 함께 함께 힘을 모을 필요가 있었으나 일본의 좌파정치는 1980년대 후반을 정점으로 존재감을 잃어갔다.
사회당은 집권 가능성은 없었으나 개헌 저지선을 확보함으로써 냉전시기 일본의 ‘호헌 평화주의’를 지키는 역할을 해왔다. 하지만 동서대립의 축약판인 자민-사회당 동거체제 속에서 ‘만년 야당’으로 안주하다, 자민당 장기집권 체제가 금권스캔들로 무너진 1990년대 중반 정계개편 속에서 사회당도 함께 몰락했다. 자민당과의 연립정권을 구성한 뒤에는 미일안보조약, 일장기·기미가요, 자위대 등에 대한 종래 입장을 180도 전환하면서 ‘호헌 평화주의’의 정체성을 상실했다.
언론에서도 국제협조주의 노선의 「아사히신문」 등의 영향력이 지속적으로 약화됐다. 2002년 북한의 일본인납치 문제가 사실로 확인되자 진보좌파 여론은 충격을 받았다. 2014년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이슈화시키는데 적극적이던 「아사히신문」이 제주도에서 군 위안부를 강제연행했다는 요시다 세이지의 주장을 검증 없이 실은 초기 위안부 보도에 대해 잘못된 기사라고 철회한 것은 2차 충격이었다. 언론지형의 전반적 보수화는 결과적으로 아베 장기 독주체제에 적지 않게 기여한 셈이 되었다. 좌파의 총체적 몰락으로 1990년대 후반 본격화한 역사수정주의와 우경화에 대항할 정치·사상적 진지는 사라졌다.
3·11과 네오콘 세력의 전면화
1990년대 탈냉전 이후 일본은 정체성 위기에 휩싸였다. 냉전 구조가 해체되면서 국제사회의 한복판에 내동댕이쳐진 것 같은 불안감이 일본인들을 휘감았다. 동아시아에서 반공동맹이라는 국제 정치적 전선이 사라지자 봉인됐던 과거사의 책임을 묻는 흐름이 ‘일본군 위안부’ 문제로 대두되면서 과거사 사죄와 반성, 청산 없이 구축된 일본의‘폐쇄된 평화주의’의 위선을 재확인하는 계기가 됐다. 위안부 문제는 한국과 일본의 관계 차원을 넘어 ‘전시 성폭력’ 문제라는 국제사회 공통의 어젠다로 승격됐다. 과거사가 가져온 충격은 일본 내 보수우익들을 결집시키는 계기가 되었으며, 일본의 국수적 내셔널리즘은 이런 정체성 불안 속에서 자라나기 시작했다. 2002년 북한의 일본인 납치 인정은 가해자 일본을 피해자 지위로 둔갑시켰는데 아베는 이 과정에서 신보수주의의 핵심 인물로 떠올랐다. 또한 센카쿠 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 중일 분쟁, 한국과 독도 영토 갈등 등을 일으키며 ‘강한 일본’을 희구하는 열망을 확산했다.
일본은 3․11 앞에 무기력했다. 그동안 국제사회에서 일본이 가진 위상이 한순간 무너져내렸다. ‘작고 안전한 나라’라는 새로운 미래상이 제시되고 원전 마피아를 비판하며 탈원전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분출되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로 이러한 목소리는 곧 아베로 대표되는 복고적 성장주의와의 대결에서 패배했다.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민주당은 탈원전 정책을 추진하려 했지만 미국의 견제로 좌초했고, 재난 수습 과정에서 인상적인 모습을 보이지 못하고 3년 3개월여 만에 정권을 내놓아야 했다.
『네오콘 일본의 탄생』은 재집권한 아베가 ‘총리 독재’ 체제를 구축하고, 평화헌법을 무력화한 과정, 종전 70주년을 맞아 발표한 ‘일본이 더이상 타국에 사죄하지 않겠다’는 선언의 의미를 한·일 관계 차원에서 검토한다. 2015년 가이드라인으로 불리는 미·일 방위협력지침 개정과 그 후속 조치인 안보 법제 제·개정 등이 일본을 ‘스스로의 판단으로 전쟁을 개시할 수 있는 나라’로 만들었음을 짚어본다. 일본의 전략국가화를 꾀한 아베가 ‘인도-태평양’이라는 지정학적 구상을 창안한 과정과 그 의미를 ‘미·일 동맹’ 강화라는 문맥에서 고찰한다. 이와함께 일본이 최근 의욕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반도체 산업 부흥 전략을 강제 안보와 함께 한·일 관계 맥락에서 검토한다.
목차
프롤로그_일본의 변곡점 3․11
1부 탈냉전과 걸프전 이후
1장 1990년대 일본의 혼돈
1 ‘돈주고 뺨 맞은’ 걸프전
2 거품이 꺼진 뒤의 혼란
3 ‘위안부’에 발가벗겨지다
2장 실패로 끝난 ‘아시아 회귀’
1 ‘유관순 감방’ 찾은 하토야마
2 ‘민주당의 무덤’이 된 오키나와
3 짧았던 한․일 관계의 봄날
3장 브레이크가 사라진 일본
1 천황제를 넘어서지 못한 좌파
2 사회당은 왜 몰락했나
2부 빗장 풀린 우익들
4장 그들은 어떻게 스스로 ‘피해자’가 되었나
1 “일본인 납치했다”, 김정일이 던진 폭탄
2 해상보안청과 중국 어선의 충돌
3 샌프란시스코에서 센카쿠까지, 영토 분쟁의 정치학
5장 역사수정주의와 넷우익, 그리고 혐한론
1 고바야시 요시노리의 ‘고마니즘’
2 고노 담화와 ‘새역모’
3 넷우익과 혐한론
6장 일본 정계를 뒤흔든 우익들
1 간사이의 좌절을 먹고 자란 하시모토
2 우익의 간판, ‘태양족’ 이시하라
3 ‘신보수주의 총아’ 아베
3부 3․11 이후의 일본
7장 3․11은 왜 일본을 바꾸지 못했나
1 민주당을 침몰시킨 대지진
2 이루지 못한 ‘수국 혁명’
3 “쇼와의 영광을 되살리자”
8장 ‘네오콘 아베’ 시대
1 관료정치는 끝났다
2 평화헌법 내팽개친 일본
3 “더 이상 사과는 없다”
9장 전략국가를 꿈꾸는 일본
1 ‘인도-태평양’ 묶는 미국, 그 뒤엔 일본
2 ‘국체’가 된 미・일 동맹’
10장 동북아시아는 어디로 향하는가
1 안보국가로 질주하는 일본
2 일본의 ‘반도체 굴기’와 애치슨 라인
에필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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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소개
리뷰
책속에서
원자로가 ‘멜트다운 melt down’되면서 대량 유출된 방사성 물질로 인한 오염과 피폭 문제는 취재 대상이자 ‘실존’의 문제였다. 동일본 대지진 사흘 뒤 렌터카로 도쿄를 출발해 쓰나미 피해 지역인 미야기현으로 향했다. 본래는 미야기현의 북쪽인 이와테현을 목표로 했고, 내비게이션상으로는 6시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됐으나 북쪽으로 가는 도로 곳곳이 지진으로 파여 미야기현 센다이까지 가는 데만 20시간이 걸렸다. 이미 이틀 전 후쿠시마 제1원전 1호기가 폭발하며 방사성 물질의 유출이 본격화되던 시점이었으나 유독 날씨가 더워 창문을 열고 운전을 했고, 도중에 날이 저물어 후쿠시마시의 호텔에서 하룻밤을 묵어야 했다. 출장 목적이 쓰나미 피해의 참상을 취재하는 것이었고, 렌터카를 직접 몰고 가는 처지여서 원전사고 추이에 집중하지 못했다. 일본 정부 대변인(관방장관)의 “방사능 유출로 즉시 건강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말에 별 의문을 갖지 않을 정도로 원전과 방사능에 대한 지식이 빈약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당시만 해도 후쿠시마 원전사고가 얼마나 큰 재앙인지 가늠하지 못했던 것이다.
4일간 쓰나미 현장 취재를 하는 동안 원전에서 추가 폭발이 일어났고, 유출된 방사성 물질이 바람을 타고 도쿄의 정수장까지 오염시키면서 원전과 방사능의 공포는 현실화됐다. 생수를 사 먹고 장을 볼 때도 원산지를 꼼꼼하게 챙기는 것이 습관이 됐다. 단신부임이어서 마음의 부담은 동료 특파원들에 비해 덜한 편이었지만 ‘신경과민’ 상태는 지속됐다. 특집 기사를 쓰기 위해 출장 간 후쿠시마 현지에서 몸에 지니고 간 러시아제 방사선량계가 삑삑거리며 경고음을 낼 때마다 가슴이 철렁거렸다.
3․11은 일본이라는 국가의 존재 방식을 근본부터 성찰한 끝에 개혁의 문을 여는 ‘결정적 국면’이 될 것으로 기대됐다. 3․11은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패전을 대신할 새로운 시대 구획선이 될 터였다. 3․11 직후 일본 신문에는 2차 세계대전 패전 이후를 줄인 ‘전후’ 대신 ‘재후災後’ 즉, 동일본 대지진 이후라는 조어가 등장했다. 원전사고 이후 대국주의에서 벗어나 ‘작고 안전한 나라’가 일본의 새로운 미래로 제시됐다. 언론의 원전 보도에 대한 책임을 묻는 목소리도 터져 나왔다. 태평양전쟁 말기 불리한 전황은 감추고 보는 대본영 발표를 검증 없이 보도하던 것과 ‘원전은 안전하다’는 전력회사의 선전을 검증 없이 받아쓰기한 행태가 본질적으로 다를 게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2년이 채 되기도 전에 일본 사회는 의미 있는 변화를 이루지 못한 채 ‘일상’으로 되돌아갔고, 역사수정주의와 내셔널리즘이 발호하는 우경화로 기울었다. 패전에 버금가는 충격에도 불구하고 그 원인을 제거하고 새로운 미래로 나아가는 대신 급격한 ‘퇴행’을 선택한 이유는 뭘까. 왜 3․11은 퇴행의 변곡점이 됐을까. 이 책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한 시도다.
권혁태 전 성공회대 교수는 고도 경제성장에 의해 소비사회가 출현하면서 파편화된 개인들이 ‘자기 찾기’를 통해 안식처를 찾아 헤매던 끝에 결국 ‘국가’에 자신을 맡겨 버리는 현상이 1990년대에 출현했다고 본다. 만화, 애니메이션, 게임 등 서브컬처에 1990년대 이후 정보화로 생성된 새로 운 관계망이 합쳐지면서 파편화되고 부유하는 개인들이 삶의 안식처로 일본이라는 공동체에 몸을 맡기는 현상이 새로운 내셔널리즘의 기반이 됐다 는 것이다. 이들에게 평화, 민주주의, 고도성장으로 상징되는 전후란 자 신의 삶을 규정지은 거대 서사이면서도 자신들의 ‘끝없는 일상’과는 무관 한 ‘딴 세상’의 이야기였던 것이다. 이런 세상에 사는 아카기나 아마미야에게 민주주의, 시민운동, 인권은 학교에서나 접할 수 있는 질감 없는 언어였고, 그들은 이런 언어들을 구사하며 ‘멋진 척하는’ 좌파들에게 적의를 품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