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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사회과학 > 사회학 > 사회학 일반
· ISBN : 9788994963716
· 쪽수 : 124쪽
· 출판일 : 2013-03-19
책 소개
목차
* | 들어가는 말 |
인터뷰이 신성식_ 협동조합은 ‘현실’이다
인터뷰어 차형석_ 그 많던 시장만능주의자들은 어디로 갔을까?
1장 주식회사는 1주 1표, 협동조합은 1인 1표
2장 한국 생협의 네 가지 경로를 살펴본다
3장 한국 생협이 주로 농산물을 취급하는 이유
4장 협동조합을 바라보는 다양한 시각과 논쟁
5장 아이쿱, 기사회생의 비밀을 들여다보다
6장 협동조합의 주인은 조합원이다
7장 윤리적 소비, 윤리적 생산
8장 협동조합 기본법 시대, 협동조합을 준비하는 이들에게
9장 쇼핑은 투표보다 중요하다
리뷰
책속에서
◆ 1장 주식회사는 1주 1표, 협동조합은 1인 1표
신성식 먼저 주식회사를 생각해봅시다. 가령 어떤 회사의 총 자본금이 2억 원인데, 제가 1억 500원의 지분을 갖고 있고, 나머지 여러 명의 주주들이 9999만 9500원의 지분을 나누어 갖고 있다고 가정해봅시다. 그렇게 되면 제가 그 주식회사에서 실질적 지배자의 역할을 할 수 있어요. 그 회사가 10억 원의 손실을 봤다고 하면 어떻게 될까요? 손실을 메우기 위해 회사의 자산을 매각하는데, 더이상 팔 자산이 없는 최악의 상황에서 10억 원의 손해가 났어도 저는 1억 500원만 손해 보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반대로 10억 원의 순이익이 났다고 하면? 저는 5억 5000원에 대한 이익(세전)을 누릴 수 있는 시스템이죠. 투자자의 입장에서는 이만큼 좋은 시스템이 없는 겁니다. 손실과 배당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고 대표이사가 되어 월급과 성과급도 마음대로 정할 수 있고 실질적으로는 이익을 독점할 수 있습니다. 예전 같으면 한번 삐끗하면 삼대가 망할 정도로 타격을 받았는데, 주식회사의 등장으로 성과는 무한정 누릴 수 있는 반면 책임은 유한한 제도가 도입된 겁니다. 그로 인해 대규모 자본 동원이 가능해지게 된 거죠. 사업하는 사람에게는 너무 좋은 시스템입니다.(웃음) 그러다 보니 자본 횡포의 사회 경제적 파장이 본격화되기 시작했어요. 금융지배 현상이 나타나기도 하고요. 그래서 투자 규모와 상관없이 1인 1표로 결정을 하게 되면 자본의 무지막지함을 조절할 수 있다고 본 겁니다. 협동조합이 그 의미를 몸소 보여주고 있는 거지요.
차형석 아이쿱에서 올해 10억 원의 이익이 남았다면, 이 10억 원을 다음 해 사업에 어떻게 반영하나요?
신성식 조합원에게 혜택이 가도록 하죠. 가령 물품 가격을 얼마나 더 내릴 수 있을까, 회원들의 조합비 부담을 얼마나 낮출 수 있을까 검토합니다. 아이쿱 초창기의 조합비는 평균 2만 5000원이었는데, 현재는 평균 1만 3000원입니다. 조합비를 낮추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지요. 요즘 아이쿱 물품은 친환경 유기농 제품이 주를 이루는데, 일반 시장제품과 가격 차이가 별로 나지 않거나 심지어는 더 저렴한 경우도 자주 발생합니다. 사업의 성과를 나누는 방법이 꼭 배당 방식이 아닌 조합비를 내리거나 물품 가격을 내리는 데 사용한 것이지요. 조합원이 배당금 3,400원을 당장 손에 쥐면 기분은 좋을 수 있어요. 조합원 1인당 평균 출자금이 8만 원인데 배당금이 세전 4,000원이면 5퍼센트의 배당률이 나오는데, 이 정도면 적지 않은 수준이에요. 하지만 절대 금액이 너무 작아요. 요즘 3,400원이면 커피 한잔 정도 값이에요. 따라서 조합원들이 배당보다는 사업 이용에 더 관심이 있다고 보는 겁니다.
◆ 2장 한국 생협의 네 가지 경로를 살펴본다
신성식 일제강점기에도 협동조합이 있었어요, 일제의 탄압으로 해산되긴 했지만. 그러다 해방 이후에 다양한 분야에서 생겨났다가 전쟁을 거치면서 중단됐고, 박정희가 일으킨 5·16군사정변 이후에는 점차 맥이 끊겨버렸죠. 사람들이 모이는 것을 싫어했으니까. 1980년대 중반까지는 생협이라고 부르지 않고, ‘소협’이라고 불렀어요. 소비자협동조합을 줄인 말이었죠. 생협이라는 말을 쓴 건 1980년대 후반부터입니다. … 한살림은 ‘원주 밝음신협’ 활동을 하던 박재일 회장이 1986년에 한살림농산을 시작한 게 초창기 모습입니다. 직거래를 위해 서울 제기동에 한살림농산을 만들고, 그러다가 1987~1988년에 안산 신협에 있던 이건우 선생과 박재일 회장이 일본 생협을 견학하는 모임을 갖게 됩니다. 한국 생협은 일본 생협으로부터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일본은 지역생협이 700여 개가량 있는데, 2010년 기준으로 등록 조합원이 2600만 가구 정도예요. 중복 가입한 경우도 많이 있긴 한데, 두세 가구 중 한 가구가 협동조합 회원인 셈입니다. 일본을 가보니까 지방의 한 생협에 등유를 공급하는 유조차가 있어요. 생활에 필요한 다양한 서비스를 협동조합에 서 제공한 게 지금까지 이어져오는 거죠. 여하튼 일본 생협을 견학한 박재일 회장이 일본 생협의 시스템이 효과적이겠다고 판단해 1988년도께 한살림생협이라는 이름으로 생협을 시작하게 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신성식 3학년 2학기 때 학생운동으로 투옥되었고, 4학년 1학기 때까지 징역 살다가 나왔어요. 학교에 복학했더니, 서클 2년 후배가 총학생회장 선거를 준비하고 있었어요. 복학하고 보니까 학교에서 내가 별로 할일이 없더라고.(웃음) 그때 학교 학생과에서 제안을 해오는 거예요. 학교를 자퇴하면 등록금을 돌려주겠다고. 그때 후배들이 총학생회장 선거를 준비한다고 해서 돈이 필요한 시기였어요. 나는 자퇴하면 그동안 낸 등록금을 다 돌려주는 줄 알았지.(웃음) 학교에서 할 일은 없고, 돈은 필요했고, 어차피 노동운동을 하러 간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당당히 자퇴서에 사인을 했어요. 그랬더니 한 학기 등록금만 돌려주더라고.(웃음) … 그다음에 인천국민운동본부 조직국장으로 일하게 됐는데, 그때 우연한 기회에 농산물 직거래를 하게 됐어요. 그런데 얼마나 무식하게 직거래를 했냐면, 최소 주문 단위가 한 가마니였어요. 80킬로그램짜리 한 가마, 두 가마 이런 식으로. 방아를 찧어서 쌀을 배달했어요. 그런데 저층 아파트는 왜 그렇게 많은지, 주문한 사람들이 대체로 5층에 살고 있는 거예요.(웃음) 80킬로그램짜리 쌀 한 가마니를 한 사람이 등에 지고, 뒷사람이 받치는 식으로 5층까지 올라갔어요. 아무리 젊었을 때라지만, 쉽지 않은 일이었어요. 고생스러웠지만 성과가 있었고, 나름대로 가능성을 봤어요.
◆ 3장 한국 생협이 주로 농산물을 취급하는 이유
신성식 한국 소비자협동조합의 뿌리를 강원도 원주로 보는 시각이 있는데, 소협의 역사를 잘 모르고 하는 소리예요. 1970년대 홍성에 ‘밝은소협’이라는 데가 있었어요. 옛날에는 워낙 상인들이 폭리를 취했잖아요. 1840년대 로치데일이 처음 시작될 때처럼. 왜 유원지에 가면 상인들이 500원짜리 생수를 2,000원에 팔고 그러잖아요. 그런 것처럼 유통이 현대화되지 않았으니까, 상인들의 주도권이 강했습니다. 그렇다는 것은 결국 공급자가 우위에 있는 시대였다는 말입니다. 그런 속에서 소비자들이 휘둘리지 말자고 해서 교회나 가톨릭을 중심으로 해서 다양한 소협이 시작되는데, 1970년대에 있었다가 그 흐름이 끊기고 다시 1970년대 말과 1980년대에 시작하게 됩니다. 그건 한국의 정치 상황과 관련이 있어요. 박정희 유신정권이 민간 시민들의 자율적인 조직이 형성되고 활동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거든요. 그러면서 맥이 끊기게 된 거죠. 그냥 내버려둬도 사업이 성공하기 어려운 시절이었는데, 정치권력까지 눈에 쌍심지를 켜고 눈을 부라리니 쉽지 않았죠. 당시만 해도 농민들이 통일벼를 심지 않고 유기농을 한다고 하면 빨갱이로 몰리던 시절이었어요.
차형석 초창기에 협동조합을 했던 분들은 협동조합을 일종의 가치운동이나 생명운동, 공동체운동으로 시작했다는 말씀인데요.
신성식 그렇습니다. 협동조합의 전형이 없었어요. 소비자생협이든 뭐든 ‘아, 저렇게 하면 되겠구나’ 하는 모델이 없었어요. 1970년대 신협이 좋은 일을 해보려다 실패하고. 그런 모델이 하나도 없다는 것은 결국 사업적으로 성공한 협동조합이 하나도 없었다는 뜻입니다. 농협은 자신을 협동조합으로 여기지 않았고, 그런 분위기 자체가 없었어요. 사업적으로 성공한 데는 없고, 필요와 요구는 있고. 그러다 보니 협동조합을 하면서 사업으로 성공할 것이라는 기대를 하지 않게 된 겁니다. 그런 기대를 안 하니까 자연스럽게 ‘가치나 이념 중심’으로 가게 된 거예요. 유기농을 하는 농민들이 기존에 농약을 이용해 농사를 짓는 것보다 수익이 더 늘어날 것으로 기대하는 게 아니라 개인적, 신앙적 신념으로 버티게 된 거죠. 그렇게 생산이 유지됐어요. 또 소비자 입장에서는 어렵게 만든 소비자생협이지만 이곳을 이용하는 게 백화점 가는 것보다 특별히 경제적으로 이익이 높다고 볼 수도 없었어요. 이 두 흐름이 만나면서 협동조합은 사업적 이점보다는 가치나 신념이 중요해졌고, 또 으레 생협은 이렇게 가치나 신념이 더 중요한 곳이라는 인식이 훨씬 강해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