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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종교/역학 > 기독교(개신교) > 기독교(개신교) 목회/신학 > 신학일반
· ISBN : 9788996381242
· 쪽수 : 200쪽
· 출판일 : 2012-03-30
책 소개
목차
제1장. 개인적인 회고
제2장. 관련된 혼란들과 오해들에 대한 해명
1) 새 관점은 전통적인 종교개혁의 이신칭의 교리에 대한 반제/반박으로 형성된 것인가?
2) ‘율법의 행위들’을 일부 ‘경계표지’ 정도로 의미를 축소해버린 것인가?
3) 율법에 대한 바울의 반대를 '율법에 대한 태도'를 반대한 것 정도로 축소해버린 것인가?
4) 안디옥 사건 전까지는 칭의 교리가 형성되지 않은 것처럼 만들어버렸고, 칭의를 근본적인 교리가 아닌 실용적인 해답 정도로 격하시켜 버린 것인가?
제3장. 논의의 진전
5) 갈라디아서 3장 10-14절의 주석에 대한 심각한 이의가 제기되었다.
6) 갈라디아서 2:16과 무관하게 로마서 3:20,4:4-5. 9:11-12에 있는 ‘행위에 의한 의’는 계속 근본적인 쟁점이 되고 있다.
7) 바울의 율법과의 단절을 충분히 심각하게 다루지 못했다.
8) 후대의 바울 서신은 전통적인 해석이 옳음을 입증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제4장. 좀 더 실질적인 쟁점들
9) 바울에게는 사실 구원론의 ‘언약적인’ 측면/흐름이 그렇게 일관되게 나타나는 것은 아닌데, 샌더스가 이를 과장한 것이 아닌가?
10) 제2성전 유대교의 구원론에는 (종말론적) 구원이 율법 순종에 의존하는 것으로 본 측면/흐름이 존재하는데, 새 관점은 이 사실을 충분히 인식했는가? 반면, 새 관점에 대한 반대 입장에서는 ‘믿음의 순종’에 대한 바울의 가르침과, 기독교인도 역시 그들의 행위에 따라 심판을 받을 것이라는 가르침에 정당한 비중을 두었는가?
11) 바울이 기독교인에게 기대한 순종을 이스라엘에게 요구된 순종과 비교할 때, 그 종류나 특징(성령이 가능하게 한다는 특징) 면에서 차이가 있는가?
12) 여러 가지 측면에서 볼 때 무엇보다도 가장 예리한 비판: 만약 제2성전 유대교와 바울의 구원론이 동일하게 ‘언약적 신율주의’라는 측면에서 정의될 수 있다면, 그리스도는 왜 필요한가? 새 관점은 그리스도의 필요성과 그의 사역에 충분한 비중을 두고 있는가(로마서 8장 33-34절)?
제5장. 결론
리뷰
책속에서
2.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바울의 설명이 그의 이방인 선교라는 맥락에서 그에게 근본적인 중요성을 지니는 내용, 즉 복음은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을 포함한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며, 이방인이 유대교로 개종하거나 유대인의 삶의 방식을 따르도록 요구하지 않아도 된다는 내용을 변호하기 위해 나타났다는 사실이 부수적인 것으로 치부되어서는 안 된다. 이 사실을 인정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용서하시고 의롭다 하시는 은혜가 아니면 아무도 그 앞에 설 수 없다는 좀 더 근본적인 사실을 부인하거나 경시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이신칭의가 단순히 개인에 대한 것은 절대로 아니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다. 칭의에 대한 바울의 신학은 사회적이며 공동체적인 차원을 지니고 있었으며, 이는 칭의에 필수적인 요소였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이 어떤 환경에서 태어났고, 어느 나라 혹은 어느 인종에 속했으며, 어떤 문화 혹은 어떤 계급에서 성장했는지, 또는 그 사람이 어떤 특별하며 개인적인 혹은 공동체적인 삶의 형태를 수용하는지에 따라 조건적으로 우리를 용납하신다는 식의 그 어떤 주장에 대해서도 저항했으며, 이러한 사실을 무시하면 바울의 복음에서 가장 중요한 측면 가운데 하나를 잃는 꼴이 된다. 조건을 따지며 사람을 판단하는 무례한 초강대국들, 초국가적인 집단들, 그리고 서구 ‘문명국’들은 바울의 교리가 가진 그러한 측면을 그 어느 때보다 오늘날 분명하게 경청할 필요가 있다.
3. 믿음으로만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교리를 과거에 바울, 어거스틴, 루터가 그랬던 것처럼 오늘날에도 강력하게 재차 천명할 필요가 있다. 창조자 앞에서 피조물이 보여야 할 단 하나의 적절한 반응은 창조자이며 구원자이신 하나님에게 전적으로 의존해야 함을 인정하고, 그에게만 영광을 돌리고 예배하며, 그를 신뢰하고 감사를 드리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반응의 충분한 범위에 대해서는 신중히 생각할 필요가 있다. 이신칭의는 구원에 필수적이라고 하면서 복음에 다른 것을 더하려 하거나, 함께 식사하고 동역하는 성도들이 갖출 기본이라며 복음 외에 다른 것을 요구하는 어떤 시도에 대해서도 반대한다 - 이러한 시도에는 사도권 계승, 성찬식 배제, 여성 성직자 부인, 성경 무오설, 그리고 그와 같은 기타 주장들도 제외되지 않는다. 심지어는 ‘오직 믿음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교리에 대해 스스로 정통이라고 자처하는 자들이 특정한 공식 표현을 주장하는 것조차도 복음의 진리를 흐리는 ‘행위’의 하나가 될 수 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이신칭의의 복음에 추가하여 다른 무언가를 본질이라고 주장하면서 주님의 식탁이나 전도 사역에서 다른 성도들로부터 자신을 ‘분리’하려는 많은 베드로들이 존재하는데, 그들을 복음의 자유와 해방에 관한 바울의 이해에 직면시킬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