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말기부터 중세까지 신학자들이 에덴을 인간 본성 해석의 장치로 사용한 과정을 추적하며, 아감벤과 에리우게나의 비유적 해석, 단테 『신곡』의 지상낙원 읽기까지 아우르며 낙원의 의미를 새롭게 질문하는 사유의 여정을 담는다.
‘낙원’의 원래 의미는 ‘정원’이다. 저자가 주목하는 것은 인류가 건설해온 다양한 형태의 멋진 정원들이 아니라 성서에 나오는 시원적 정원 에덴동산이다. 이 책은 - 고대 말기와 중세의 신학 문헌들을 토대로 - 아우구스티누스나 아퀴나스 같은 그리스도교 신학의 핵심 인물들이 어떻게 인간 본성의 본질적인 의미를 정의할 목적으로 ‘에덴동산’, 즉 ‘지상낙원’을 중요한 이론적 장치로 활용해왔는지에 대한 세밀한 분석으로 이루어진다. ‘정원’ 혹은 ‘낙원’은 일찍이 그리스도교 태동기의 교부들이 ‘인간의 본성’에 ? 즉 인간이 죄를 짓기 이전 상태의 본성에 - 부여했던 이름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리스도교가 제도화되면서부터는 우리가 죄 때문에 지상낙원에서 쫓겨났다는 사실이 더 중요해진다. 신학자들이 - 아울러 오늘날 서구문명사회의 지식인들이 - 에덴에 대해 논할 때 이야기의 핵심은 언제나 이 추방령이다. 에덴이 존재한다거나 인간이 그곳에 잠시라도 머물었다는 사실보다는 우리가 그곳에서 쫓겨난 존재라는 점을 더 중요하게 보는 것이다. 아감벤에 따르면, “서구 문명사회의 원천적인 신화소는 낙원이 아니라 낙원의 상실이라는 주장이 나올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실제로 일종의 시원적 상처라는 개념은 그리스도교 문화와 근대 문화에 뿌리 깊은 영향을 끼쳤고, 이 과정에서 결국 지상의 행복을 탐색하려는 모든 시도는 실패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발생했다.” 아감벤은 최초의 인간 아담의 죄를 인류가 유전적으로 물려받았다는 그리스도교적인 관점이 다름 아닌 아우구스티누스의 원죄 개념에서 유래했다고 진단한다. 아우구스티누스에 따르면, 인간은 원래 정원에서 추방당한 상태로 벌을 받듯 살아야 하는 존재, 스스로가 짓지 않은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다. 이러한 관점을 토대로 만들어진 것이 바로 아담이라는 한 개인의 행동으로 인해 모든 인간의 본성이 돌이킬 수 없는 형태로 부패했다는 교리다. 하지만 여기서 “인간이 낙원에서 추방되는 사건의 본질적으로 아우구스티누스적인 의미가 드러난다. 그의 입장에서, 인간은 스스로의 본성을 부패시킬 줄만 알지 이를 스스로의 힘으로는 회복하지 못하기 때문에, 교회가 성사를 통해 배포하는 신성한 은총과 이 은총을 기반으로 전개되는 구원의 역사 및 경제에 스스로를 의탁할 수밖에 없는 존재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이러한 이론은 곧장 지상낙원이 본질적으로는 텅 빈, 쓸모없는 장소라는 관점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견해에 맞서 아감벤은 에리우게나처럼 창세기의 이야기를 알레고리적인 방식으로 해석한다. 에리우게나와 아감벤의 관점에서 에덴동산은 원죄 이전 상태의 인간 본성을 가리키는 일종의 비유에 가깝다. 에리우게나는 아우구스티누스처럼 인간의 본성이 원죄의 유전으로 인해 완전히 부패했다고 보는 관점과 이중적으로 상반되는 논리를 펼친다. 그는 인간의 본성뿐만 아니라 지상낙원도 신에 의해 순수하고 부패될 수 없는 형태로 창조되었다고 말한다. 죄에 의한 부패는 인간의 본성이 아닌 행위에서 비롯될 뿐이다. 인간이 죄로 인해 자연적 본성에서, 즉 신이 그에게 부여한 본성에서 벗어난 이유는 그가 본성을 남용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황의 비유적인 설명이 바로 인간은 처음부터 낙원에서 벗어났다는, 혹은 낙원에 한 번도 머문 적이 없다는 이야기다. 에리우게나의 입장에서 부패한 인간 본성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의 자연적 본성은 언제나 무고하며 무사하다. 단지 우리가 처음부터 이 본성에서 떠나 있을 뿐이다. 이 책의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사실 단테의 『신곡』을 읽는 저자의 독특하고 예리한 해석 방식이다. 아감벤은 전통-신학적인 단테 해석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고수하며, 단테가 전하는 지상낙원의 이야기를 중세-신학적이고 아퀴나스적인 관점에서 벗어나 읽을 것을 권한다. 왜냐하면 단테의 입장에서도 지상낙원은 지상의 지복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신곡』의 진정한 의미는 이 작품에서 ‘낙원’이 천사가 가로막고 있어서 들어갈 수 없는 곳이 아니라 주인공 단테처럼 인류가 아무런 장애 없이 들어갈 수 있는 장소라는 단테의 설정에서 발견된다. 아감벤은 지복과 정원의 불가분한 관계에 대해 사유했던 단테와 달리 신학자들은 지상 낙원의 건설 가능성에 대해 전혀 주목하지 못했다고 지적한다. 신학자들이 지상낙원을 어떤 식으로든 정치 패러다임으로 간주하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