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이미지

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역사소설 > 한국 역사소설
· ISBN : 9788996417026
· 쪽수 : 435쪽
· 출판일 : 2010-05-15
책 소개
목차
작가의 말
주요 인물
여섯 번째 봄|농사를 짓다|정부인 이윤선|봉림대군|무역으로 돈을 벌다|번답과 수거|조선 처자 김수진|말을 휘몰아 달릴 수 있다면|청 태종은 죽고|어린 황제와 섭정왕|비익연리|7년 만의 일시 귀국|경진년의 악몽|무인 신무룡|의주상단|갈 수 없다|은밀한 사병|심양관|성리학과 사대부|다시 심양으로|괴소문|역관 정명수|팔기군|새로운 인식|조 소용|북경으로 가는 길|개구리와 바다거북|아담 샬 신부|환천희지|세자의 구상|환향녀|소무처럼 살았느냐|갈등|허망한 죽음| 감춰진 진실|술렁이는 민심|양화당|음모의 끝|별궁|마지막 몸부림|나는 조선의 세자빈이다|그 후
저자소개
리뷰
책속에서
빈궁은 길을 나섰다. 새로 일굴 땅들을 둘러보러 가는 길이었다. 먼저 사하보沙河堡부터 가보기로 했다.
옥교에 오르려는데 바람 한줄기가 목덜미를 훑고 지나갔다. 한기를 완전히 떨쳐내지 않은 바람이었지만 섬뜩한 느낌은 남기지 않았다.
사하보까지는 40리라 했다. 반나절 거리다. 옥교 안에서 부대끼고 있노라니 지루했다. 빈궁은 이럴 때 말을 휘몰아 달릴 수 있다면 얼마나 후련할까 생각하며 창문을 열었다. 그 작은 문을 통해 밖을 보니 저 멀리 제법 높은 산이 눈에 들어왔다.
봄비가 남긴 물안개가 듬성듬성 산 중턱에 박혀 미풍에 나부끼는 명주자락처럼 가물거렸다. 그보다 더 높이 걸린 엷은 안개는 산마루터기를 가린 채 하늘과 맞닿아 흐느적거렸다.
이윽고 옥교가 멈췄다.
“마마. 도착했나이다.”
최 상궁이 문을 열어주며 말했다. 최 상궁이 내민 손을 잡고 옥교에서 내리니 어디선가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물이 있구먼.”
“예, 마마. 바로 저기에 제법 넉넉한 냇물이 흐르고 있습니다.”
“전하! 소첩이 감히 종사에 대해 한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두 말씀, 세 말씀도 좋소. 어서 말해보시오.”
조녀의 무릎을 베고 누운 임금이 빙그레 웃으며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임금이 농을 해주자 소용은 임금의 가슴에 제 얼굴을 얹고, 오른손으론 임금의 아랫배를 쓰다듬으며 교태를 떨었다. 임금의 숨이 막 가빠지려는 순간 소용은 상체를 일으킨 뒤 임금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혹 근간에 궁 안팎에서 떠도는 참담한 소문을 들으셨는지요?”
순간 임금의 얼굴이 굳어졌다.
“참담한 소문이라니….”
“차마 입에 올리기도 주저됩니다만 전하께서 오랑캐들의 뜻에 따라 세자에게 양위를 하실 것이라느니, 아니면 대리청정을 윤허하실 것이라는 등등의 기막힌 이야기들이 오간다 하옵니다.”
임금은 벌떡 일어나 앉으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크게 놀라지는 않았다. 자신도 그런 소문을 이미 어디선가 들은 모양이었다.
“전하께서 아직 강건하신데 감히 양위를 입에 올리고, 대리청정 운운하다니요, 그것도 오랑캐들의 뜻에 따라 그렇게 될 것이라니, 어이없지 않습니까?”
임금은 고개를 젖혀 천정을 응시했다. 낯빛이 어둡고 숨소리가 거칠었다. 그의 얼굴에 드리워진 그늘이 분노의 끝인지, 두려움의 시초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들리기론 마치 세자가 그 같은 황망한 소문의 중심에 서 있는 듯 여겨지지만 신첩의 좁은 소견으로는 아무리 나쁘게 생각해봐도 그건 아닐 것입니다. 세자는 절대로 그런 불측한 짓을 꾸밀 사람이 아니옵니다.”
조녀는 슬쩍 왕의 눈치를 살피며 뜸을 들였다. 너무나 천연덕스러운 말솜씨였다.
“정이는 얼마 전 한밤중에 동료들과 함께 옛 시가를 찾아가 복수를 해주고 왔답니다.”
수진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복수? 어떻게 말이냐?”
복면을 한 동료 여섯과 함께 담을 넘은 정이는 시부모와 남편, 그 형제자매, 그리고 노복 등 열두 명을 순식간에 제압, 결박한 뒤 한 방에 몰아넣었다. 벌벌 떠는 그들 앞에서 정이는 환도를 빼들고 복면을 풀었다. 시부모와 남편 등이 정이를 보자 기겁을 했다.
정이는 칼날을 번득이며 그들에게 말했다. 내가 청군에 붙잡혀 끌려갈 때 당신들 중 누구 한 사람 나를 보호하기 위해 저항하거나 통사정이라도 해본 사람이 있느냐, 무서워서 부들부들 떨며 애타게 구원을 바라던 내 눈길을 모두 피하지 않았느냐, 며느리도 자식인데 그런 자식을 그토록 매정하게 보냈으면 부끄러워 몸 둘 바를 몰라야 마땅하거늘, 오히려 죽지 않고 살아왔다고 모진 구박을 하다니….
일장훈계를 한 정이는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느냐고 한 사람, 한 사람 지목해가며 물었다. 그들 모두로부터 잘못했다는 대답을 듣고 나서 정이는 말했다.
“내가 당신들에게서 당한 걸 생각하면 목숨을 거두어도 분이 다 풀리지 않겠지만 만약 그리 한다면 당신들과 하등 다를 게 없는 사람이 될 것 같아 용서해주겠다. 당신들도 나를 붙잡지 않겠지만, 설령 붙잡는다 해도 이번엔 내가 이 집에 머물 생각이 추호도 없다. 이것으로 나와 당신들 간의 인연은 끝이 났다.”
말을 끝낸 정이는 먼저 방을 나섰다. 맨 나중에 보성댁이 방문을 나서다 다시 방안으로 들어갔다. 그러고는 벌벌 떠는 가족들의 뒤통수를 한 대씩 주먹으로 후려친 뒤 말했다.
“만약 오늘 일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했다는 말이 우리 귀에 들어오면 멸문지화를 당할 것이야. 명심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