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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영미소설
· ISBN : 9788997186372
· 쪽수 : 328쪽
· 출판일 : 2014-12-20
책 소개
목차
1부 여행의 시작
2부 인간의 도시
3부 폴린 66
4부 집으로 가는 길
무라카미 하루키의 후기
리뷰
책속에서
자동피아노는 땔감만큼이나 소중하다. 한겨울 날 지붕에 눈이 잔뜩 쌓이면 담요를 잔뜩 뒤집어쓴 채 이를 달그락거리며 안타까운 시선으로 피아노를 바라볼 때가 있다. 빌어먹을, 당장 도끼를 가져와, 메이크피스. 그럼 따뜻하게 지낼 수 있잖아! 하지만 내게는 말 그대로 자존심 문제다. 이제 어디에서 자동피아노를 구하겠는가? 당장에야 조율도 못하고 고쳐줄 사람도 없지만 그렇다고 그런 사람이 존재하지 않거나 언젠가 태어나지 않는다는 얘기는 아니지 않은가. 우리 세대야 자동피아노 조율은커녕 글도 제대로 읽지 못하지만 부모와 조부모 세대는 자랑거리가 많았다. 내 말을 믿지 못하겠다면 당장 저 피아노를 보라. 단풍나무로 된 겉판의 옹두리 무늬를 보고 황동 페달의 세련된 마무리를 보라. 피아노를 만든 사람은 분명 그 일을 좋아했다. 사랑으로 저 물건을 만들었다. 그런데 어떻게 땔감으로 날려버릴 수 있단 말인가.
아버지는 일이 잘못되면 ‘서쪽으로 빠진다’라는 표현을 썼다. 하지만 서쪽은 나한테 항상 좋은 느낌이었다. 결국 서향은 태양의 길이 아닌가. 더욱이 내가 아는 어떤 역사에서도 사람들은 자유와 거처를 찾아 서쪽으로 이동했다. 반대로 우리 세상은 ‘북쪽으로 빠진’ 셈이다. 정말로 북쪽으로 빠졌다. 그것도 얼마나 먼 북쪽인지 나도 이제 막 배우려는 참이다.
나는 역사상 가장 늙은 세상에 태어났다. 마치 두들겨 맞은 말처럼 옛 상처로 절룩거리다가, 올라탄 사람을 무자비하게 내동댕이쳐버리는 세상. 게다가 부모님은 소박한 장식과 성서의 맑고 솔직담백한 말씀을 사랑한다고 주장했지만, 뒤로는 기억의 돌과 비행기와 유리로 만든 세상을 감추고서 알려주려 하지 않았다. 알 수 없는 일이야 수없이 많지만 그렇다고 무지를 가장할 수는 없다. 정말로 모른다면 어쩔 수 없지만 모르는 척은 분명 위선이다. 나와 샤를로와 안나가 흙탕물을 에덴동산 삼아 바보들처럼 놀 듯, 정착민들도 이 상처투성이의 혹성 한 모퉁이가 지상낙원이라도 되는 양 무사히 안착한 것을 자축하며 두고 온 세계를 구제불능으로 여기곤 했다. 멀리 떠나온 덕에 비로소 안전해졌다고 자신한 셈이니, 이 무슨 오만의 극치란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