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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시 > 한국시
· ISBN : 9788997581719
· 쪽수 : 120쪽
· 출판일 : 2015-05-04
책 소개
목차
시인의 말
제1부
정지
이 저녁이 슬프다
밤 소쩍새
손잡이
북향
컴백
단풍 든다
오십
저녁 숲
느낌은 그늘의 이동 속도보다 빠르다
옆
전단지는 문을 먹고 자란다
밤과 벌레
사라진 시간
꽃잎
정착
제2부
로드 킬
냉이꽃
그 남자
‘달새’에서
폭설
물집
봄
사막을 걷는 사람과 빨간 누비 잠바 입은
남자와
답
어떤 저녁 식사
후문
먼지
핵심
콩의 사리를 생각하다
‘망해사’에서
지네
제3부
고구마를 굽다
보시
조운 생가
만장굴
공부
구두수선집
세기조명사
팥죽을 끓이며
직립 냉장고
언 고기
심연
구멍 난 가오리
노월촌
목단 빛 엄마
울음 옷
꽃잎 지던 날
오동꽃
해설 | 무서운 관계론으로의 삶에 대한 사랑·오철수
저자소개
책속에서
정지
공중의 새 한 마리
제주도 광풍에 맞서 있다
움직이지 않는
검은 얼룩 하나
바람이 밀어가지도
바람을 뚫지도 못하는
저 높디높은 대립이
깨지는 순간이란
아득히 먼 새가
그의 행로를 바꿨을 때
오랜 지침의 무모함을 알아차려
날개 뼈를 살짝 비틀었을 때
아니 공중의 굳센 근육이 멈칫
극점을 넘어서는 1mm만큼의 안간힘을
그만 턱 하니
수긍해 버리고 말았을 때
폭설
한 시간에 십 밀리 넘게 쏟아지는 눈이었다면
그건 사랑일 수밖에 없다고 해 두자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 모든 이유와 부적절과 두려움을
덮어버릴 수 있었겠느냐 돌아서는 사내의 좁은 등조차
눈부신 흰 꽃으로 세울 수 있었겠느냐
어찌 시궁창에 뒹구는 꼬막 껍질과 먹다 버린 생선 가시까지
꽃으로 피어날 수 있었겠느냐
그렇지 않고서야 좁은 나뭇가지 위, 말라붙은 잎의 굴곡진 가슴팍, 굵은 소나무 등걸의
보이지 않던 옆구리까지, 짤막한 존재의 가는 실핏줄 위에 다가가서
그 내밀한 더듬이까지 다
모양을 만들 수 있었겠느냐
오늘 이처럼 햇빛 내려와
눈들은 얼다 녹다 길바닥에 붙어버리고 말았는데
산을 뒤덮었던 것들 슬쩍 사라진 후
가장자리 버석거리고 안쪽은 갱엿처럼 딱딱하게 들떠서는
번질거리고, 더러는 염화칼슘과 바퀴의 흔적으로 지저분한
나무 밑에서는 아직도 흰 몸을 부둥키고 있는 것이
온갖 삿대질에 욕까지 받아내는
상처 입은 짐승 같은 그것이
사랑이 지나간 자리라고 어찌 말하지 않겠느냐
사랑이 아니고서야 그 찬란했던 시작을
어떻게 이처럼 마무리할 수 있겠느냐
콩의 사리를 생각하다
한 양푼 가득 콩을 간다
국수를 위하여 그 매끈한 살이
담길 놀놀한 국물을 만든다
까칠한 건더기를 체에 걸러내는데
물을 붓고 저으니 거칠고도
갈리지 않은 덩이가 남는다
물을 부어 되풀이하면 할수록
풀리지 못하고 졸아드는 덩이
자음처럼 꺾이는 어떤 기억이
기름진 모음을 붙들고
한 끼니 두 끼니 또박또박
지나가는 하루의 끄트머리를 맴돌다
몸의 가장 깊은 곳으로 숨어버렸던
시간조차도 어쩌지 못하고
완성으로 내버려둔 콩의 사리
나의 기름진 모음은 무엇일까
불과 물과 시간 그리고 슬픔으로도
녹일 수 없었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