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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일본소설 > 1950년대 이후 일본소설
· ISBN : 9788997722303
· 쪽수 : 668쪽
· 출판일 : 2013-06-21
책 소개
리뷰
책속에서
나는 체념했다. 예상이란 강한 충격을 받아도 덜 상처받게끔 장치해 둔 완충재와 같아서 미리 각오를 해 두면 어떤 사태에 직면하더라도 덜컥 고꾸라지지는 않는다. 과장해서 말하면 나는 기노우치와 처음 만난 순간부터 이날을 각오하고 있었다. 앞날에 대한 내 예상은 감탄스러우리만치 정확했지만 그것은 누구나 할 법한 예상이었으므로 결코 자랑거리는 아니었다. 나는 그저 결국 이럴 줄 알았다는 혼잣말로 나를 다독여 보호할 작정이었다.
하지만 각오와 달리 좀처럼 그 자리에서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눈물이 났다. 아직 마음이 움직인다는 뜻이었다. 우뚝 멈춘 마음은 슬픔조차 느끼지 못하니까.
나는 왜 기노우치의 거짓말에 속아 넘어가지 않는가. 그가 이토록 완벽한 연기를 보여 줬는데도 통하지 않는다는 게 억울했다. 나는 기꺼이 속고 싶었다. 감쪽같이 속아서 마음의 평안을 얻고 싶었다.
하늘은 무심했다. 얻고자 한 건 마음의 평안이었지만 정작 얻은 건 기노우치의 거짓말을 간파하는 능력이었다. 이따위 것이 여자의 감이라면 개나 주라지. 내게는 개똥만큼도 필요 없는 능력이었다. 나는 그에게 속아 편해지고 싶었다.
“이유가 뭐죠?”
묻지 않고는 못 배길 만큼 궁금했다. 왜 내가 아닐까. 왜 하필이면 도키코일까. 아무리 끙끙거려도 도무지 풀리지 않는 수학 문제 같았다. 내가 모르는 세계에 해답이 존재하는 문제였다. 기노우치의 설명 없이는 답을 알아낼 길이 없었다.
“그런 게 논리로 설명될 리 없잖아.”
질문이 영 글러 먹었다는 투의 대답이었다.
“내가 당신을 좋아하는 이유를 대라면 하나하나 다 열거할게. 그건 얼마든지 가능하니까. 그렇다고 그 조건들 때문에 당신을 좋아한다는 얘기는 아냐. 조건과 감정은 다른 문제야. 내가 열거한 모든 조건을 갖춘 또 다른 여자가 나타난다고 해도 그 여자를 반드시 좋아하게 되리란 보장은 없거든. 절대로 장담 못 하지.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어떤 점 때문에 당신한테 끌리는 거니까. 연애 감정이란 그런 거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