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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영미소설
· ISBN : 9788997773541
· 쪽수 : 184쪽
· 출판일 : 2012-12-30
책 소개
책속에서
노인은 목덜미에 깊은 주름이 잡혀 무척 여위고 수척해 보였다. 그의 두 볼에는 열대 바다의 뜨거운 햇볕에 그을려 생긴 양성 피부암 같은 갈색 반점들이 있었다. 그 반점들은 얼굴 양쪽으로 넓게 퍼져 있었다. 그리고 노인의 두 손에는 낚싯줄로 물고기를 잡아 올릴 때 파인 깊은 상처들이 나 있었다. 어느 것 하나 이제 막 생긴 상처가 아니었다. 그것은 모두 물고기 없는 사막의 침식지대처럼 바싹 메마른 묵은 상처들이었다. 노인의 모든 것은 완전히 늙어 있었다. 다만 힘차고 지치지 않는 바다 같은 두 눈빛에는 무엇에도 굴하지 않을 생기가 감돌았다.
“산티아고 할아버지.”
소년이 바닷가 기슭으로 작은 배를 끌어올리는 노인을 도우며 말문을 열었다.
“저는 곧 할아버지랑 다시 바다에 나갈 수 있을 거예요. 돈을 좀 벌었거든요.”
노인은 오랫동안 소년에게 낚시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그 때문인지 소년은 노인을 잘 따랐다.
“아니다, 얘야. 넌 운이 좋은 배를 타는 게 낫단다. 그들과 계속 함께 있으렴.”
그러나 소년은 노인의 말을 쉬 들으려 하지 않았다.
“할아버지, 옛날에 혼자 팔십칠 일 동안이나 물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하다가 저랑 함께 바다로 나가서 삼 주 내내 대어를 낚아 올렸잖아요. 생각나시지요?”
“그럼, 기억하지. 네가 날 믿지 못해서 떠난 게 아니라는 것도 안단다.”
노인은 금세 잠에 빠져들었다. 그는 꿈속에서 어렸을 적 아프리카에서 보았던 눈부신 백사장과 긴 황금빛 해변, 높은 곶, 높게 솟아오른 갈색의 산들을 보았다. 그는 요즘 매일 밤마다 꿈속에서 그 해안에 살다시피 했다. 파도소리를 들으며 원주민들이 탄 배가 파도 너머에서 다가오는 것을 지켜보았다. 꿈결에 갑판 위의 뱃밥(물이 스며들지 않게 배의 틈새를 메우는 물건_옮긴이 주)과 타르 냄새를 맡았고, 아침이면 뭍바람이 실어다주는 아프리카의 냄새를 느꼈다. 보통 노인은 뭍바람을 맡으면서 잠에서 깨어나 옷을 입은 뒤 소년을 깨우러 갔다. 하지만 오늘 밤에는 유달리 뭍바람 냄새가 일찍 불어왔다. 그는 꿈속에서 도 너무 이르다는 것을 알면서 여전히 꿈을 꾸었다.
노인은 꿈결에 바다에 솟아오른 섬의 하얀 봉우리들을 보았다. 또한 카나리아 제도의 정박소와 항구들의 모습도 눈에 띄었다. 더 이상 노인은 폭풍우나 여자, 대어, 큰 사건, 싸움, 힘을 겨루는 시합, 그리고 죽은 아내에 관련된 꿈을 꾸지 않았다. 그저 여러 마을들과 해변을 거니는 사자들에 관한 꿈을 꿀 뿐이었다. 어스름해질 무렵, 사자들은 어린 고양이들처럼 뛰어놀았다. 그는 소년을 사랑하는 것처럼 사자들을 사랑했다. 하지만 노인은 꿈속에서 소년을 보지는 못했다. 그는 스르르 잠에서 깨어나 열린 문틈으로 달을 바라보고는 베개 삼아 돌돌 말아져 있던 바지를 펴서 입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