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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로맨스소설 > 한국 로맨스소설
· ISBN : 9788997830718
· 쪽수 : 432쪽
· 출판일 : 2013-01-14
책 소개
저자소개
리뷰
책속에서
재킷이 사라진 그녀의 상체에는 새하얀 블라우스만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냥 보기에도 선이 가냘프게 보이는 여자였지만 블라우스 속에 가려진 몸의 실루엣은 태오가 상상했던 것 이상이었다.
너무, 말랐다. 바람 불면 날아갈 것 같다는 말이 순간 떠오를 만큼. 태오는 자기도 모르게 미간에 주름을 잡고 나희의 모습을 바라봤다.
신경이 예민한가. 왜 저렇게 말랐담. 쯧쯧, 아무리 봐도 내 취향, 아니라니까.
태오가 속으로 혀를 찼다.
무릎까지 오는 치마라니, 저런 어정쩡한 길이의 치마를 입은 여자는 또 오랜만에 만나보는군.
태오는 조금쯤 신기한 기분과, 고리타분함에서 느끼는 따분함을 오가는 기분으로 나희를 봤다. 한국화 하면 세 손가락에 꼽힌다는 윤병춘 옹에게 저렇게 미적 감각 없는 손녀라니. 세련됨을 좋아하는 태오에게 나희의 모습이 눈에 찰 리 없었다. 저렇게 깡마르고 감각 없는 여자는 도무지 그의 취향과는 멀었다.
절레절레 고개를 흔드는 속마음과는 달리 태오는 빙그르 미소 띤 얼굴로 나희를 바라봤다.
“맞선이라니, 아무래도 구시대적이죠?”
“글쎄요. 구시대적이라고 해도 나와 맞을 사람을 가려내시는 어르신들의 지혜를 전 존경해요.”
눈을 들어 올리면 바로 마주쳐오는 태오의 시선이 부담스러워 눈을 내리깔고 있던 나희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반질반질 빛나지만 진지하지 않은 태오의 눈과 건조하지만 곧은 신념이 있는 나희의 시선이 마주쳤다. 곧은 시선을 맞춰오며 조곤조곤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나희의 모습을 태오는 의외라는 듯 바라봤다.
그가 듣기로 자식이 귀한 집안에서 윤나희는 금지옥엽이라고 했다. 귀엽다, 귀엽다 소리를 들으며 오냐오냐 자란 딸들이 보통 그렇듯 고집 세고 사랑스러운 척을 하며 자기가 원하는 걸 쟁취하기 위해 보이는 연약한 척은 기본으로 갖추고 있을 거라 예상했다. 그의 맞선녀 윤나희도.
그러나 이렇게 똑 부러진 모습은 예상 못했다. 뭐, 첫 등장부터 그의 예상을 깨버리긴 했지만. 그의 예상 어디에도 저렇게 똑 부러질 듯한 연약한 몸도, 범접하기 힘들어 보이는 저런 옷차림도 없었다. 그의 예상이 조금 어긋나고 있었다. 어딘가 찜찜함이 자리를 비집고 들어오는 기분을 느끼며 태오가 다시 나희를 향해 미소를 날릴 때쯤 음식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 여자도 마지못해 나온 게 분명하군.
태오는 옅게 핏물이 비치는 스테이크 조각을 입안에 넣으며 생각했다. 그가 말을 걸지 않는 한 별다른 말이 없는 나희를 태오는 어느새 관찰하고 있었다.
어디서 저런 예절교육을 받았는지 궁금하군. <식기 사용의 바른 예>란 책이 있다면 딱 저 모습을 제시하고 있을 게 분명하다는 엉뚱한 생각을 하며 태오가 나희를 쳐다봤다. 나희는 스테이크를 썰고 있었다. 태오의 눈에 웃음이 차오르며 반짝 빛났다.
고기 크기가 자로 잰 듯 똑같아. 저 여자 성격 나오는데?
작은 고기 한 점을 집어 입안에 넣는다. 음식 씹는 소리는 당연히 들려오지 않았고 입안 음식이 보이는 일도 결코 없었다. 스테이크를 씹는 오물거리는 입술이 꽤 귀엽게 보여 태오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식사는 입에 맞으십니까?”
“네, 맛있네요.”
“질서 정연한데요?”
웃음기 실린 목소리에 나희가 무슨 말인지 몰라 의아한 얼굴로 태오를 바라봤다. 그는 싱긋 웃으며 손가락으로 그녀가 썰어놓은 스테이크를 가리켰다. 태오의 손짓을 따라 시선을 내린 나희가 자신의 접시에 담긴 스테이크 조각들을 보고 순간 화르륵 볼이 뜨거워졌다. 놀림을 당한 기분이다. 고개를 들어 태오를 바라보는 나희의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러나 눈빛과는 달리 나희가 순간 입술 끝을 끌어올리며 미소를 지어보였다.
“제가 줄 세우길 좋아해서요. 아무래도 습관인 것 같죠? 남태오 씨 웃음 흘리는 것처럼 말이에요.”
“아아, 그런가 보군요.”
미소 속에 숨은 날선 대답에 태오는 처음과는 달리 조금 윤나희라는 여자에게 흥미가 생기기 시작했다. 서늘한 눈빛과 붉은 기가 어린 두 볼, 조롱이 섞인 미소. 조화롭지 않은 그 모습들을 여자는 자연스럽게 얼굴에 담고 있다. 온실 속의 공주님은 아닌 모양이다. 그를 쳐다보다 눈을 내리까는 나희를 보며 태오가 비죽이 미소를 뗬다. 자존심 상한 듯 보이는 눈빛이었는데 태연한 척 미소 짓는 모습이 꽤나 재미있다.
식사가 끝난 후 커피잔을 들어 올리는 태오의 시선이 나희를 지나 뒤편에 있는 레스토랑 입구 쪽으로 향했다. 그 순간 화려한 옷차림의 여자가 입구로 들어섰다. 일명 사자머리라고 불리는 파마를 한 여자는 몸에 딱 붙는 호피무늬의 짧은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여자의 화려한 외모에 사람들의 시선이 몰렸다. 여자는 잠깐 레스토랑 안을 두리번거리다가 태오와 눈이 마주치자 두 사람은 씨익 회심의 미소를 나눠가졌다. 여자는 거침없는 발걸음을 옮겼다.
“태오 씨!”
날카로운 목소리가 잔잔한 음악이 흐르고 있던 레스토랑 안에 쩌렁쩌렁 울렸다. 태오가 눈살을 찌푸리며 나희 뒤를 바라보자 그녀도 고개를 뒤로 돌렸다. 쭉쭉 뻗은 다리로 빠르게 다가오는 여자를 보는 나희의 시선은 여전히 차분했다.
여자는 사납게 치켜뜬 눈으로 태오와 나희가 있는 자리로 왔다. 여자의 싸늘한 시선이 나희를 향했다.
“이 여자 뭐야! 선본다는 거 진짜였어?”
“보면 몰라? 이게 무슨 짓이야?”
“어떻게 내게 이럴 수 있어? 어제까지도 날 부둥켜안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더니! 선이라니! 당신 정말 왜 이래?”
여자의 소프라노 목소리가 넓은 홀에 크게 울렸다. 태오는 태연한 얼굴로 미간에 주름을 잡고 씰룩이는 입술을 숨기며 여자를 쳐다봤다.
“나중에 이야기 해.”
“나중? 아니, 지금 해야겠어. 당신 내 남자야!”
“민선화, 지금 나 선보는 중인 거 안 보여?”
“당신 미쳤니? 어떻게 이런 여자랑! 남태오, 진짜 왜 이래?”
“선화야. 우선 집에 가 있어. 내가 연락할게.”
힐끗, 나희의 표정을 살폈다. 나희는 건조한 눈으로 그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기분 나쁜 표정도 놀란 표정도 아니었다. 태오는 진짜 눈살이 찌푸려지려는 걸 참아내며 이 연극을 제대로 성공시키기 위해 선화를 달래듯 부드럽게 말했다. 선화의 시선도 힐끗, 나희의 표정을 살폈다. 도무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표정에 선화는 입술을 삐죽이다 두 손을 들어 올려 얼굴을 가렸다.
“흡! 남태오, 진짜 이렇게 살면 안 되지!”
“나가 있어. 응?”
“으흐흑! 나쁜 놈!”
눈물을 흩뿌리는 목소리를 낸 선화가 날카롭게 소리를 지른 후 들어올 때와는 달리 비련의 여주인공처럼 뛰어나갔다. 레스토랑 안 사람들의 시선이 태오와 나희에게 쏠렸다. 태오는 사방에서 느껴지는 시선을 느끼며 조금 심했나라는 생각을 잠깐 했다. 그러나 그는 도무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나희의 얼굴을 보며 그 생각을 지웠다.
“나희 씨, 죄송합니다. 실례를 했군요.”
“괜찮아요.”
“아무래도 일어나봐야 할 것 같군요.”
“네, 그러세요.”
평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이해한다는 듯 바라보는 나희의 시선에 태오의 미간이 저절로 좁아졌다.
이 석연치 않은 반응이라니! 내가 어떻게 준비한 연극인데! 뭐 이런 여자가 다 있지?
태오는 헛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막으며 다시 한 번 미안하다고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변에서 어머, 어머, 하는 놀란 소리가 들려왔지만 태오도 나희도 주변의 소리를 못들은 듯 태연했다.
“그럼 조심히 들어가십시오.”
“잠시만요. 저희, 다음 약속은 정하고 가셔야죠.”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건네고 돌아서던 태오의 걸음이 그 자리에 딱 멈췄다. 놀람을 숨기지 못한 태오의 시선이 나희를 향했다.
나희는 자신에게 와 닿은 태오의 시선을 느끼며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그녀는 부드러운 미소를 띠운 것과 달리 똑 부러지는 목소리로 다시 말했다.
“다음에 만날 약속 정하고 가세요.”
“……지금 나랑 만나겠다는 겁니까?”
“네. 그 말이에요.”
“나랑 만나고 싶어요? 이 꼴을 보고서?”
“전 저희 할머니 의견을 존중해드리고 싶어요.”
“하……! 정말 효심 강한 손녀 따님이시군요.”
“칭찬 감사합니다.”
태오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어이없어서 더 이상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나희는 여전히 건조한 시선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태오는 순간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하, 하하하!”
표정 하나 없이 건조한 시선만 보내던 나희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그 얼굴을 바라보며 태오는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나희를 불렀다.
“윤나희 씨. 그토록 나와 만나고 싶다면, 우리 만나 봅시다.”
근사한 미소를 띤 태오가 나희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조금 더 미간이 찌푸려진 나희가 그의 손을 내려 보다 천천히 그의 손을 마주잡았다.
“그러죠, 남태오 씨.”
유쾌하게 빛나는 태오의 시선과 건조하게 가라앉은 나희의 시선이 정통으로 마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