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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대왕릉비

광개토대왕릉비

이형구, 박노희 (지은이)
새녘출판사
23,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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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대왕릉비
eBook 미리보기

책 정보

· 제목 : 광개토대왕릉비 
· 분류 : 국내도서 > 역사 > 한국고대~고려시대 > 한국고대사 > 고구려
· ISBN : 9788998153144
· 쪽수 : 394쪽
· 출판일 : 2014-09-29

책 소개

'광개토대왕릉비'는 광개토대왕의 재위 22년간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그 아들 장수왕이 즉위 2년에 국내성에 세운 거대한 기념비이다. 이 비는 당시 동아시아의 국제정세와 고구려의 위상을 상징적으로 대변한다. 이 책은 1987년에 출간된 <광개토대왕릉비 신연구>의 개정증보판이다.

목차

머리글
개정증보판 간행사

<제1부> 광개토대왕릉비(廣開土大王陵碑)와 문자고석(文字考釋)

제1장 광개토대왕릉비의 건립과 재발견
-제1절 개설
-제2절 광개토대왕릉비에 관한 전설
-제3절 광개토대왕릉비의 재발견
-제4절 쌍구가묵본(雙鉤加墨本)의 초전(初傳)

제2장 광개토대왕릉비문의 특징
-제1절 광개토대왕릉비문의 시대배경과 그 상관문제
-제2절 광개토대왕릉비 문자의 필획과 그 운용법
-제3절 광개토대왕릉비 문자의 구조
-제4절 광개토대왕릉비의 세계성
-제5절 광개토대왕릉비의 예술적 가치
-제6절 광개토대왕릉비의 역사적 가치
-제7절 소결(小結)

제3장 광개토대왕릉비문의 고석(考釋)
-제1절 고구려의 개국과 광개토대왕의 생애
-제2절 광개토대왕의 훈적
-제3절 수묘인 제도

<제2부> 광개토대왕릉비문의 문제점

제1장 이른바 신묘년 기사(辛卯年)의 위작(僞作)‘왜(倭)’자고(字考)
-제1절 머리글
-제2절 이른바 신묘년기사(辛卯年記事)와 그 영향
-제3절 이른바 신묘년기사에 대한 회의(懷疑)
-제4절 역사상으로 본 ‘倭’의 실체
-제5절 서법상으로 본 ‘倭’자의 허상과 진상
-제6절 “來渡海”자와 ‘破’자에 대한 고증
-제7절 “破百殘倭寇新羅”설
-제8절 맺는 글

제2장 위작‘倭’자고 재론
-제1절 머리글
-제2절 “倭”자의 출현과 삭제
-제3절 “倭寇”자의 원상설(原傷說)에 대하여
-제4절 맺는 글

제3장 이른바 경자년(庚子年)기사의 “위작(僞作) 왜‘만왜’자고(倭‘滿倭’潰考)”
-제1절 머리글
-제2절 이른바 신묘년기사에 대한 해석
-제3절 이른바 경자년기사의 “위작 倭‘滿倭’潰”고
-제4절 맺는 글

부록
-부록1. 廣開土大王紀의 對外關係記事
-부록2. 주내경신 쌍구가묵본
-부록3. 국립중앙도서관 탁본
-부록4. 서울대 규정각 탁본
-부록5. 주운태 탁본
-부록6. 대만 중앙연구원 역사어언연구소 부사년도서관 원석 탁본

저자소개

이형구 (지은이)    정보 더보기
홍익대에 입학하여 최순우 선생(전 국립중앙박물관장) 문하에서 수학했다. 대만에 유학하여 국립대만대학 대학원 고고인류학연구소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같은 대학원 역사연구소에서 『발해연안 고대문화의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대만 국립고궁박물원과 중앙연구원에서 객원연구원으로 연구활동하였다. 1981년 귀국 후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역사연구소 교수와 자료조사실장를 지냈다. 1996년 선문대학교 역사학과 개설과 함께 교수로 옮긴 후 학과장, 고고연구소장, 도서관장, 대학원장을 맡았다. 현재는 선문대학교 석좌교수로 있으면서 동양고고학연구소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주요활동으로는 ‘발해연안문명론’을 주창, 답사와 연구를 계속하는 한편, 1997년 풍납토성에서 하남위례성 왕궁유적을 발견하였고, 2002년에는 ‘아! 고구려전’의 추진위원장을 맡아 서울 코엑스에서 전시회를 개최하였고, 광개토대왕릉비 연구에도 매진하고 있다. 저서로 『한국 고대문화의 비밀』, 『고조선문화연구』(공저), 『단군과 고조선』(편저), 『광개토대왕릉비 신연구』(공저), 『고구려의 고고문물』(공저), 『서울 풍납토성[백제왕성]실측조사연구』, 『백제의 토성』, 『강화도 고인돌무덤[지석묘] 조사연구』, 『강화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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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희 (지은이)    정보 더보기
숙명여대 약학대학을 졸업하고 동방연서회에서 여초(如初) 김응현 선생으로부터 전서와 예서 및 해서 등을 전수받았다. 동방연서회에서 활동하였고, 대만에 유학하여 국립대만대학 의과대학 공공위생대학원에서 수학하였다. 그 후 중국문화대학 예술대학원에서 전 국립고궁박물원 부원장 장엄(莊嚴) 교수 문하에서 서예사와 광개토대왕릉비 서체를 수학하였다. 그리고 왕북악(王北岳) 교수에게서 논문을 지도받았다. 현재는 동양고고학연구소 연구원(서예사)으로 활동하고 있다. 귀국 후 1981년 연세대 국학연구원에서 「僞作‘倭’字考」(『동방학지』제29집)를 발표하였다. 독립기념관 광개토대왕릉비 복제비 제작 시 고증하고 지도하였다. 논저로는 『광개토대왕릉비문자고술급기연구(廣開土大王陵碑文字考述及其硏究)』그리고 『광개토대왕릉비 신연구』(공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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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중국에서는 한말(漢末)[건안(建安)10년, 205] 조조(曹操)의 금비령(禁碑令)과 위진(魏晉) 남북조 시대에 걸친 묘전금비령(墓前禁碑令)의 영향으로 위진에서 남북조까지 남아 있는 비각(碑刻) 자료는 비교적 적은 편이다. 따라서 이와 같은 금비(禁碑) 풍조가 고구려에도 미쳤을 것으로 짐작되는데, 이러한 사실은 이 능비문의 “자상조선왕이래묘상불안석비(自上祖先王以來墓上不安石碑)”[능비 제4면 제7행 제33자부터 제8행 제4자까지]에서도 알 수 있다.
그러나 고구려는 당시의 국제 질서로 보아 중국보다는 광대한 영토를 장악하고 높은 문화와 매우 안정된 생활을 영위하고 있던 고구려는 중원의 삼국분란(三國分亂)시기〔220~280〕나 위진 교체기[300년 전후시기] 또는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 시기의 혼란한 중국을 넘볼 수 있는 동북아의 패주로서 조금도 손색이 없는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 당사자인 광개토대왕이나 그 사왕(嗣王)인 장수왕이 중국의 금비령을 그리 크게 중시하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래서 장수왕은 선공선왕(先公先王) 이래로 초유이면서도 동북아에서 최대의 기념비(紀念碑)를 건립하게 되었을 것이다. 이와 같은 기념비는 지금까지도 세계 최대의 것임을 자타가 공인하고 있다.
이 능비와 관계있는 연구 논문 중에 나진옥(羅振玉)의 “고려호태왕비발(高麗好太王碑跋)”[1909]에서는 이 능비가 해동(海東) 고각(古刻)의 으뜸(此碑爲海東古刻之冠)이라고 인정하였다. 그리고 일본인 수곡제이랑(水谷悌二郞)도 지나(支那)[중국을 지칭] 고비(古碑)가 호태왕비의 거대함만 못하다고 하였다. (...중략...) 그들 모두가 한결같이 이 능비문의 서법과 그 존재 가치를 칭송하였는데, 이는 분에 넘치는 찬사만은 아니다. 실제로 이 능비는 비신(碑身)의 위려함, 서체(書體)의 질박함, 비문(碑文)의 호방함, 그리고 자품(字品)의 근엄함뿐만 아니라 도처에 독창적인 면을 가지고 있다. 또한 이 거대한 광개토대왕의 훈적비의 문자는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서법 재료의 하나일 뿐만 아니라, 동양 금석학상에서도 매우 귀중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따라서 이 능비문은 매우 높은 서예사적 가치를 가지고 있으며, 아울러 역사적 가치 또한 매우 높다 하겠다.


우리들이 이미 알고 있듯이 이 능비는 고구려 제19대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의 훈적비이다.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란 시호(諡號)는 대왕이 재위 중에 국토를 넓게 확장하였기 때문에 바쳐진 이름이다. 광개토대왕이 개척한 국경은 북으로 송화강(松花江), 서로 요하(遼河), 동으로 연해주(沿海州), 남으로 한강(漢江) 유역에 이른다. 이러한 공적은 모두 이 능비의 비문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 능비문은 평문서사체(平文敍事體)로 광개토대왕과 관계있는 일의 공적을 서술하였다. 이 비문 중의 적지 않은 기록들에 의해서 우리들은 이전에 잘못 알고 있었던 역사 기록들, 예를 들면 광개토대왕의 생몰(生歿)연대·재위 연대·재위 기간 중의 국제 관계, 광개토대왕이 마련한 제도와 법령 등을 수정·보완할 수 있게 되었다. 이와 같은 역사성을 띤 문장에서 우리가 검토할 만한 가치가 있는 곳 역시 적지 않다. 즉 이 능비문의 제1면 제9행의 이른바 신묘년기사(辛卯年記事)와 경자년기사(庚子年記事) 같은 기록은 우리들이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능비의 형식은 방주형사면환각(方柱形四面環刻)비인데 이런 형식은 중국의 비에서는 나타나지 않는 고구려의 독창적인 형식으로 고구려비의 전형을 이룬다. 이런 고구려비의 형식은 고구려의 또 다른 비인 중원고구려비에 나타난다. 또한 이 능비의 형태는 일본 고대삼비의 하나인 ‘산지상비(山之の上碑)’에서도 보인다. 특히 중원고구려비는 마치 광개토대왕릉비를 축소해 놓은 것과 같다. 따라서 이 능비 형식의 전파 과정을 추측할 수가 있다. 이것도 앞으로 충분히 연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이 능비문의 문자 중에는 이체자와 간체자가 매우 많으며 중국 문자에서 찾아볼 수 없는 것도 적지 않다. 이것 역시 이 능비의 가장 큰 특징 중의 하나인데, 어떤 이체자는 신라와 고대일본의 문자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이것 역시 주목할 만하다.
광개토대왕릉비의 문자체는 웅위하면서도 소박하다. 여기에 당시의 시대 배경이 서로 융합되어 창조된 새로운 품격을 지닌 서체(書體)로써 독창적인 종합서체이다. 즉, 고구려서체라고 말할 수 있다. 광개토대왕릉비는 고구려문화의 금자탑으로써 이것은 고구려역사와 한국 금석학은 물론 서법사상 매우 중요한 가치가 있을 뿐만 아니라 동양 서법(書法)상에서도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광개토대왕릉비문에 관한 지금까지의 연구는 주로 이른바 신묘년기사의 해석에 관한 논쟁이 대종을 이루고 있다. 이는 한·일 사학계의 초점이 되고 있는 바이지만 대개 횡정충직의 석문을 그대로 인정하는 바탕 위에서 문맥상의 해석을 어떻게 하느냐에 주력해 왔다고 볼 수 있다. 그 쟁론은 대체로 “왜”를 주어로 하느냐, 아니면 생략된 “고구려”가 주어이냐, 그렇지 않으면 “倭”자는 부동하는 기정자(旣定字)로 두고 “來渡海破”가 원문과 다를 것이라는 세 가지 설로 크게 나뉘어 왔다.
“倭”자를 그대로 고착시키는 한 이와 같은 여러 설은 지난 백 년 동안에도 해결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다가올 백 년 동안에도 미궁의 장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이와 같은 상황 아래에서 지난 근 백 년 간에 조금도 의심해 본 적이 없는 “倭”자 자체를 부정한다는 것은 심히 위험스러운 시도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지금까지 고증·서술한 것처럼 역사상으로는 “왜”[왜구]가 백제나 신라 또는 가라를 파할 만한 실력을 갖춘 실체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고, 또한 서법상으로도 “倭”자는 수많은 의문점과 모순점을 내포하고 있음을 밝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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