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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예술/대중문화 > 건축 > 건축이론/비평/역사
· ISBN : 9788998573096
· 쪽수 : 280쪽
· 출판일 : 2020-09-01
목차
프롤로그: 상상, 도면, 건물이 서로를 지시하는 방식 (현명석) 7
건물이 의미하는 방식 (넬슨 굿맨 지음, 김현섭 옮김) 21
건축적 투사 (로빈 에반스 지음, 정만영 옮김) 59
건축 드로잉이 작동하는 방식(소닛 바프나 지음, 현명석 옮김) 137
서막(마리오 카르포 지음, 박민수 옮김) 215
도판 출처 273
책속에서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Leon Battista Alberti는 건축가의 역할을 건물 짓기가 아닌 건물 그리기 또는 디자인하기로 정립했다. 이후 건축가가 다루는 매체는 그 작업의 종착점인 건물로부터 점점 멀어졌고, 건축가의 직능은 건물의 특정한 속성을 지시하거나, 그것에 관한 드로잉을 그리거나, 모형을 만드는 등 재현 행위를 통해 간접적으로 디자인을 실천하는 것이 주가 되었다. 실제로 건축 디자인이 이루어지는 매체인 드로잉과, 디자인의 대상이 되는 매체인 건물은 본질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다. 둘 사이에는 늘 메꿔야 할 틈이 있으며, 그 가운데서 일부 포개지기도 하고, 어긋나기도 하며, 때로는 이종의 무언가를 파생시키기도 한다. 따라서 우리는 ‘재현’이라는 주제를 생각할 때 일반적으로 떠올리는 ‘의미’, ‘해석’, ‘매체’, ‘투명성’과 ‘불투명성’, ‘동일성’과 ‘비동일성’ 등의 의제를 건축에서도 상정해볼 수 있다. 물론 ‘건축’ 재현이 갖는 고유한 특수성은 언제나 고려돼야 한다. 건축 재현은 역사적, 기술적인 층위에서 어느 정도 틀이 갖추어진, 궁극적으로는 건축적인 무언가를 지향하는 체계인 까닭이다. 여기에 모아놓은 글들은 건축의 영역에서 벌어지는 이러한 재현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결국 근대 건축의 표준화(알파벳)와 디지털 건축의 변이(알고리듬) 논리는 하나의 기원에서 비롯되었다. 따라서 디지털 혁명 이후 기존 건축의 패러다임이 직면한 위기는 단지 근대적 표준화의 대척점에 있는 생성과 변이, 그리고 경제성이 담보된 주문 제작에 의해서만 촉발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더 큰 위협은 재현하는 것과 재현되는 것 사이 완벽한 동일시가 이미 실현 단계에 도달했다는 데 있다. 예를 들어 건축가의 디자인을 구현하는 매체가 더 이상 시각화된 드로잉이 아닌 수화된 정보라면, 그리고 기계가 이 정보를 받아 즉각적이고 비매개적인 방식으로 건물을 생산한다면 어떨까? 다시 말해 알베르티가 벌려 놓은 틈새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조건이 된다면, 동일시의 필요성 그리고 우리가 지금껏 고안하여 알고 있던 동일시를 지향하는 다양한 표기 체계는 설자리를 잃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이미 3D 프린팅이나 디지털 공작 등을 통해 그 징후를 목격하고있다. 한발 더 나아가 기계에 디자인의 기하학 정보를 공급하는 주체가 인간이 아니라면, 기계가 그 고유의 지성으로 스스로 정보를 취합하고 재편하고 파생시켜 건축 디자인과 생산을 동시에 실천하게 된다면 우리는 건축가와 건축 기율을 근본부터 다시 정의해야 할지도 모른다. 이미 변화의 징후는 차고 넘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