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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경제경영 > 경제학/경제일반 > 경제사/경제전망 > 세계 경제사/경제전망
· ISBN : 9788998760106
· 쪽수 : 380쪽
· 출판일 : 2013-04-15
책 소개
목차
프롤로그 _ 올리가르히를 알아야 러시아가 보인다
제1부 ― 러시아 격변기에는 올리가르히가 있다
● 충격 요법, 망가진 경제의 치유책?
● 민영화, 약삭빠른 자들의 잔치
● 피도 눈물도 없는 ‘그들만의 리그’
● 세기의 사기 사건, 주식담보부 대출 경매
● 다가온 대선, 병든 옐친을 구하라
● 추악한 ‘스뱌진베스트’ 매각의 뒤안길
● 외환위기의 시련과 4회의 총리 교체
● 알루미늄 전쟁-Aluminium Wars
● 푸틴의 등장과 고개 숙인 총수들
● 유코스 사태, 경제통제의 부활
● 알부자들의 충성 경쟁
● 제2의 고향, ‘런던그라드’
● 밖으로 눈을 돌려라
● ‘얽히고설킨’ 회사 지분 나눠 갖기
● 2008년 금융 위기, 용과 이무기의 갈림길
● 실세 총리, 투자에 찬물을 끼얹다
● 영국 석유 메이저, BP의 눈물
● 공룡 공기업을 구하라, 민영화 앞으로!
● 마지막 역할, 지역 격차의 해결사
● 푸틴의 장기 집권과 올리가르히, 그리고 러시아의 미래
제2부 ― 올리가르히, 그들은 누구인가?
● 격동기의 풍운아 - 보리스 베레조프스키
● 몰락한 미디어 재벌 - 블라디미르 구신스키
● 푸틴에 맞선 일그러진 영웅 - 미하일 호도르코프스키
● 약탈자와 자선가의 두 얼굴 - 블라디미르 포타닌
● 순종과 처세의 달인 - 로만 아브라모비치
● 석유 산업의 산 증인 - 바기트 알렉페로프
● 알루미늄의 제왕 - 올렉 데리파스카
● 대선에 출마한 NBA 구단주 - 미하일 프로호로프
● ‘강철 인간Iron Man’ - 알렉세이 모르다쇼프
● 대기만성형의 최고 부자 - 알리셰르 우스마노프
● 박사 출신의 사격 달인 - 블라디미르 리신
● 파베르제의 달걀을 품다 - 빅토르 벡셀베르크
● 유리창닦이로 출발한 벼락부자 - 미하일 프리드만
● 가스프롬에 가려진 2인자 - 레오니드 미헬슨
● 초호화판 기행을 일삼는 젊은 재벌 - 안드레이 멜니첸코
부록 ― 주목할 러시아 기업들
▶가 스 ◇가스프롬 ◇노바텍
▶석 유 ◇로스네프티 ◇루코일 ◇TNK-BP ◇수르구트네프테가스 ◇군보르
▶철 강 ◇세베르스탈 ◇에브라즈 ◇노볼리페츠크스틸 ◇메첼 ◇테엠카 ◇메탈로인베스트
▶광 물 ◇노릴스크니켈 ◇통합루살 ◇브슴포-아비스마
▶자동차 ◇아프토바즈 ◇가즈 ◇솔레르스
참고 문헌
크레디트
저자소개
리뷰
책속에서
● 충격 요법, 망가진 소련 경제의 치유책?
1991년 8월 18일, 공산 보수파 요원들은 미하일 고르바초프Mikhail Gorbachev 소련 초대 대통령이 여름휴가를 보내고 있는 흑해 연안 크리미아 반도-현 우크라이나 남부-의 대통령 전용 별장으로 향했다. 고르바초프는 뜨거운 태양 아래 독서와 일광욕을 즐기고 있는 중이었다. 보수파 지도자가 고르바초프에게 다가와 경례를 하더니 국가 위기 사태를 해결하고자 혁명을 일으켰다면서 정권 이양 문서에 서명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고르바초프는 당시만 해도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소련의 대통령답게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오히려 그들을 설득했다. ‘소련에서는 개방 정책을 지속해야 하고, 폐쇄된 경제 체제로는 미래가 없다’는 것이 요지였다.
그러나 개방 즉, ‘페레스트로이카’ 때문에 소련 경제가 파탄이 나고 있다고 주장해 온 보수파에게 고르바초프의 항변은 먹힐 리가 없었다. 이들은 소련 내 15개 공화국에 광범위한 자치권을 주기로 한 신연방조약이 소련을 무너뜨리는 꼴을 지켜보고만 있을 수 없어 봉기했다고 강조했다.
고르바초프 역시도 전혀 설득을 당하지 않았다. 그가 계속 서명하기를 거부하자, 이들은 고르바초프를 억류했다. 다음 날 아침, TV 정규 방송이 모두 꺼진 가운데 사건 주동자 중 한 명인 겐나디 야나예프Gennady Yanayev(1937~2010) 부통령은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고르바초프의 등장으로 우리나라를 비롯한 자본주의 세계에 잠시 모습을 드러냈던 소련의 문고리가 다시 잠기는 순간이었다. 서방의 열렬한 환호를 받았던 페레스트로이카 정책도 이제는 종말을 고해야 하는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그러나 보수파의 세상은 삼일천하로 끝났다. 모스크바Moscow에는 고르바초프의 맞수인 보리스 옐친Boris Yeltsin(1931~2007)이 버티고 있었다. 1991년 12월 소련이 공식 해체되기 6개월 전, 그는 소련 내 러시아공화국의 초대 직선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옐친은 고르바초프와 마찬가지로 소련 경제에 대수술이 필요하다는 점은 인식했지만 소련 해체주의자라는 점에서 그와 달랐다. 고르바초프가 기업에 인센티브를 부여해 점진적인 시장경제를 추구해 가되 소련 체제를 끝까지 고수하려 했던 반면 옐친은 고르바초프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자신의 공화국인 러시아에서 완전한 자본주의적 실험을 하고자 했다.
_<제1부 러시아의 격변기에는 올리가르히가 있다> 중에서
● 민영화, 약삭빠른 자들의 잔치
‘위기는 곧 기회다!’
소련 해체 후 러시아의 법과 제도적 정비가 덜 된 상황에서 약삭빠른 자들은 돈을 벌 기회를 포착했다. 제한된 형태였지만 수입이 자유화되면서 서방에서 질 좋은 제품을 들여올 수 있었다. 진귀한 유럽산 물건에 러시아인들은 감탄을 쏟아 냈고, 돈 있는 자들은 몇 배를 주고 구입했다. 초기 자본은 없었지만 경제 체제의 이행 과정에서 목돈을 만질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들은 노멘클라투라와 달리 출신은 평범했지만 어려울 때 기회를 찾아낼 줄 아는 진정한 사업가적 기질을 지니고 있었다. 노멘클라투라 올리가르히가 기존의 권력 구조에서 내부자 지위를 활용해 돈을 벌었다면 이들은 맨땅에서 발품을 팔아야 했다. 관건은 앞날의 변화를 내다보고 자신을 거기에 맞출 줄 아는 재능이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이른바 기업가 올리가르히로 불리는 이들은 자수성가 스타일로 국립 모스크바대MGU(엠게우) 등 최고 학부를 나왔다. 그만큼 세상의 흐름을 파악하는 눈이 날카로웠고, 재능과 추진력도 있었다. 또 원래부터 가진 것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고 도전에 나설 수 있었다.
옐친 시절 러시아의 정·재계를 호령했던 보리스 베레조프스키Boris Berezovsky, 1990년대 미디어 제국을 이룬 블라디미르 구신스키Vladimir Gusinsky, 알루미늄 재벌인 올렉 데리파스카Oleg Deripaska, 한때 러시아 최고 부자였던 미하일 호도르코프스키Mikhail Khodorkovsky, 잉글랜드 프로축구팀 ‘첼시’ 구단주로도 유명한 로만 아브라모비치Roman Abramovich 등이 바로 그들이다. 이들은 박봉에 시달리는 평범한 직장 생활을 접고 막 불기 시작한 개혁, ‘페레스트로이카Perestroika’ 열풍을 스스로 흡수해 가며 자기 사업을 하는 모험을 택했다. 또 유대인 혈통을 가진 이들은 이미 짜인 조직 내에서는 어차피 출세하기도 힘든 만큼 격변기에 야심을 키워 새로운 도전에 나서는 것이 불가피했다.
_<제1부 러시아의 격변기에는 올리가르히가 있다> 중에서
● 격동기의 풍운아-보리스 베레조프스키
소련 해체 후 제1세대 올리가르히 가운데 베레조프스키만큼 매스컴에 꾸준히 등장하는 인물도 또 없을 것이다. 미국 경제 전문지 <포브스>가 발표하는 전 세계 부호 명단에서 사라진 지 오래지만 올리가르히의 원조답게 지금도 영국 망명지에서 강력한 반反푸틴 활동을 벌이며 여전히 세간의 주목을 받고 있다. 1990년대 중반 러시아 최고 부자이자 크렘린 내 정치적 킹메이커, 옐친 패밀리의 일원으로서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던 과거의 위세를 감안하면 현재 외국을 떠돌고 있는 그의 신세는 참으로 처량하다. 하지만 이제는 매스컴에서 찾아보기 힘든 구신스키나 스몰렌스키 등 동년배 올리가르히에 비해 아직도 이름이 오르내리고 있다는 점에서 베레조프스키는 러시아 올리가르히 역사에서 살아 있는 증인이다.
베레조프스키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듬해인 1946년 1월 모스크바에 있는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평생을 건설 근로자로 살았던 그의 부친은 1930년대에 시베리아의 중부 도시 톰스크를 떠나 모스크바로 이주해 왔다. 모친은 소아과 간호사였다. 베레조프스키는 국립 모스크바대, 일명 엠게우에서 수리물리학을 전공하여 박사 학위를 받은 뒤 한동안 연구실에 처박혀 학문에만 몰두했다. 학술 교류 차원에서 1970년대에 미국 하버드대 경영대학원을 방문했고, 1988년에는 캘리포니아 공과대학Caltech에서 수학하는 등 젊은 시절에 소위 ‘미국 물’도 먹었다.
베레조프스키는 출신 성분이 유대인이다. 지금의 러시아도 그렇지만 소련 시절에는 반유대주의 분위기가 훨씬 강해 유대인들은 정치·사회적 신분 상승에 큰 제약을 받았다. 그렇기 때문에 머리 좋고 박사 학위를 가진 유대인들은 연구 활동으로 생계를 꾸려 가는 것이 정석 코스였다. 베레조프스키가 박사 학위를 받고 들어간 모스크바 통제과학연구소Control Science Research Institute만 해도 뛰어난 유대인 과학 영재들이 다수 있었다.
그러나 베레조프스키는 성격상 처음부터 연구실에 틀어박혀 진중하게 실험만 하고 있을 타입은 아니었다. 본인 스스로도 “난 훌륭한 과학자 자질은 없었다. 과학을 하는 것은 재미있기는 했지만 그건 나의 일이 아니라고 느꼈다.”고 회고했다. 실제 그는 여러 가지 일에 나서기를 좋아하고 늘 이곳저곳을 분주히 다니는 왕성한 정력의 소유자였다. 속된 말로 ‘약방의 감초’라고나 할까. 훗날 연구실 동료들은 젊은 시절 베레조프스키에 대해 “아이디어 제조기였다.”, “너무 활동적이어서 분초를 다투어 여기저기를 쏘다녔다.”는 식으로 평가했다. 그는 사람과의 관계를 맺는 데도 능숙했다. 이로 인해 그는 그다지 뛰어난 과학 실력은 없었지만 소련의 권위 있는 상들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는 분야별 명망가에게 주는 ‘레닌 콤소몰상Prize of Lenin Komsomol’을 받았는데 당시만 해도 유대인이 수상자가 되기는 상당히 어려운 일이었다. 그를 아는 지인들은 베레조프스키가 수상 목표를 정하면 주요 관련 인사들을 한 명씩 접촉해 목표를 이루어 냈다고 설명했다. 야심이 컸던 그는 이후 노벨상 수상까지 목표로 삼았지만 페레스트로이카 열풍이 불자 사업에 투신하면서 노벨상 계획은 접어야 했다.
_ <제2부 올리가르히 그들은 누구인가> 중에서



















